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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확인이 안되면 한 줄의 글도 써내려가지 못하는 기자들은 가끔 일탈을 꿈꾼다. 직접 창작해 낸 허구의 세계를 통해 '팩트'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8년간 기자로 일하면서 "자신이 뱉는 말의 영향력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언어를 빼앗고 싶었던" 최이아 작가는 기사가 아닌 소설을 새로운 무기로 택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둘러싼 혐오의 언어들을 접하면서 그는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것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언어를 대체하는 세계"를 상상했고 첫 SF 소설집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허블)를 펴냈다.

<저주토끼>로 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는 "SF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부터 무섭기 시작해서 끝까지 정말 현실적으로 너무 무서웠다"하며 "인간은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이기에 타인의 피를 마셔야만 하고, 의사소통을 갈망하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신의 뇌를 통해 의사소통의 근간인 언어를 오염시킨다. 작품을 읽으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으슬으슬 무서워지는 순간들을 경험했다"고 추천했다.

소설집에 실린 6편의 작품에는 돈으로 젊음을 사야만 하는 피부과 상담사, 대학 실험실에서 노비처럼 일하는 대학원생, 고립된 농촌에서 사는 결혼이주여성 등이 등장해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디스토피아를 흡입력 있게 보여준다.

최이아 작가는 단편 <제니의 역>으로 2023년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비가 그칠 때까지>로 손바닥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장편 소설을 준비 중이다.

"지금은 소설이 더 매력적"

- 기자와 비영리 단체 활동가를 거쳐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여러 계기가 있지만 한 단어로 요약하면 '울분'인 것 같습니다. 직접 보고 겪은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들, 제게 닿지는 않았으나 지구에서 늘 벌어지는 전쟁 같은 압도적 폭력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거나 제한적이라는 점에 대해 무기력감을 느꼈습니다. 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형식의 글을 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설에 이르렀습니다."

-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기자와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소설가 중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가요?

"지금의 저에겐 소설이 더 매력적입니다. 삶의 밖과 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문학은 저의 사유와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로 일할 때는 '소설 쓰고 있네'라는 비아냥이 부끄럽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되레 자랑이 된 거죠. 물론 리얼리티도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르포르타주를 써보고 싶습니다."

- SF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습작은 순문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글이 잘 안 풀렸습니다. 삶과 문학의 경계를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 글이 진부해졌습니다. 여러 책을 읽던 중 SF를 읽으면서 개안하는 기분을 느꼈고, 그 뒤로 설정과 소재의 범위를 현실 경계 안에 가두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장르를 스스로 구분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 중편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서 묘사되는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구상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직접적인 계기는 '이태원 참사'입니다. 참사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향한 혐오적인 말들을 보고 들으면서 가슴이 저리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실실 웃으면서 기자간담회를 하는 공직자의 모습을 영상으로 접할 때는 온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사회적 재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의 혐오 표현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유흥과 결부되면서 한층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인간에게 정말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은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것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언어를 대체하는 세계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에게 정말 언어가 필요할까 고민한 계기는 이태원 참사"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를 하루 앞둔 10월 2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참사 현장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그레이스 라셰드의 어머니 존 라셰드씨가 추모하고 있다. [공동취재]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를 하루 앞둔 10월 2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참사 현장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그레이스 라셰드의 어머니 존 라셰드씨가 추모하고 있다. [공동취재] ⓒ 연합뉴스

- '이윽고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말 대신 '정신 알갱이'로 소통하게 된 아진과 선린이 평온을 찾습니다. 나름 해피엔딩인데 세상을 향한 작가의 낙관적 시선이 아직 남아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언어로 인한 상처는 체온을 품은 언어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으니까요. 관계와 사랑, 연대와 공감이 혐오와 증오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이주여성, 피부과 상담사, 노비처럼 일하는 대학원생 등 약자들이 많습니다. 인물 구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요?

"저는 의식적으로 등장인물을 비가시화된 존재로 설정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플롯을 짜고, 줄거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저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 등장인물이 탄생하니깐요. 억눌린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고 의도한 건 아니란 겁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비가시화된 존재가 많이 등장하는 건 아마 제 경험, 제 시선이 향한 곳과 연관이 깊지 않나 싶습니다. 소외에 대한 고민과 활동가로 일하면서 본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 고통받고 갈등하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 이런 것들이 글에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소외와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를 인물 구상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 '제니의 역'에서 마인드베이스 기능을 이용해 이주여성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제니의 모습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농촌에서 지내는 이주여성은 한국어가 일정 수준 이상 늘기 어렵다고 합니다. 대화 주제는 농사일이 대부분이고 대화 상대는 한정적이니까요. 근로계약서를 쓰는 법률 영역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죠. 스마트폰 실시간 통역 기능은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소통 절벽을 메우기 어렵습니다. 이주여성이 첨단 스마트폰을 쓴다고 해서 관계가 전복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사람만 한 부피를 가진, 인간이 가진 사물이 아닌 제삼자적 관점을 지닌 존재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원통형 로봇 제니의 마인드베이스 기능은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 작품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설레고 짜릿하고 행복했던 순간들. 서운하고 짜증 나고 화도 났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관계의 흔적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의 자취들.' 어느 작품에 있는 문장인지는 독자들이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 독자들이 작품집에서 주목해 줬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복잡하고 다변하며, 이기적이면서도 희생적인 인간의 입체적인 정서와 욕망을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해 줬으면 합니다. 배경과 설정은 다양해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변화'가 작품들을 관통하는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첫 소설집을 출간한 소감은 어떻습니까?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자다 깬 새벽 밝은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열어보고 있습니다."

- 지금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나 문제 혹은 사회적 이슈는 뭔가요?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현안은 하늘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포탄입니다. 폭격 받는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깨기도 합니다. 천장을 두부 뭉개듯 부수고 집안에 들어온 사람 몸통만 한 포탄이 제 몸을 두 동강 내는 꿈이 아주 생생합니다. 확전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울감을 느껴서 잘 안 보려 합니다.

준비 중인 작품은 가제가 <안락한 오후>인 장편소설입니다. 인구 대부분이 노인인 사회에서의 참정권은 과연 지금과 같은 의미일지에 대한 고민을 소재로 담았습니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가 출간된 이후에 집필 집중도가 좀 떨어졌는데, 연말 연초에는 다시 집중해서 쓸 생각입니다."

 최이아 작가
최이아 작가 ⓒ 최이아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최이아 (지은이), 허블(2024)


#최이아#이윽고언어가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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