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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말같지 않은 세상

말은 단순히 중립적이지 않다. 중립적인 듯 보이는 말에는 권력관계가 들어가 있고, 따라서 말은 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영어로 history는 'his + story', 즉 남자들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역사가 남성중심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들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속에 숨어있는 권력관계를 인식하는데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말 말고도 얄팍한 의도를 금방 알 수 있는 뻔한 말들도 있다. '세금폭탄'같은 말이 그렇다. 부동산 광풍이 부는 나라에서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낮은 보유세를 조금 올리겠다고 하는 정책을 '세금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부동산을 통해 이익을 얻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너무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 얘기만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기업정서'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부자되세요'가 인사가 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사실 반기업정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일부 기업들이 행하는 정경유착, 분식회계 같은 부정적 행태이다. 이렇게 도덕적 해이현상을 지적하는 국민들의 감성을 '반기업정서'로 규정하는 것은 특정 집단을 위해 '유전무죄'를 주장하는 너무 뻔뻔한 말장난이다.

'세금폭탄'은 '세금현실화'로, '반기업정서'는 '반부패정서'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세금폭탄'이네, '반기업정서'네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한다. 더욱 불행한 것은 너무나 얄팍한 이러한 '신조어'들이 특정집단의 무지막지한 언론독점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말에 속는다는 것이다. 말이 말같이 않은 세상이다.

'중도'의 왜곡

그래도 한번만 생각하면 그 의도를 알 수 있는 말들은 낫다. 우리 사회에는 교묘하게 우리의 올바른 현실인식을 가로막는 말들이 많다. 그런 말 중에 우리 정치에서 쓰이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소위 '중도'라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집단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중도란 말을 집어넣는다. 중도보수, 중도개혁, 중도실용주의 등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바야흐로 중도가 대세인 세상이다.

그런데 중도는 결코 중립적인 언어도 아니고, 말 그대로 중도적이지도 않다. 이 말에는 양비론처럼 현재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기득권세력의 의도가 숨어있다. 한국에서 중도를 주장하는 세력은 마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극우적인 정책을 지속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중도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중도집단이 존재할 수 있고, 중도적 이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중도를 자임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중도를 마치 '서구'의 중도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따라서 지금 여기의 중도가 세계적 관점에서도 중도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중도는 글로벌한 수준에서 절대 중도가 아니다. 오히려 극우에 가깝다. 중도가 아름다운 거짓말인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도는 극우의 다른 말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는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보수, 중도, 진보가 정상분포를 그리고, 유럽의 경우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선거를 거치면서 정권을 나누어 갖는다. 대략의 정치지형을 그려보면, 현재 유럽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중도 좌파정당과 보수주의 계열의 중도우파정당이 각 30~40%, 그리고 극좌와 극우가 10~20%를 나눠 갖고 있다. 여기서 극좌는 주로 환경주의 정당을 말하고, 극우는 인종주의 정당을 의미한다.

▲ <그림 1> 유럽의 정치지형

우리나라도 현재 여론조사를 하면 <그림 1>과 같은 정상분포가 나온다. 2000년 이후 대략 3:4:3의 분포로 보수:중도:진보의 경향이 나타났고, 현재 중도가 조금 늘고 진보가 줄어드는 중도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새로 늘어난 중도층을 개혁적 중도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주관적 이념지형'이 정상분포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이념에 맞추어 중도를 지향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이 원하는 중도와 과연 현실의 정치권이 지향하는 중도가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정치에서 중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면서, 남북한은 극우와 극좌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한사회의 이념지형은 <그림 2>가 보여주듯이 극단적인 우익쏠림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독재시기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우익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 <그림 2> 민주화 이전 한반도의 정치지형

민주화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우익쏠림현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200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보수와 진보의 정상분포는 이러한 극단적인 우익쏠림현상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러나 국민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이념의 다양화현상들이 정치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생각이 다양해지면 정치권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그러한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노숙자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법안을 받아들인 것이 우파정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사례를 사립학교법이나 재벌개혁 마저 좌파정책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우리 사회의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보다 포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대명사인 영국의 대처정권의 정책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아니 옛날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현재 스위스의 집권당인 극우정당이라는 국민당과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대처의 보수당과 스위스의 국민당의 정책이 민주노동당의 정책보다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념적 지향이 보수적일지라도 복지국가라는 환경에서 이들이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은 우리 사회의 정치지형에서 보면 진보적인 정책들이다. 이는 우리의 정치지형이 아직도 너무나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보수세력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적용해서 좌와 우의 정상분포를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정치지형을 겹치면 아래의 <그림 3>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정치지형은 극우와 중도우파가 경쟁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 <그림 3> 세계사적 정치지형과 한국의 정치지형

상황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중도가 무엇인지가 아주 명확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극우에 속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극우에 속하는 사람들이 세계사적으로 중도가 대세이므로 중도라고 주장하고, 화해와 상생을 위해 중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불행한 현실이 바로 한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림 3>은 또한 중요한 진실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고자 하는 동일한 욕망을 가졌고, 또한 충분한 정책적 대안이 왜곡됨이 없이 제공되었고 가정할 경우,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이념적 분화가 글로벌한 수준의 정상분포와 다르지 않다고 할 경우, 그림의 오른쪽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정치지형에서 우파는 과대 대표되고 있으며, 그림의 왼쪽에서 알 수 있듯이 좌파는 과소 대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 국민들의 이익은 국회에서 대변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만이 국회에서 대변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중도세력들이 정말 중도를 주장하려면, 그 중도가 글로벌한 수준에서의 중도가 되려면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은 훨씬 왼쪽으로 가야한다. 그러니까 중도가 진정한 중도세력이려면 중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진보를 주장하지 않고, 중도를 주장한다. 그 의도는 명확하다. 현실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극우를 포장하는 새로운 거짓말, 중도는 극우의 다른 말인 것이다.

중도, 또 하나의 양비론

우리 사회에서 '중도'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최근의 중도의 논리는 독재시절 양비론을 닮아있다. 양비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두 입장을 동시에 비난함으로써 현실을 고착화시킨다는 점이다. 현재에 문제가 있을 때, 예를 들어 독재라는 문제가 있을 때, 독재를 비판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비판하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고, 따라서 독재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중도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를 양극단으로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무언가 중립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양쪽을 비난하지만 극우적인 현재의 정치지형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중도야 말로 독재시대 양비론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양비론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들어 보수와 진보간의 뚜렷한 대립선이 그어지면서 한 입장을 택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사회가 보수적 관점과 진보적 관점으로 나뉘어 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각 세력들이 자신의 대안을 만들고 그것이 합리적으로 토론되고, 토론결과에 대한 이성적 승복이 이루어진다면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사회발전의 동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정책적 토론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감정적 증오나 도덕적 폭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정치집단이 이념과 정책으로 분화하기 보다는 중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양비론으로 변신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우리 정치가 이념과 정책에 따라 분화하기 위해서는 이 중도라는 새로운 거짓말이 없어져야 한다.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한 집단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 즉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헤게모니를 갖기 위해서는 즉 정신적 지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물질적, 정신적 양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형이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1만원을 주면서 7000원 정도 물건을 사오고 나머지는 심부름 값으로 주여야 동생이 싫더라도 심부름을 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3000원 정도의 물질적 양보와 정신적 배려가 있을 때 헤게모니는 작동될 수 있고, 한 사회는 대립보다는 타협이 우선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와 상생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헤게모니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단이 화해와 상생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중도같은 말장난을 하기 보다는 물질적 양보, 정신적 양보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의미에서 중도우파정도의 정책을 제시하여 물질적 양보를 하고,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정신적 배려를 할 때, 우리 사회는 화해와 상생이 이룰 수 있다. 실업과 비정규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말뿐인 중도는 너무나 가혹한 거짓말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기득권 세력들은 다시 중도라는 만병통치약을 팔고 있다. 1950년대 시골장터의 약장사같은 정치를 21세기에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은 한나라당도, 열린우리당도 보다 진보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은 이제 만병통치약이 아무 병도 고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병을 악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은 극우의 다른 말인 중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력이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명확히 제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태그:#양비론, #독재시대, #정치지형,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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