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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차사랑
어린시절,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정오의 오포소리(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나는 쪽을 한참동안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기적소리는 늘 나를 꿈꾸게 했다. 산 넘어 어딘가 바다에 산호로 만든 궁궐이 있고, 인어 공주가 살고 있다는 풍문을 사실처럼 알고 있던 그때 기차는 동경의 세계로 데려다주는 존재였다.

기차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긴 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나와 친구들은 어린 눈을 들어 소리를 쫓아가곤 했다. 그렇게 길게 소 울음처럼 울리는 기적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기차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탔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목포행 열차를 탄 것이 첫 기차를 탄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땐 기차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수학여행을 간다는 마음에 들뜬 탓인지 모른다.

이후로 대학에 다닐 때, 군에 있을 때 휴가를 나오거나 외출을 나올 때 자주 기차를 이용했다. 그때 주로 이용한 열차가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와 조금 빠른 통일호였다. 젊은 날 완행열차에 대한 추억은 어른이 돼서도 아련하게 남아 흔들리는 안개 같은 거였다. 비둘기호가 기찻길에서 사라지자 그 역할을 통일호가 대신했다. 통일호는 한동안 간이역마다 쉬며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었다. 그 완행열차에 대한 추억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으로 돌아간다.

우리 새벽에 떠나자, 12시 반까지 역전에 모이도록

학교에서 4월, 5월은 현장체험학습 기간이다. 학년별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반별로 가기도 한다. 이때가 되면 체험학습을 어디로 갈 것인가 의견들이 난무한다. 특히 고3인 경우는 더하다.

어떤 아이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가까운 동물원이나 가자고 하고, 어떤 아이는 마지막인데 추억이 되는 곳에 가자고 한다. 그럼 난? 난 추억 남기기주의자이다. 아이들에게 여고시절의 마지막을 아무런 감흥 없이 보내도록 하는 건 안 된다는 생각에 작은 거라도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해서 한땐 일 년 내내 아이들 생일날이면 일 미터쯤 되는 각목에 케이크용 초를 묶어놓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날 무렵 촛불을 켜고 아이들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때론 집에서 떡볶이를 찜통에 가득 해와 아이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아이들의 출출함도 달래고 공부에 지쳐 있는 아이들에게 즐거움도 주기 위해서다. 그때 함께 했던 아이들을 이따금 만나 그때가 참 즐거웠노라고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걸 보면 당시 추억거리는 제대로 만들어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어디로 갈까?"
"놀이공원요."
"거긴 돈 많이 들어요. 가까운데 그냥 가요."
"야, 마지막인데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뭔가 남을 수 있는데 가야지."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을 내놓으며 왁자지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 내 생각을 이야기하마. 난 너희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그래서 좀 멀리 갈까 한다. 공부 방해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풀 땐 풀고 해야 공부도 잘 되는 거야."
"에이, 본론을 빨리 얘기 해보세요."
"좋아. 여수 오동도로 간다. 그것도 새벽열차를 타고. 밤 12시 30분에 만나서 1시 30분경 출발하는 밤 열차 타고 갈 거야. 어때 괜찮지 않아?"

내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 멋진 여행이 되겠다느니, 차도 없는데 어떻게 오느냐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여러 의견을 종합해 체험학습을 여수로 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먹을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차비는 왕복 1만5천 원. 여수에 갈 땐 통일호(당시엔 간이역마다 쉬는 완행열차)를 타고 가기로 하고, 돌아올 땐 무궁화를 타고 오기로 했다.

"너희들 기차 속에서 놀고 싶으면 미리 잠 좀 자두고 늦지 않게 오도록 해. 알았지?"
"네~! 근데 다른 반 아이들이 무척 부러워해요. 새벽 열차 타고 간다고요."
"우리 엄마도 걱정하면서 재미있겠다며 가고 싶데요."
"그럼 엄마랑 함께 와. 암튼 늦지 않게 오도록 해라."

▲ 전주역의 모습
ⓒ 김현
자정이 넘은 12시 30분, 전주역. 아이들이 하나 둘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태워다 주고, 어떤 아이들은 역에서 가까운 친구 집에서 모여 놀다가 시간 맞춰 나왔다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항상 늦는 아이들이 있다. 서른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서 3명이 아직 안 왔다. 전화를 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열차 시간 15분전에야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뛰어온다. 폼을 보니 온갖 치장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으이구, 못 말리는 녀석들.'

아이들을 인솔하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희희낙락이다. 그저 떠난다는 생각에 즐거운 표정들이다. 그때 한 아이가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부르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 자 떠나자 여수(동해)바다로 /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아니 저 녀석이 저 노래를 어찌 알까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어깨동무 하며 불러 재꼈던 노래를 새벽 열차를 기다리며 들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갑자기 그 녀석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몇 십 년 전의 추억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그 녀석이 너무 예뻐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갑자기 깔깔대기 시작했다. 노랫말 중에 '고래 잡으러~' 소리를 듣고 녀석들은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았다.

기차가 도착했다. 열차는 조금 피곤한 소리를 내며 끼이익 대더니 육중한 몸을 우리 앞에 세웠다. 몇 사람이 내리고 서른다섯의 숙녀와 하나의 남자가 그의 몸에 몸을 실었다. 안은 조용했다. 침묵 속에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는 숙녀들의 왁자함에 이내 묻혀버렸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간이역, 이젠 추억 속으로

한밤중의 열차 안은 고요한 무덤이다. 긴 여행 끝에 지친 사람들이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 깔은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잠을 잔다.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오래 전에 나도 저들처럼 저렇게 몸을 뉘인 채 어디론가 가곤 했었다. 가끔은 목적지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저들은 목적지를 두고 열차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이들은 의자에 앉자마자 수다 떨기에 바쁘다. 성급한 녀석들은 김밥을 까먹기도 했다. 내게도 한 입 주며 입을 벌리라고 한다. 손을 내밀자 끝까지 입을 벌리라며 우긴다. 이땐 져주는 게 서로 간에 좋다. 이것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니까.

ⓒ 열차사랑
먹고 수다를 떨던 녀석들이 이젠 끝말 이어가기 게임이나 인디언 밥 하면서 등짝을 때리는 놀이를 하며 열차 안을 시끄럽게 한다. 그 무리에 이 몸도 끼었다가 엄청 맞았다. 선생이라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선 피장파장이다. 이런 때 마음 놓고 때려보지 않으면 언제 때리겠는가. 그러나 등짝은 아파도 마음은 희희낙락 즐겁다. 나도 아이들과 똑같은 나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학교에 가서 맞았다고 꽁 해서 우리들한테 복수하면 안 돼요. 알았죠?"
"야, 니놈들이나 안 봐줬다고 꽁하지 마라. 그 꽁 하는 것 땜에 내가 여자들을 무서워하잖니."

그렇게 게임하고 웃고 때리고 맞으면서 우리는 여수로 향했다. 놀이 중간에 빠져나와 밤바람을 쐬었다. 5월의 바람이 싸하니 목덜미를 타고 밀려왔다. 자리에 앉아 아이들 놀이를 구경하고 창밖을 응시했다. 열차가 멈췄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간이역이다. 그렇게 간이역을 숱하게 지나왔다. 어둠 속에서 열차는 멈추었지만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었다. 간이역은 그렇게 밤새 기다림에 지쳐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간이역들의 대부분이 이젠 그리움의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는 소식이다. 6월 1일자로 시골 간이역 59곳에서 열차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고 한다. 한땐 등이 밀리고 등을 떠밀면서 구수한 사투리가 질펀하게 인정처럼 깔렸던 간이역, 그 간이역도 세월의 무게엔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람이 타지 않는 간이역 / 역 이름은 바람에 날아갔는지 / 건물만 덩그러니 노파처럼 서있다."

시골에 가면 자주 오고가던 감곡역, 간판마저 사라져 버린 감곡역을 바라보며 끄적거려 봤던 시구이다.

트럭 얻어 타고 바다를 달리는 기분… 잊지 못할 추억

새벽 어스름이 스멀스멀 차창을 타고 오던 어느 순간 귀청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람이 아이들에게 뭐라 하던 소리였다.

"이봐, 학생들. 쪼깨 조용히 좀 하드라고. 여그가 학생들 전세 낸 집이 아닝게. 무슨 아그들이 잠도 안자노."

그 아저씨의 한 마디에 기차 안은 갑자기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하나 둘 새벽 잠 속에 빠져들었다.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 추억이 서린 여수역
ⓒ 열차사랑
드디어 도착. 시계를 보니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긴 했지만 훤했다. 우리들은 짐을 꾸역꾸역 챙겨들고 역을 나왔다. 조용했다. 새벽의 찬 기운이 아직 깨지 않은 잠을 확 잡아당긴다.

"자 여기서 오동도까지 걸어가면 돼. 오 분 정도 걸리니까 잘 따라와라."

내가 앞장서고 아이들은 뒤를 따른다. 낯선 풍경을 맞아 아이들은 또 참새새끼마냥 재잘댄다. 그러고 보면 여자아이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아주 사소한 것도 아주 재미나듯 이야길 한다. 그래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있나 보다.

매표소엔 사람이 없다. 하기야 이렇게 이른 새벽에 관광객의 표를 받으러 나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표를 구입하지 않고 들어가는 기분이 꼭 횡재한 기분이다. 갑자기 아이들이 '와~ 바다다' 하고 고함을 지른다. 몇몇 녀석들은 방파제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느라 온갖 포즈를 잡는다.

바다와 열아홉의 숙녀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갔다. 서른다섯의 숙녀들을 데리고 오동도 섬을 탐방했다. 그리고 젊은 날 홀로 오동도에 왔던 경험을 들려주었더니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섬을 일주하고 아침 도시락을 까먹었다. 그 맛을 어떻게 말할까.

▲ 눈 쌓인 춘포역. 이번에 기차가 쉬지 않는 곳으로 지정된 역이다.
ⓒ 열차사랑
맛난 점심을 나눠먹고 선착장에서 돌산 가는 배를 탔다. 이야기 끝에 반절 할인 가격으로 했다. 계획에 없던 배를 타고 돌산까지의 항해에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한다. 돌산에서 다음 행선지는 미정. 주변 사람들에게 볼 만한 곳이 없느냐니까 '여수해양박물관'을 추천한다. 걸어서 30분이면 족히 된다는 말만 믿고 의논 끝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박물관이란 곳은 가도 가도 안 나온다. 가다가 가게에 들러 물으니 버스로 30분 이상을 가야 한단다. 헌데 버스는 없단다. 이 낭패를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기절초풍할 여행이 시작됐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미인계를 쓰기로 했다.

"우리 중에 제일 예쁜 사람이 차를 잡기로 하자. 그리고 잡는 데로 해양박물관으로 집합하는 거야."
"근데 태워줄까요."
"그러니까 미인계지. 그리고 이것도 나중에 멋진 여행담이 될 수 있잖아. 암튼 한 번 해보자. 그럼 누가 차 잡을래?"
"우리들이 할게요. 그래도 우리 반에서 선희와 희영이가 젤 예쁘잖아요. 히히히."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지나가는 차만 오면 손을 흔들고, 나머진 조금 뒤처져 걸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게 앞서 걸어갔던 아이들에겐 손전화로 우리의 계획을 알려주고 알아서 오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들어도 승용차들은 서지 않았다. 잠깐 서는 듯하다가도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면 그냥 가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덥고 목마르다며 쉬어가자고 한다. 어떤 녀석들은 아예 신발을 양손에 들고 철퍼덕 앉아 버린다. 가게도 없고 인적도 없는 그 길을 달래며 협박하며 걷다가 결국은 내가 나섰다.

"야, 안되겠다. 내가 한 번 해볼게. 그래도 나 혼자 하는 건 그러니까 희영이랑 같이 가자."

아이들은 아예 앉아 버렸다. 희영이와 난 차도 길가로 가 오는 차마다 손을 흔들었지만 여전히 차들은 우리를 외면했다. 그렇게 차를 보내고 있는데 저만치서 트럭 한 대가 달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런데 그 트럭도 우리 옆을 지나쳤다. 헌데 갑자기 트럭이 멈추더니 경적을 울린다. 달려갔더니 30대 중반의 여성 운전기사가 타라고 한다. 어찌나 고맙던지 아이들에게 '야! 빨리 와. 타란다' 소리를 질렀더니 그 마음 좋은 여자 분이 호호호 소리 내어 웃는다.

아이들은 차를 타라는 소리에 언제 주저앉아 있었다는 듯 고함을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 트럭 짐칸에 오른다. 무슨 여자애들이 낑낑대는 법도 없다. 순식간에 올라 웃고 떠들고 난리다.

"학생들! 떨어지면 안 되니까 꽉 잡아야 돼."
"네~~ 고맙습니다."

나도 운전석 옆에 타며(기사 아주머니의 배려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갑자기 여고 시절이 생각나서요."

그 여자 기사분 덕분에 우리는 트럭을 타고 바다를 바라보며 해양박물관까지 갔다. 그 트럭 타기는 여행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낯선 여수에서 30여 명의 여학생들이 트럭을 얻어 타고 달렸으니 어찌 안 그러겠는가.

우리는 해양박물관을 관람하고 바다를 벗 삼아 점심을 까먹고 돌아오는 길에 해수욕장에 들러 물놀이를 한 다음 무궁화호를 타고 전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기차를 타자마자 올 때와는 다르게 모두 골아 떨어져 잠을 잤다.

여수. 그러고 보니 여수는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젊은 날 한 밤중에 혼자 찾던 곳도 여수였고, 아이들과 함께 찾아 추억을 쌓던 곳도 여수였다. 모두 추억을 실어 나르는 기차를 타고 말이다.

▲ 기차를 보면 아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 열차사랑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기사입니다.


태그:#기차, #비둘기호, #여수, #현장체험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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