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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탈린 800년 역사가 흐르는 탈린 구시가지 한켠. 이런 고즈넉한 도시와 IT는 언뜻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인다.
ⓒ 서진석
요즘 블루오션이란 말이 뜨면서 발트 3국이 우리나라의 여러 언론매체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인이 단 6명밖에 없는 에스토니아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언론의 그런 갑작스런 관심은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그러한 관심이 단편적인 이벤트성 보도는 아닌지 염려가 되는 측면도 있다.

특히 에스토니아를 소개하면서 자주 부각되는 것은 'IT 강국'이라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IT강국을 꿈꾸고 있는 한국의 경쟁상대이자 새로운 시장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관심을 끌만한 흥미로운 곳임에는 틀림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주요검색엔진에서 에스토니아 관련 뉴스를 조회해 보면, IT나 컴퓨터에 관련된 기사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에스토니아 IT 산업에 대한 FAQ

IT 산업에 관한 소문을 듣고 에스토니아를 찾은 한국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여기 에스토니아 IT 산업이 잘 되어있다던데, 괜찮은 컴퓨터 좀 살만한 데 없어요?"
"인터넷 천국이라는데 인터넷 카페가 전혀 안 보이네요?"
"아니, 무슨 IT 강국 국민들이 쓰는 휴대폰이 저리 조악하답니까? DMB 기능은 되나요?"


질문에 답변을 하자면, 에스토니아에서 컴퓨터나 휴대폰을 만드는 회사는, 다른 나라 업체의 하청을 받아서 제작하는 곳을 빼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에스토니아는 인터넷 카페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인터넷 카페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처럼 몇 시간동안 앉아서 온라인 게임을 즐길 만한 화려한 시설이 있는 곳도 없고, 인터넷 상으로 한국신문을 좀 읽을 수 있도록 엔코딩이 가능한 카페도 정말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심지어 공중전화에도 인터넷이 연결된 것이 있지만,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겐 여전히 신기한 물건이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화려한 기능이 빵빵한 휴대폰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DMB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이동할 일이 없는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텔레비전까지 볼 수 있는 묵직한 전화기는 짐만 된다.

대략 이 정도 들으면 한국인들은 예상한대로 '내가 들은 것은 전부 에스토니아를 홍보하기 위한 이벤트성 기사가 맞았군'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는 정말 IT 강국이 맞다.

어디서나 인터넷이 저 마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인터넷이 연결된다.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 중앙광장에 있는 마크.
에스토니아는 IT 강국이 아니다? 맞다!

일단 에스토니아의 명성을 가장 높이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인터넷 사용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인터넷을 쓸 일이 있으면, 구태여 인터넷 카페를 찾지 않아도 된다. 충전된 노트북만 가지고 있으면 시내 카페나 식당 어디든 들어가서 전원만 켜면 인터넷 연결이 가능하다.

대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발트해 한 가운데 작은 섬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거의 모든 곳에서 무선인터넷 연결이 가능하다. 만약 노트북이 없다면 에스토니아 전체 700여개에 이르는 공공 인터넷 사용지점을 찾아서 무료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인구 대비 인터넷 연결 가능성을 따지면 유럽 전체에서 최상위권에 든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에스토니아 전체 개인용 컴퓨터 중에 82%가 인터넷에 연결이 되어있고, 전체 인터넷 사용자 중 72%가 은행에 가지 않고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업무를 해결한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전체 납세자 중 76%가 인터넷을 통해 소득신고를 한다.

전자 ID카드 외국인을 비롯한 에스토니아에 정식으로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겐 이렇게 마이크로 칩이 부착된 주민등록증이 발급된다. 각자 고유한 독자번호가 있기 때문에 개인정보 도용의 문제도 없다.
ⓒ 서진석
인터넷은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2005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자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올해 2월에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 역시 전자선거로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 2000년 8월부터는 국회에서 이미 사무용 종이가 사라졌고 모든 업무가 전부 컴퓨터로 진행된다. 1998년부터 정부는 인터넷을 통해서 거의 모든 공공서류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뿐이 아니다. 주민등록증에는 전부 마이크로칩이 부착되어 있어서, 일상생활의 전자화가 가능하다. 사람들은 주차권이나 버스표를 사기 위해 돈을 낼 필요가 없다. 주민등록증을 통해서 구입하거나 아니면 핸드폰을 두드려서 지불을 한다. 전자선거에 참여할 시에는 마이크로칩에 기록된 고유의 번호를 가지고 전자서명을 한다.

놀랍게도 에스토니아에서 핸드폰 가입자는 에스토니아 전체인구를 넘어섰다. 그러므로 핸드폰 사용을 둘째 치더라도, 인터넷 사용빈도는 이미 프랑스나 벨기에 같은 나라를 훨씬 앞섰다.

IT 강국 만든 에스토니아의 말총머리 소년들

말총머리 소년 에스토니아의 대표적인 컴퓨터 회사인 마이크로 링크(Micro Link)에서 일하는 마이트 베스트레. 같은 직장에만 저렇게 머리를 기른 동료가 무려 10명 정도가 있다고.
ⓒ 서진석
세계 최고의 IT 파라다이스인 우리나라에서 보기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이 나라가 소련에서 독립한지 불과 15년밖에 안되는 소국이라는 사실을 보면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에서 인터넷 사용이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정말 빠른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IT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는, 바로 '말총머리 남자'들의 공이 컸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에스토니아어로 '빠찌카 뽀이쓰(patsiga poiss)'로 일컫는다. 즉 '말총머리 남자'라는 단어이다. 좀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머리땋은 소년'이 맞을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년보다는 나이가 훨씬 든, 그리고 예쁘게 머리를 땋지 않고 그냥 묶어서 말총머리처럼 하고 다니는 남자들을 말한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에스토니아에서 컴퓨터 관련업무를 본다는 사람들은 대략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최대의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기자의 친구 역시 수년간 치렁치렁 기른 머리를 자랑스럽게 펄럭거리면서 업무를 본다. 길거리에서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남자들을 본다면, 컴퓨터 관련 업종에서 근무를 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왜 그들은 머리를 기르게 되었을까?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하기 곤란할 만큼 복잡하다. 거기에는 약간은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숨어있다.

IT 강국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일단 에스토니아는 소련 시절에도 서방과의 교류가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었다. 스탈린과 헬싱키 사이에 배가 오가면서 소련과 서유럽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 노릇을 하고 있었고, 북유럽 텔레비전을 안방에서 보면서 미국과 서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이 텔레비전에서 접하는 서방 소식, 그리고 집안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듣는 세상이야기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의하면 스탈린은 영웅이었고 소련의 체제는 세계 최고였지만, 막상 서방세계는 학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에스토니아의 젊은이들은 그 사실을 다른 소련공화국 국민들보다 훨씬 일찍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무조건 강조하고 크레믈린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도록 가르치는 인문학은 에스토니아 젊은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문학이 아닌 '진실만을 가져다 주는' 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의 젊은이들이 인문학을 대신할 무언가 새로운 것에 갈망을 느끼던 시절 세계에는 컴퓨터라는 것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반소련 감정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사회기득권과 정부에 싫증을 느낀 젊은이들은 미국문화와 히피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천편일률적인 사회 규율과 질서에도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머리를 기르거나 눈에 상당히 거슬리는 옷을 입는 등, 다른 나라라면 한때 불량기 있는 아이들이나 할 것이라고 오해받던 짓을 장래가 촉망되는 컴퓨터 신동들이 하고 돌아다녔다.

게다가 소련 정부는 젊은이들의 그런 행동을 규제하거나 탄압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서슬퍼런 소련 정부라 하더라도 머리를 기르는 것을 규제할 방법은 없었고, 인문학 공부를 등한시하고 컴퓨터에 매달리는 젊은이들을 못하게 막을 이유도 없었다.

마침내 에스토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고, 이미 에스토니아의 IT 기술은 사회주의 체제에 물들어있던 동유럽 국가와 소련의 다른 공화국들보다 훨씬 앞설 수 있었다.

유럽 최저 인구밀도... 그들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라

호랑이의 도약 에스토니아 IT화를 실현하기 위한 정부 프로그램 마스코트.
말총머리를 한 남자들이 공부를 등한시하고 컴퓨터만 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에스토니아는 전 국토가 약 4만㎦로 남한의 절반 정도이지만, 인구는 120만명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현재 1㎦당 29명에 불과하다. 인구밀도로 따져봐서 넓고 넓은 미국에 이어 세계 144위를 기록한다.

수도 탈린을 조금만 벗어나면 온통 울창한 숲과 푸르른 들판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나라에서 인구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인터넷이었고, 서방에서 공부를 마친 젊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IT산업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인터넷은 컴퓨터가 아닌 사람을 연결한다'는 모토를 만들어냈고, 많은 과제를 실행해 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호랑이의 도약(Tiger leap)'이나 '세계를 보아라(Look @ world)'라는 프로그램이다.

스카이프 사무소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스카이프 에스토니아 사무소. 본사는 북유럽에 위치해 있지만, 기술적 행정적 업무 등 모든 핵심업무는 이곳에 치러진다.
ⓒ 서진석
'호랑이의 도약'은 1997년부터 시작되어 에스토니아의 모든 관공서와 학교에 컴퓨터를 공급하고 인터넷 콘텐츠 개발에 투자한 프로젝트로서, 이 결과 에스토니아의 모든 학교와 도서관은 전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보아라' 프로그램은 에스토니아인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법을 가르치고 홍보하는 프로젝트로서 향후 3년 내 인터넷 사용률을 전체 인구 중 90%로 끌어올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IT 산업에 대한 관심은 많이 높아가고 있지만, 지금 전 세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SKYPE)나 P2P 프로그램의 대명사 카자(KAZAA)가 에스토니아 말총머리 남자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인류의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는 'hotmail'이 나오게 된 데는 역시 에스토니아 말총머리 남자들의 공이 컸다.

오는 3월 4일에는 에스토니아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이번에도 공식 선거가 열리기 전인 2월 26일에서 28일까지 3일간은 전자선거가 실시될 계획이라서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앞으로 에스토니아의 말총머리 남자들이 또 어떠한 방법을 우리를 놀라게 할지, 전 세계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다.

태그:#에스토니아, #IT강국, #DMB, #IT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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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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