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세계는 '돌아온 장고' 트럼프의 컴백으로 뒤숭숭한데, 이런 난국에 대처해야 할 우리는 하필이면 지지율 20%를 오르내리는, 역대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인 야당 대표는 선거법 1심 판결에서 예상치 못한 중형으로 휘청거리면서, 이른바 '사법 리스크'라는 게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김건희 리스크' 등으로 코너에 몰려있던 윤석열 정권은 물 만났다는 듯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밀려오는 쓰나미에 관계없이 그 알량한 '정권'을 지키자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뭣이 중한디?
이순신을 다시 떠올리다
이런 어려운 때를 맞이할 때마다 옛날 일들을 떠올려 본다. 분명 옛날엔 이보다 더 힘든 때가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 위기들을 어떻게 넘겼었을까? 어려운 고비마다 싸움의 맨 앞장을 섰던 수많은 열사, 의사, 의병장, 영웅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그러다가 다시 이순신을 생각한다. 광화문 매연 속에 오늘도 서 계시는 그분이 아니라, 명량(울돌목) 해전을 앞두고 온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마지막을 건 노량의 결전장으로 나가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그 고독한 이순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원균이 다 말아먹은 조선해군. 거북선 3척을 포함해 판옥선 140여 척 등 조선해군이 보유한 모든 선단을 2만 병사와 함께 칠천량 앞바다에 수장시킨 원균은 육지로 올라와 도망치다 적군에 잡혀 죽었다. 칠천량 패전 후 다급해진 선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지만, 돌아온 이순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폐허 속에 남은 달랑 열두 척의 배였다. 그나마 이 배들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끌고 도망쳐 살아남았던 것들이다. 조선 해군이 사실상 궤멸된 것은 선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더러 수군을 해체하고 권율 휘하의 육군에 합류하라고 하였다. 그때 이순신이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臣常有十二隻)'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한다. 이순신은 바보인가? 아니 이순신이 바보일 리 없다. 자신의 의지에 대한 지극한 신뢰요,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백성에 대한 믿음이며, 죽기를 각오한 자의 단호함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누구보다 먼저 백성을 버리고, 궁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뻤던, 그러면서도 이순신의 의기와 용맹을 시기했던 용렬한 군주 선조 따위가 가늠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억울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누명을 쓰는 일일 것이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받고 죄를 뒤집어쓰는 일, 자기가 책임질 일이 아닌데도 그 죄를 덮어쓰는 일. 이렇게 따지면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억울했던 이는 예수 아니었을까? 자기 죄가 아닌, 뭇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덮어쓰고 십자가에 오르신....
이순신도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겪는다. 서른두 살,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하고 발령받아 간 곳이 함경도 북단 녹둔도란 곳이다. 오늘날은 러시아 영토로 되어 있는, 두만강 상의 섬인 녹둔도 둔전 관리 책임자로 있다가 여진족의 기습을 받는다. 격퇴했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컸다. 당시 함경북병사 이일은 이 피해 책임을 하급 장교인 이순신에게 덮어씌우고 서울로 압송한다. 국경수비 장교에서 졸지에 사형수가 됐으나 선조는 파직시키고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형을 감면한다. 그런데 이 패전은 애초에 이순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국경 방어를 위해 꾸준히 병력증강을 요청했던 이순신의 요구를 무시했던 이일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이 일로 계급장 떼이고 백의종군해야 했던 이순신은 다음 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두 번째 백의종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원균 등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포 주변의 남해안에 진을 치고 명나라와의 협상을 이어간다. 조정에서는 남해안 일대 왜군을 적극적으로 소탕하라고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지만, 병력의 열세, 지형상 불리함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를 원균 등이 끝없이 비방, 모함한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순신에게 피아의 대비, 지형, 기후 등 승전에 필요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의심 많고 속 좁은 선조는 이런 이순신을 항명죄로 몰아 삭탈관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바보 이순신을 원망 해 본다. 그런 임금, 그런 군주에게 끝까지 목숨 바쳐 순종할 게 뭐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다. 그가 목숨 바쳐 충성을 바쳤던 것은, 아무리 왕조시대 윤리에 젖은 이순신일지라도, 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믿고 따르던 백성들, 무능한 임금과 지배층 때문에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야 했던 무고한 백성들과 산하 때문 아니었을까?
그가 아니면 조선은 1910년이 아니라 1592년에 진작 망했을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을 보면 이런 내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파죽지세의 일본을 막아섰던 이순신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20만은 19일 만인 6월 11일(음 5월 2일) 한양에 도달한다. 그 사이에 상주 전투도 치르고, 신립 장군과의 충주 탄금대 전투도 치렀는데 말이다. 그냥 걸어와도 2주일이면 오는 거리를 20만 대군이, 전투까지 치르며 올라왔는데도 19일 밖에 안 걸렸다면 유의미한 조선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무풍지대를 일본군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이런 무풍가도에 시원한 일격을 가한 것이 바로 이순신이다.
1592년 6월 16일, 일본군이 텅 빈 경복궁을 함락시킨 나흘 후, 이순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일본군 배 26척을 침몰시킨다. 전쟁 발발 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같은 날 오후 합포 해전에서 적선 5척 격파, 다음날인 6월 17일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11척을 침몰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바다에서 멈춰 세웠다. 20여 일 후 사천 해전에서 일본 배 13척 격침. 이 전투에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한다. 이틀 후인 7월 10일 당포 해전에서 왜선 21척을 격침, 한 달 뒤인 8월 14일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서는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첫머리를 연 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은 바다에서는 완전히 우리 수군에 무릎을 꿇고, 이후 서해안을 통해 한양으로 북상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다. 한편 이 전투는 육지에서 연전연패하던 육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승리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점에서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튼 중요한 전투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이순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승리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쫓겨나고, 결국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처참하게 궤멸된 조선 수군을 다시 물려받아야 했던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특히 칠천량 패전 후,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일본 대군과 다시 일전을 벌여야 했던 그의 속은 어땠을까?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 후 꼭 두 달 만인 10월 26일,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척 일본 수군과 명량(울돌목)에서 맞선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가는 바람에 남겨진 배 12척에 한 척이 더 추가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결국 적선 133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투를 앞둔 그는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번민했을 것인가? 엄청난 열세에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휘하 장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며, 어떤 전술을 써야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고민으로 그는 아마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10월 25일(음 9월 15일) <난중일기>(이석호 옮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 불가하므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겨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약속하여 가로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한다 했음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장병들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길 때는 군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이다.'
이른바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의 각오를 밝힌 것이다. 이순신의 절대고독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시대의 이순신을 기다리며
총체적 난국이다. 위기는 겹겹이 쌓여 있고, 나라 안팎으로는 높은 파도가 몰아칠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고 풀어가야 할 리더십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 중에 이순신처럼 절박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끝까지 꿀만 빨아먹겠다는 자들만 도처에 득실거린다. 그리하여 더욱 총체적 난국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도 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없었다면 그 존재를 미처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순신들이 있기를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범구 장발장은행장님은 인권연대 운영위원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사람소리>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