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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은 참으로 신비한 존재이다. 옻빛보다 더 어두운 색감이 존재하며 끝도 모를 심연은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일으킨다. 어둡고 긴 동굴 속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다. 갑자기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지하의 신 하데스가 검은 손을 뻗쳐 올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가면 만장굴이 유명하다. 만장굴은 전형적인 용암동굴로써 전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동굴이다. 삼척에 가면 태백산 중턱에 자리 잡은 환선굴이 유명하다. 그리고 울진에 가면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 ‘성류굴’이 수 백 년 된 측백나무 군락에 둘러싸인 채 왕피천 자락에 곱다시 앉아 있다. 천연 기념물 제55호인 ‘성류굴’은 성스러운 존재가 머물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명 ‘선류굴’이라고도 한다.

▲ 성류굴 입구
ⓒ 김대갑
인류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 동굴. 기실 동굴의 상징은 에로틱하다. 바위 틈새에 난 구멍이라는 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여성의 성기가 성적인 기능과 더불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역할을 하듯이 동굴은 인류에게 생명을 안겨 준 고귀한 존재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곡은 그의 관동유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암벽 밑 긴 하천 위에 성류사가 있고, 암벽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이를 성류굴이라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 굴이 장천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보천태자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민심을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왕피천이 굽이굽이 선유산을 휘돌아 가다가 절벽 하나를 만나는데, 그 절벽에 성인이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가는 구멍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성류굴인 것이다.

▲ 오작교
ⓒ 김대갑
성류굴의 총 길이는 472m이며 생성 시기는 약 2억 5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굴의 모양은 직선형으로써 12개의 광장과 5개의 연못이 있다. 굴 내부의 온도는 1년 내내 섭씨 15도에서 17도 사이에 있다.

희한하게도 성류굴의 입구는 무척 낮으면서 좁다. 성인이라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비만자는 들어가기가 무척 힘이 들 정도다. 그러나 좁은 굴 입구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널따란 공간에 우선 입이 벌어질 것이다. 좁디좁은 틈 안에 이다지도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은하천과 그 위에 놓인 ‘오작교’라고 불리는 무지개다리이다. 철제로 만들어진 두 개의 무지개다리에는 오렌지색 네온이 드리워져 있어 관람객에게 황홀한 분위기를 안겨준다. 그리고 그 휘황한 조명 아래 은하천이 맑게 흐르고 있으며 왕피천에서 놀러 온 작은 물고기들이 조명 빛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류굴에 있는 5개의 연못은 모두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는데, 왕피천의 수위가 변화함에 따라 이 연못들의 수위도 수시로 변한다고 한다.

▲ 동굴 내부
ⓒ 김대갑
오작교를 지나면 곧 바로 돌부처들이 반기는 미륵동이 나타난다.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석회를 싣고 와 자연스레 만들어진 석순의 응축물이다. 3광장과 4광장을 지나 5광장인 용신지로 접어들면 로마의 궁전을 닮은 형상이 나타나고, 깊이가 무려 30m에 달한다는 선녀의 밀실을 볼 수 있다. 선녀의 밀실이라. 아득한 옛날, 천상의 팔선녀가 투명한 날개옷을 로마의 궁전에 맡긴 후 눈부신 나신을 드러내며 요염한 물놀이를 즐겼던 곳이었을까? 아니면 보천태자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던 곳이었을까? 밀실에서 풍겨 나오는 장미향에 취한 채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면 만불상과 지옥동, 초연광장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참 자연의 조화란 경이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의 능력 또한 놀라운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석순덩어리를 보고 부처입네, 지옥입네,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선남선녀입네 하며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지옥의 계곡을 무사히 지나 부처님 곁에 가서 안도의 한숨을 쉰 후, 눈을 들면 바로 볼 수 있는 사랑의 광장. 두 남녀가 포옹하다 들켜서 수줍어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초연광장이란다.

▲ 석순의 움직임
ⓒ 김대갑
9광장인 수레동에 들어가면 나약한 인간의 삶을 조롱하는 자연의 웅장함을 볼 수 있다. 천장에 달린 종유석과 바닥에 형성된 석순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조금씩 다가가다, 마침내 허공에서 만나 석주라는 또 하나의 질료를 탄생시킨 과정이 엿보이는 광장이다. 어쩜 저리도 정교하게 기둥을 만들었을까. 석주는 하늘을 떠받칠 듯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석주들이 일 년에 겨우 0.4mm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 2억 5천만년 후에는 또 다른 석주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 억겁의 시간 속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 화려한 종유석
ⓒ 김대갑
1시간 30분 정도의 굴 탐험을 끝내고 지상으로 나오니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 어둠에 익숙했던 시신경의 세포들은 부지런히 밝은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그 적응의 과정이 무척 생경하다. 왕피천의 옥색 물빛이 너무 현란하고 해발 199m의 기암절벽에 매달린 측백나무들의 연초록 잎들이 눈동자를 마비시킨다.

다시 2억 5천만 년 후에 그 어떤 생명체들이 이 성류굴을 찾을까. 그리고 어떤 이름들을 붙이며 완상의 즐거움을 누릴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성류굴을 지나 망양해수욕장에서 만난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무척 길었다.

태그:#성류굴, #오작교, #동굴, #석순, #종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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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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