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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에 볼 게 뭐 있습니까? 그저 언덕의 바위에 불과한데, 소설가 1명이 전설을 지어내 관광명소로 만든 거잖아요. 쇠꼴마을도 가능합니다. 저길 보세요.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등대 불빛 같아요. 그 불빛을 보고 연평도 앞바다의 파도가 인사를 하며 달려듭니다. 이곳에 생명력이 강한 혼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 쇠꼴마을을 관광명소로 가꾸는 김교화 촌장
ⓒ 최육상
독일 라인강 기슭에 자리한 '로렐라이(요정 바위)'와 같은 전설을 시골마을에서 만들어내겠다는 김교화(64)씨의 다부진 희망이다. '쇠꼴(소먹이 풀)'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촌장' 직함을 지닌 김씨는 쇠꼴마을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농촌의 희망 일구고 싶다"

경기도 파주시 금곡리, 조그만 시골인 쇠꼴마을에서 김 촌장은 그 꿈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다.

무일푼으로 삶을 시작한 김 촌장은 서울에서의 합판사업 성공을 발판 삼아 고향땅을 개척해 왔다. 30여년 전, 김 촌장은 미군부대 사격장이던 자갈밭을 직접 일궈 젖소 6마리를 사육하며 농장을 시작했다. 소는 10년만에 200마리까지 늘었지만 1980년대 후반 소값 폭락으로 다 처분하고 배나무를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황무지나 다름없던 곳은 어느덧 7만평에 이르는 쇠꼴농장으로 변했고, 그는 쇠꼴마을의 촌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 촌장은 도시생활을 접은 것에 대해 "내가 태어난 농촌에서 희망을 일구고 싶었다"며 "사람들에게 돈이면 다 된다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이렇게 땀 흘리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 허브농원 모습. 쇠꼴농장에는 박물관, 식물원, 수영장, 찜질방, 눈썰매장 등 다양한 휴식공간이 있다.
ⓒ 최육상

"농촌이 살길, 농부의 혼과 자연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있다"

가난과 숱한 역경을 딛고서 자수성가한 김 촌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내비쳤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 가난이 김 촌장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어렴풋이나마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7남매였는데 저와 아래 두 여동생들만 성이 같아요.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여기저기 팔아서 자식들을 뒷바라지했어요. 제가 양색시촌에서 하숙하며 중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분이죠. 외삼촌이 돌봐주셨거든요. 어머니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공부하며 어렵게 자리를 잡은 겁니다."

김 촌장은 배 밭 너머 능선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생긴 숲에 유두가 솟아 있는 게 보이냐"며 "어머니를 저 아래 묻었더니 숲이 저렇게 변했다"고 신기해 했다.

김 촌장이 가리킨 숲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돌 하나, 나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농장을 가꿔 온 김 촌장의 시선을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 촌장은 고향에 관한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풀어냈다.

"요 밑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어요. 불모지였던 이곳을 구입하게 된 것도 할아버지가 이끈 혈육의 힘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저 뒤에 납골탑을 세워 할아버지·할머니·어머니·형을 한데 모셨죠. 방탕하셨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된 뒤로 소식을 들은 바가 없어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어요.

농촌이 살 길은 농부의 혼과 자연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군부대 차를 쫓아다니며 '기브 미 초코레뜨!(Give me chocolate!)' 하던 소년이 커서 군부대 사격장을 이렇게 바꿨다, 이것도 이야기가 되잖아요. 이곳에서 농촌의 희망을 싹 틔울 겁니다."

▲ 쇠꼴농장을 방문하던 날, 유치원생들 수백명이 수영과 황토체험을 하는 모습.
ⓒ 최육상

"땅은 우리가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 후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

김 촌장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다. 이는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의 폐교 위기를 4년간 연기시킨 것이나, 마을회관 부지 150평을 무상으로 기증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김 촌장은 멀리 폐교 자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잊히지 않아요. '공부 잘 한다'는 칭찬 한 마디가 지금의 저를 있게 했으니까요. 한때 600명이던 학생들이 미군부대가 떠나자 어느새 60명으로 줄었죠. 폐교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사비를 털어 영어선생님과 탁구코치님을 모셔오기도 했지만, 결국 12년 전에 문을 닫았어요. 편안한 것만 추구하던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시골의 희망이 교육에도 있는 것인데…."

도시와 해외를 누비며 합판사업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김 촌장은 사장에서 농장주로 변신한 것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털어놨다. 분주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시골의 삶을 선택한 김 촌장의 입에서는 '땅'을 생각하는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서울에서 아무리 좋은 땅을 가져봐야 어떤 의미가 있겠어요? 돈은 될지 모르겠지만 시골 땅의 가치와는 달라요. 생명이 있는 땅을 가꾸면 10년, 20년 후 분명히 달라집니다. 불모지를 사들여 개척할 때 한소리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 생각에 동의합니다. 땅은 우리가 잠시 빌려쓰고 있을 뿐이지 고스란히 후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겁니다. 이곳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보람과 사명감이 아니면 운영하기 힘든 상태에요."

쇠꼴농장은 도시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볼거리와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우선 4천 그루에 이르는 배나무가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일반인들에게 분양해 체험주말농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외에 농촌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을 비롯해 식물원, 허브농원 등과 수영장·찜질방·눈썰매장 등을 계절에 따라서 운영하며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타조와 말, 염소, 토끼 등의 동물들도 빼놓을 수 없는 식구들이다.

"잠자는 자를 흔들어 깨운 쇠꼴마을의 희망, 헛된 꿈 아니다"

▲ 김 촌장은 스무 살 때 일기장을 넘기며 눈시울을 붉혔다.
ⓒ 최육상
김 촌장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잠자는 자를 흔들어 깨운 쇠꼴마을"에서 "인간성공의 목표를 보여주는 '인간 상록수'가 되고 싶은 꿈"을 이뤄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큰 고민이 있다. 쇠꼴농장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느냐는 것.

"아들 둘이 있는데, 둘째가 농장을 물려받으려고 해요. 하지만 많이 부족하고 시골의 삶에도 익숙하지가 않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개인이 아니라 산학협력 등의 방법으로 운영했으면 해요. 파주를 대표하는 농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농장으로 가꾸려면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에서도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논의하면 좋겠어요."

김 촌장은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사업할 때 들고 다녔던 것이라며 20년이 다 된 낡은 업무가방 2개를 보여줬다. 가방 속에는 스무 살 때 가족에 대한 애증을 적었던 일기장, 고교 졸업식에서 마지막으로 뵀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폐교를 막아주셔서 감사하다며 초등학생들이 보낸 편지 등 개인의 역사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가방 속을 찬찬히 뒤적이던 김 촌장은 지난 삶에 대한 한이 사무치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쇠꼴마을을 자랑스러운 명소로 만들겠다"며 말을 맺었다.

"합판사업을 위해 월급의 90% 이상을 저축하며 모았던 450만원을 사기당한 적이 있어요. 그때 큰 애가 막 돌이었는데, 정말 자살하고픈 생각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방실 웃는 아이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어섰죠. 시련이 닥칠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와 고생 없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조그만 시골이지만 먼 훗날 역사를 남긴다는 목표가 뚜렷하니까 뼛심으로나마 버티고 있는지도 몰라요. 벌어놓은 돈을 조금씩 까먹고 있지만, 사람과 시골이 좋게 바뀐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가는 도시인들과 함께 농촌의 희망을 가꾸고 싶습니다. 한국의 로렐라이를 만드는 건 결코 헛된 꿈이 아닙니다."


▲ 배 밭 건너편에서 바라 본 쇠꼴농장 전경. 자연과 더불어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다.
ⓒ 최육상

태그:#쇠꼴마을, #쇠꼴농장, #김교화,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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