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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앵' 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 소리가 들리면 아내는 전투태세를 갖춘다. 낮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는다. 모기가 있는 곳에 전투가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새벽녘에 모기와 전투를 벌이는 것도 목격했다.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떠 보니 아내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수건을 들고 방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수건은 아내가 모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원시적인 무기다. 수건에 물을 묻혀서 천정에 붙어 있는 모기를 행해 던지기도 하고 벽에 붙어 있는 모기를 순식간에 덮쳐서 압사시키기도 한다.

"일찍 일어났네! 웬일이야?"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니고 잠을 못 잔 거야."
"또 모기 하고 사투를 벌인 거야?"
"신경이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호연이 얼굴 다 물어 뜯어놨어 그래서 그놈 꼭 잡으려고."


속으로는 극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서 '참 어지간하다. 그 조그만 모기에게 물린다고 설마 죽겠니'라고 했다가 꽤 오랜 시간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 아내는 "모기가 어린 자식들 다 물어뜯든 말든 어떻게 그렇게 맘 편히 쿨쿨 잘 수 있느냐"며 서운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했다. 호연이는 세 살배기 아들이다.

▲ 세살 호연이(경기도 의왕시 철도 박물관).
ⓒ 이민선
난 잠귀가 밝은 편이다.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는 옆에서 인기척만 들려도 벌떡 일어난다. 본래 잠을 잘 못자는 체질을 타고 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군대에서의 습관 때문이다. 군대 생활할 때는 잠귀가 어두우면 고생스럽다. 특히, 졸병 시절에 잠귀가 어둡다는 것은 곧 재앙이다.

보초근무를 나갈 때 불침번 근무자는 큰 소리로 깨우지도 않고 두 번 깨우지도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기상"이라고 얘기할 뿐이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지 못하는 졸병에게는 고통이 뒤따른다. 몇 년간 이런 생활을 하다가 고참이 되면 자연스럽게 잠귀가 예민해진다.

그러나 모기 파리 등의 귀찮은 곤충들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무감각하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나 모기의 공격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기에게 물리면 그저 미물에게 피를 조금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모기보다 모기 잡는 아내가 더 무섭다

때문에 난 모기의 공격보다 아내가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일으키는 소란이 더 무섭다. 잠귀 밝은 사람은 한번 눈뜨면 다시 잠들기도 힘들고 깊은 잠에 빠지기는 더욱 어렵다. 결국 실눈을 뜨고 반수면 상태에서 모기와 아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다.

아내의 모기 잡는 실력은 탁월하다. 모기가 '앵~' 소리를 내고 잠적하면 끈질기게 뒤를 쫒아 잡아낸다. 수건이나 손바닥으로 내려친 후 피가 묻어나오면 그 순간 득의양양한 미소가 입가에 흐른다. 가족의 피(특히 호연이나 하영이)를 빨아먹은 원수(?)에게 복수했다는 만족감이 흐르는 미소다. 하영이는 10살 된 딸이다.

"이 녀석 피를 얼마나 많이 빨아먹었길래….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랐네. 드디어 복수했어!"

이슥한 밤에 혼자 말 하는 것을 지켜보면 비몽사몽간이래도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모기 한 마리 잡고 난 후 던지는 멘트 치고는 너무 거창하기 때문이다. 영락없는 무술영화 주인공 대사다. 가족들을 해친 원수를 찾아 강호를 헤매던 주인공이 각고의 노력 끝에 원수를 갚고 석양을 향해 걸어가며 던지는 한 마디가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 열살 하영이.
ⓒ 이민선

가족들의 복수를 끝내고 나면 아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잠에 빠진다. 불과 10분전에 모기와 사투를 벌이던 전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금방 잠이 든다. 그 모습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난 눈만 감은 채 밤을 지새워야 한다. 덕분에 이런 날에는 잊고 지냈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친구들, 어린 시절 친척집에서 잠깐 얼굴을 스쳤던 내 또래의 진척들 등. 그동안 여러 가지의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많은 것들이 밤이 깊을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날이 환하게 밝을 때쯤 잠깐 잠이 든다. 그러나 깊은 잠은 아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해괴망측한 꿈을 꾼 탓에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면 눈꺼풀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결국 이런 날에는 하루 종일 꿈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비실비실 거리게 된다.

올해 여름이 다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 모기가 어디론가 사라질 때까지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날 것이다. 멋모르고 호연이나 하영이의 피를 빨아먹는 간 큰 모기가 출몰하는 날은 어김없이 눈만 감은 채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이다. 이렇듯, 모기는 가족들 피만 빨아먹는 것이 아니라 내 잠도 빨아 먹는다. 그래서 난 모기가 두렵다.

아내는 날아다니는 모기를 손으로 잡기도 한다. 강호의 무술고수들이 젓가락으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듯이 아내는 맨손으로 날아다니는 모기를 잡는다. 쉬워보여서 언제가 따라해 보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 손은 번번이 허공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모기 잡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아내를 둔 덕에 여름철 모기에게 헌혈 당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대신 난 귀중한 잠을 가끔씩 도둑맞는다.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그렇다고 말이 안 통하는 모기에게 좀 봐달라고 사정 할 수도 없고 아내에게 '잠 좀 잡시다' 라고 항변 할 입장도 아니다.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까봐 잠자는 것도 포기한 채 모기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래서 모기가 출몰하는 계절이 내게는 잔인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모기, #아내, #사투,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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