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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1월 6일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은 일본의 울타리이다'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열도를 지키려고 하는 자는 오직 일본열도에 방어의 수단을 한정하지 말고, 멀리 일본열도 외의 땅까지 확장하여 일찍부터 일본열도 외의 땅에서 적의 침입을 묶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일본열도를 지키려고 함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으로 정해야 하는 땅이 필시 조선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조선에서 일단 적이 근거를 마련하게 되면 일본의 불이익은 실로 용이하지 않다. (중략) 만약 지나가 일본의 적국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이상한 일이 생긴다면 일본은 이미 방어선을 적국의 손에 넘긴 것으로써…, 금일에 있어서 일본의 방어정책을 가능한 원대하게 할 것을 우리는 특히 희망하는 바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일본열도의 최근접 방어선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확보를 당면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도 "한반도는 육·해군의 요충지역으로서 일본의 국방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제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게 되므로 대륙경영정책은 조선 전체의 지배 여부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여 한반도 지배의지를 확고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륙진출의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도막부 말기의 국권론자인 요시다 쇼인은 일찍부터 대동아공영의 기틀이 된 원대한 침략구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인도까지 거론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처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을 설파하고 있다.

"지금의 계략을 말하자면 강역을 튼튼히 하고 조약을 엄격히 하여 그것으로써 두 오랑캐(조선과 중국)를 휘어잡고 그 기회를 타서 북해도를 개척하고 오끼나와를 평정하며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굴복시켜 지나를 제압하며 나아가 인도를 넘보아 그로써 진취의 기세를 떨치고 퇴수(退守)의 기반을 굳혀 신공황후가 다 하지 못한 것을 이룩하고, 풍신수길이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의 침략근성은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요시다 쇼인의 말처럼 신공황후 때부터 내려온 일본민족의 맥(脈)인지도 모른다.

1999년 말 미국 식자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21세기에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할 지역은 동북아지만 또 가장 전쟁위험성이 높은 지역도 동북아라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과거사를 털어내지 못한 일본에서 찾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박제화 된 일본을 만들고 연장시키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일본의 경제적 성공도 미국적 질서에 편승함으로써 가능했다.

사실 미국은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혼자서 직접 겨냥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 지나친 위험부담을 피하면서 자기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은 빈사상태로 가고 있는 북한상황에 개입하여 한반도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자국내 보수우경화 바람이 동북아안보를 일본과 분담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일치해서 나타난 결과로 이는 일본자위대의 증강과 첨단화가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에게 한반도는 일본이라는 교두보를 지키는 방파제인 동시에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거점에 불과하며 미국은 이러한 남한을 대중 및 대북 군사기지로 유지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곳은 일본이고 일본과의 군사협력관계는 그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군사적 긴장의 원인은 한반도분단의 책임자인 미국과 일본이 과거의 식민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기득권과 향수를 탈냉전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려는데 있다. 따라서 전력강화와 개헌논의를 기조로 한 일본 외교·안보전략의 현재방향은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 사이에 형성된 새로운 동북아전략개념을 기본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미·일의 전략적 상호의존은 냉전붕괴로 주적 소련이 사라진 뒤 걸프전쟁과 북한 핵 위기를 거치면서 미·일안보동맹체제 확대강화를 아시아전략의 근간으로 삼는 '동아시아전략보고서'를 통해 나타났다. 이에 일본은 '신방위계획대강'으로 호응했다. 그 종합판이 1996년 4월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수상이 발표한 미·일안보공동선언이며 이를 위한 새로운 운영체계가 가이드라인의 개정판이다.

1997년 9월 확정된 새 가이드라인은 일본 유사사태보다는 일본 주변유사사태대응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2004년 12월 발표된 신방위계획대강에서는 아예 북한과 중국을 안보위협 중대 불안요인으로 규정함으로서 국토방위형 '일본유사'에서 지역분쟁 대처를 통한 해외출동형 '주변유사'로, '방위형 안보'에서 '공격형 안보'로 크게 변화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변이라는 범위에 대한 개념으로 이는 결코 지리적 범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래의 안보는 주일미군에 대한 군사행동범위를 극동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 왔는데 이 지역한정이 극동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점차 확대되어 사실상 안보조약의 규정을 넘어선 지역 무한정의 글로벌안보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위대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미군 후방지원을 명목으로 활동영역을 일본 바깥으로 무제한 확장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일본은 탈냉전 후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불특정위협을 감안하여 미국의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에는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집단적 자위권행사를 가능케 함으로써 일본뿐 아니라 주변지역과 세계적인 차원으로 방위영역을 넓히는 전방위전략(全防衛戰略)으로의 추진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평화헌법 제9조의 기본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사실상의 사문화(死文化)로써 사상 처음으로 전시에 해외 어디에라도 출동할 수 있는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불고 있는 이 같은 우경화 바람은 1998년 8월에 있은 북한의 대포동미사일 발사와 99년 3월과 2001년 12월의 두 번에 걸친 괴선박소동, 그리고 2006년 7월 감행된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및 10월 핵실험에 힘입은 것이다. 이것은 실로 "50여년 만에 찾아 온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호기"로써 이를 계기로 지난 반세기 동안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안보현안들이 일거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가이드라인 다음 과제로 지목되어온 유사법제화(有事法制化)는 물론 선제공격론까지 포함되어 있다. "10년 전엔 개헌논의를 꺼내지도 못했고, 5년 전엔 쑥덕거리는 수준"이었던 반면, 지금은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단계를 넘어 적 기지를 공격하는 것도 자위권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977년 후쿠다 수상을 비롯한 일본의 위정자들이 유사라는 단어를 사용해 전시에 대비하는 보다 구체적인 방위전략을 도출하기 시작한 이래,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일본지도자들의 노력은 20여 년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2003년 6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방문에 맞춰 무력공격사태대처법과 자위대법개정안 그리고 안전보장회의 설치법개정안 등 일본에서 조차 국가총동원령을 연상케 하는 전쟁준비법률 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이른바 '유사 3법'을 의회가 압도적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전쟁으로 가기위한 길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헌법을 고치지 않고도 전쟁에 관한 법률을 거의 정비한 셈이다.

이제 일본의 첫 번째 목표는 어디가 될 것인가.

#군사대국#보통국가#패권주의#테러대책특별조치법#전방위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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