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억울합니다, 의원님들.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80대 노인의 짙은 호소가 울려퍼졌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종전까지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으로 난타전을 벌였던 여야 의원들조차 침묵을 지켰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의에 가까스로 발언 기회를 얻은 그는 말을 이었다.
"14살 먹은 애기를, 허훈옥이를 1950년도 10월에 죽여놓고 어떻게 20년 후에 '암살대원'으로 조작을 할 수 있습니까. 진짜 암살대원이라면, 사람을 죽였어야 하는데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다 죽였는지 아무 내용도 없지 않습니까."
지난 1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참고인으로 참석한 진도유족회 회원 허경옥(87)씨는 자신의 나이 13살에 한 살 터울이던 친형, 허훈옥씨를 '진도 사건'으로 잃었다. 진도 사건은 전남 진도군에 살던 주민들이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몰려 군경에 희생된 사건이다.
그런데 형의 죽음은 공산당 논란과는 무관했다는 게 허씨의 주장이다. 경찰의 위세를 등에 업은 당시 마을 이장 김진오(가명)씨 요구를 허씨 가족들이 들어주지 않자, 형을 '빨갱이'로 경찰에 고발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경찰은 형을 "한 번 더 죽였다". 형이 사망한 지 19년 뒤 공문서에서 형에게 '암살대원' 딱지를 붙였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14살이었던 나이도 19살로 바꿨다. 형의 명예회복을 바라며 3년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를 통해 진실 규명 절차를 밟았지만, 진화위는 경찰의 '암살대원' 딱지를 근거로 지난 3월 이 사건을 보류 처리했다.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게 이번 생 '마지막 숙제'라고 밝힌 허씨 마지막 용기를 그러모아 국감장 발언대 앞에 섰다. 하지만 행안위 국감이 열리던 날조차도, 모든 이목은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에 집중됐다. 겨우 한 마디 발언 기회를 얻어 호소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결국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학생이었던 형이 '빨갱이'로 죽었다
"하필 국회에 참고인으로 나가고 바로 다음 날이, 형의 양력 기일이었어요. 그래서 마음이 아렸어요."
지난 29일 전남 장성 백양사 부근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허씨는 요즘 유난히 형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형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7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형과 장난치던 시절이 눈에 선하다고도 했다.
형은 유난히 장난기가 많았다. 동생인 허씨에게 장난을 걸어올 때면 허씨는 약이 바짝 올라 조약돌을 손에 쥐고 형을 뒤쫓아가곤 했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은 '단짝'과도 같았다. 허씨는 형과 평생 친구로 남으리라 기대했다. 허씨의 가슴 속에 지난 1950년 음력 9월이 생에 가장 아픈 날로 남아있는 것도 어린 시절 형과 보낸 기억들 때문이다.
형이 사망한 날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몇 초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죽은 형님을 들것에 들고 마을까지 왔어요. 그런데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 헝겊 같은 걸로 칭칭 감아놨더라고. 마을 사람들이랑 같이 산 정상까지 가서, 따라가 형을 묻고 왔어요. 그 후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어느 날, 어머니가 형을 사후 결혼시키자고 해서 합장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뼈들을 닦다가 보니까 해골에 두개골이 없어. 경찰이 턱 밑으로 총을 쏴서 머리가 날아간 것 같아요. 얼굴에 헝겊을 감아둔 이유를, 그때 알았지."
당시 진도중학교 1학년이었던 형에게 실제 총을 겨눈 건 경찰이었다. 하지만 허씨 말에 따르면 당시 형을 죽인 진범은 따로 있었다. 군청 산림과에서 임산물 단속원으로 일했던 마을 이장 김진오씨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일인 체제야. 아무도 그 사람을 대적할 수가 없어요. 부락민들한테 돈을 빼앗아다 경찰한테 돈다발을 가져다줬거든. 남의 개도 먹으라고 가져다주고. 그러다 보니 경찰이 김씨 말만 믿고 사람들을 공산당이라고 몰아 죽이는 거야. 김씨는 자기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마을에서 운영하는 목화창고에 가뒀어요. 그중에서 재산을 내놓겠다는 사람은 빼주고, 거부하는 사람은 '빨갱이'라고, 경찰에 밀고를 했죠. 목화창고로 끌려간 날 아니면 이튿날, 그 사람들 모두 죽었어."
형이 청포리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한 것도 허씨 집안의 논밭, 집을 탐냈던 김씨 요구를 허씨의 아버지, 허왕씨가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에 밉보인 허왕씨는 앞서 김씨 밀고에 한 차례 '공산당'으로 몰려 사흘간이나 경찰서에 조사를 받고 나온 상황이었다. 허왕씨를 죽이지 못하자 김씨는 최종적으로 논밭을 요구했고 거부당하자 대신 형을 '빨갱이'로 고발해 숨지게 했다. 그런데 형이 살해당했던 같은 시간, 장소에서 목숨을 잃은 건 형 혼자만이 아니다.
"김씨 땅이 있으면 양 옆으로 우리 논과 동네 주민인 문진춘씨네 논이 붙어 있었어요. 두 쪽에 다 '땅을 달라'고 했는데 안 주니까 문씨와 형 둘 모두를 죽인 거지. 또 허윤씨는 집 화장실이 김씨 집 앞에 붙어있었어요. 오가기가 불편하니까, 김씨가 허윤한테 화장실을 내놓으라고 했고 그걸 줬는데도 목화창고에 가뒀다가 세 사람을 같이 죽였어요."
그렇게 허씨는 허무하게 형을 잃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허씨의 아버지 허왕씨도 생을 등졌다. 아버지 허씨는 형이 사망한 뒤 "논과 집을 아들 생명과 바꿨다"고 자책하다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진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전체 희생자는 진화위에 접수된 건만 총 41명에 이른다.
"14살에 암살대원이라니... 나라가 형을 두 번 죽였다"
그렇게 살아온 어느 날, 허씨는 실낱 같은 희망을 엿봤다. 지난 2021년 처음 '진화위' 진실 규명 절차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형의 명예를 회복시킬 기회라는 생각에 그해 3월 곧장 사건을 접수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허씨가 그동안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문건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진도경찰서가 1969년 12월 8월 작성한 '대공'이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사살자 및 동 가족 동향 명부'다. 이 문건은 한국전쟁 시기 민간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성장 과정에서 경찰이나 우익에 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감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명부에서 형은 북한 측 '암살대원'으로 적혀 있었다. 형의 나이도 19세로 표기돼 있었다.
"'암살대원' 얘기를 처음 듣고,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에요. 표현을 못 하겠어.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일이였지. 경찰이 형이 죽고 무려 20년 뒤에 형을 북한 측 암살대원이라고 적어두다니. 20~30살이나 된 사람이면 그건 모르겠어요. 근데 어떻게 14살짜리를 암살대원으로 조작할 수가 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애기를. 나라가 형을 두 번 죽인 거예요."
오로지 암살대원, 네 글자 뿐이었다. 주장을 입증할 경찰 측 자료는 없었다. 당초 이 문건은 1기 진화위가 피해자들의 희생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전국의 경찰서로부터 입수한 문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2기 진화위의 조사1국은 이를 근거로 지난 3월 12일 허씨의 형이 부역자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고 전원위원회에 명예 회복을 시켜줄 수 없다는 '진실규명 불능' 안을 올렸다. 야당 측 위원들이 반발하면서 당장의 결론은 '보류'됐지만 이후 10개월이 넘도록 판단은 지연되고 있다.
심지어 장부 자체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진화위 측도 인정하고 있다. 진화위가 지난 24일 발간한 <진화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결정서>에 따르면, 이 '대공' 문건에는 북한 점령기 이전에 사망한 사람이 북한 암살대원으로 표기돼 있기도 했다. 그 만큼 명부 자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진화위는 현재 이 문건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사건의 쟁점 관련 외부 자문을 받고 있다. 진화위 내부 관계자는 3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기록이 100%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모호한 입장을 내놨다.
'사살자명부'에는 일부 오류가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문○○의 경우 인민군 점령기 이전인 1950. 7. 에 사망하였는데 암○○○으로 기재되어 있다. - 진화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결정서
'보류' 결정을 받아들어야 했던 건 허씨 뿐만이 아니다. 같은 날 전원회의에 오른 진도 사건의 희생자 41명 중 35명은 진실 규명 판정을 받은 반면 나머지 6명은 판단이 보류됐다. 4명은 허씨와 같은 경찰의 '암살대원' 표기가, 2명은 증거 불충분이 발목을 잡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실 규명을 받은 이들 중 앞서 언급한 문진춘씨가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허씨 형과 같은 날, 같은 이유(김진오씨의 밀고)로 사망한 데다 경찰 명부에 따르면 문씨는 '면민청 선전책'으로 적혀 있었는데도 판단 결과는 엇갈렸다.
같은 날, 같은 이유로 사망했는데... 진실 규명 '결과'가 달라졌다
지난 10일 허씨가 국정감사장에서 자리를 떠난 뒤, 김광동 진화위 위원장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시 진도 의신면 만길리에서는 양쪽의 허씨 가족들이 수십 명씩 다 희생을 당했습니다. 좌익에 의한 희생도 있고 우익에 의한 희생도 있고 어린아이에 의한 희생도 있고 어른의 희생도 있고 수십 명씩 희생을 당했고 누가 이쪽의 가해자인지 또 이쪽에 있던 사람이 누가 저쪽의 가해자인지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류해서 추가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지 단지 가해자만 있고, 여기 피해자들은 또 가해 활동에 있지 않았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허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정면 반박했다.
"내 말은, 형이 누구를 죽였으면 죽였다는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그 얘기는 안 하잖아요. 허훈옥이가 누구를 암살했다는 얘기는 없고, 그런 사실도 없어. 그런데도 사실을 틀리게 만들고 있잖아요. 자신들 주장을 밀고 나가려는 술책인 거예요."
진화위가 55년 전 작성한 경찰 문건을 바탕으로 진도 사건의 희생자를 북한 측 '부역자'로 의심하는 새, 진화위 2기의 종료 시점은 가까워지고 있다. 진화위 2기는 내년 5월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동시에 곧 아흔을 바라보며, 인생 '마지막 숙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허씨의 시간도 흘러간다.
"진상 규명이 되어 명예회복을 바라는 것이지, 국가로부터 그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고 가면 저 세상에서 부모님과 형님 뵐 낯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