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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에 모인 건 밤 9시. 강릉행 비둘기호 열차가 출발한 것은 1시간 뒤인 밤 10시였다. 기차 안은 완전 참새들의 방앗간. 기차는 수다의 힘으로 달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들 수다는 힘찬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수학여행은 순전히 선생님들 모의에 의해 입시와 공부를 핑계로 여름으로 당겼고, 여행지는 경주가 너무 흔하다며 설악산으로 결정했다.

그 상황에서도 몇몇은 기차가 왜 출발을 안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지만. 드디어 기차가 우물쭈물 움직이기 시작하자 불만이었던 얼굴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입들도 일순 조용해져 열차 안은 짧은 정적. 그러나 기차의 힘찬 움직임을 느낀 소녀들은 잠깐 움직임에 대한 경의를 표했을 뿐이라는 듯 정적은 금세 와르르 무너졌다.

▲ 추전역..그때 기차는 이 선로로 달려갔을까?
ⓒ 이현숙
여행이 쉽지 않은 70년대 초반이었다. 교실에서는 수시로 지나가는 경인선 기차가 바라보였지만 우리가 기차를 타게 되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경이로웠던 기차. 그 기차를 장장 10시간이나 타게 되다니 정말 꿈같은 얘기가 현실이 된 셈이었다.

비둘기호 야간열차라 기차는 자주 멈추었지만, 우리들의 수다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판자촌처럼 허름한 동네를 지나고 길게 물길 위로 난 다리를 건너던 기차. 잠시 멈춰 설 때면, 숨을 고르며 힘들어하던 열차는 소녀들의 수다를 이용해 다시금 힘차게 내달렸다.

밤이 늦어지면서 배가 고파진 아이들이 하나씩 짐을 풀었다. 삶은 달걀이 나오고 사이다가 나오고, 행여 딸 배곯을까봐 엄마가 정성껏 싸 넣어준 김밥이 나왔다. 쉴 새 없이 먹고 마시면서 재깔거리는 사이, 열차는 까만 밤 속을 맹렬히 질주해 나갔다.

원맨쇼가 벌어졌다. 사회자도 관객들을 불러 모을 나팔도 필요 없는 즉석 원맨쇼. 아이들의 아, 하는 외침소리와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면 모두의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 무대는 객석 중간의 통로. 엄마 월남치마의 허리를 이마에 두르고 진지하게 나서 연설을 한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진지하게 서서 연출하는 그 광경. 손뼉을 치면서 난장을 벌이는 바람에 여객전무라는 분이 호통을 치러 나왔다가 오히려 구경꾼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저 조금만 좀 조용히 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돌아갔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은 모두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나들이가 아닌 생전 처음이라는 이름으로 떠나는 기분을 여행이 일상화된 요즘 아이들은 짐작도 못하리라. 흥분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온갖 난센스가 연출되고 그럴 때마다 폭소와 장단이 맞춰지던 그때의 설레는 기분을 말이다. 간혹 못마땅해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네들은 곱게 눈을 흘기고 온통 까만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잠을 못이긴 아이들이 스르르 눈꺼풀을 끌어 내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 자는 게 불편했던 몇몇은 짐 선반으로 기어 올라가 누웠다. 덜컹거리는 기차 짐칸에 누워 잠이 들다니, 아연실색한 선생님이 의자 위로 올라가 두드려 깨웠지만 끄떡도 않고 돌아누워 잠들었던 아이들.

질주하던 기차가 환한 역사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덜커덩 멈춘다. 이런! 깜깜한 밤인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을까? 커다란 보따리 뭉치를 이고 들고 사람들이 기차를 향해 돌진한다. 그 밤엔 꼭 그렇게 보였다, 돌진하는 걸로. 꼭 피난민 열차에 달려드는 피난민 같은 행렬처럼 보였다. 우리 칸으로 타려던 사람들은 수학여행 칸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재빨리 다른 칸을 향해 뛰었다. 행여 기차를 타지 못할까봐 짐 때문에 뒤뚱거리면서 허겁지겁 뛰었다.

그때 우리를 못살게 군것은 나방이었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말 그대로의 불나방. 날이 더워 창문을 몽땅 열어 젖혔는데 그 창으로 나방이 뛰어들자 아이들은 햇빛 막는 베이지색 차양을 급하게 끌어내렸다. 유리창문은 뻑뻑해서 두 손에 힘을 잔뜩 주어야 깍지가 움직이고, 겨우 내려졌다. 때문에 급한 대로 차양을 내려 나방이 들어오는 걸 막았다.

▲ 경포대를 들썩이게 했던 아이들...지금은 모두 어떻게 변했을까?
ⓒ 이현숙
한 번 두 번, 환한 역사를 지나고 불나방만 아니면 역사를 지나는 것도 익숙해 질 무렵 내 눈꺼풀도 슬며시 무거워졌다. 주위는 온통 난장판. 의자와 의자 사이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자는 아이에 짐 선반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아이. 나도 눈꺼풀이 무거워지자 만사 귀찮아져 등을 뒤로 깊숙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때가 아마 3~4시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애들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잠의 위력을 물리치고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그 애들은 일명 파수꾼. 그 애들은 아주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며 자는 아이들을 괴롭혔다. '너 자니?'하고 툭툭 치면서. 그 애들이 지나가고 겨우 잠이 들었나 했는데 또 누군가가 툭툭 쳤다. 나는 짜증이 나서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예, 현숙아 눈 좀 뜨고 창밖 좀 봐봐."
뜻밖에 노처녀 영어 선생님이었다. 그땐 스물일곱이 넘으면 무조건 노처녀라고 했으니까, 일단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임해 오시면 다 노처녀에 속했다.

짜증은 나지만 억지로 눈을 뜨고 바라본 창밖엔 이미 어슴푸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난 평생 잊혀지지 않는 신비로운 풍경을 보았다. 이른 새벽, 아니 청아한 새벽이라고 해야 한다. 맑고 맑은 그 새벽에 산속을 흐르는 잔잔한 개울물. 수정처럼 투명한 맑은 물은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려갔다. 이슬 맺힌 산기슭의 들꽃과 들풀들, 하얀포말을 곱게 빚어가며 달려가는 물길. 순간 내 가슴속은 설렘으로 요동쳤다.

우린 강릉에 내려 버스로 이동, 낙산사를 거쳐, 설악산 입구 서울여관에 짐을 풀었다. 무려 10시간이나 되는 기차여행은 우리에게 후유증도 남겼다. 여관에 앉아서도 끄떡끄떡 기차안에 있는 것처럼 몸이 흔들렸다. 골이 흔들린다는 느낌,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 (비선대)이 사진을 보니, 그때의 소란스러움이 들리는 듯하다
ⓒ 이현숙
▲ (비선대)왼쪽 가에 있는 친구가 물로 축배를 들고 있다
ⓒ 이현숙
서울여관에서 2,3분 거리에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큰 개울이 있었다. 수량도 풍부하고 물은 또 얼마나 좋은지, 우린 모두 거기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땐 샴푸가 아닌 세숫비누를 사용했지만 아주 만질만질해서 물을 두고 오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신흥사, 흔들바위, 울산바위, 비선대. 우린 모두 말괄량이가 되었다. 특히 비선대에서는 한두 아이가 물로 뛰어든 다음 거의 모든 아이들을 물로 끌어들였고 모두 물찬제비가 되어 돌아다녔다.

▲ 서울여관을 떠나며 아쉬움에 한 컷...
ⓒ 이현숙
선생님은 우리에게 당부했다. '여기 설악산은 아주 높으신 귀빈들만 오시는 곳이니 자칫 흉거리 되지 않게 언행을 조심하기 바란다.' 그때 설악산은 정말 높은 곳이었다. 밥 먹고 살기도 빡빡했던 때,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날 정도면 아주 부자 아니면 유명한 사람뿐이었다.

수학여행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설악산은 내게 신비롭다. 일부러 야간열차는 아니지만 기차를 타고 가 보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고속버스를 타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온밤을 재깔거리며 지새우던 참새들도 서울여관도 더 이상 그곳엔 없다.

그 대신 서울여관 앞을 흐르던 개울은 장마 때가 아니면 메말라 있고, 선녀가 놀다 갔다던 아름다운 비선대에는 상가가 들어서 있다. 권금성은 케이블카만 타면 10분이면 오른다.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매번 실망하고 돌아오기 일쑤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 모습은 여전히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기차 안에서 내다 본 아름다운 차창 밖 풍경으로.

태그:#청량리, #설악산, #비둘기호, #경포대, #서울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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