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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 출신인 내가 해병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4년 전인 2003년 첫 번째 역사소설을 출판하고는 책을 팔려는 욕심에서 고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한 것이 원인이었다. 의외로 동문회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대립의 형태는 50대 이상의 선배들과 40대 중반의 선배들의 이분법적 구도였다. 내가 나온 공업고등학교가 필연적으로 잉태한 결과이기도 했다. 60년 대 초반에 설립된 그 학교는 애초에 농업고등학교로 출발했다. 당시의 시대를 감안하면 이사장이 자급자족의 기치를 걸고 농고를 설립한 것은 당연한 선택일 수 있었다.

이사장은 전국의 중학교에서 톱클래스의 인재들을 스카우트하여 3년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선배들의 성취도는 대단했다. 거의 전원이 대학에 진학하여 학계와 재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검증했다.

그러나 시대가 공업입국으로 바뀌고 중동의 건설 바람이 불면서 학교도 시류에 호응해야 했다. 설립자가 사망한 이후 농고가 공고로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전액 장학금과 전원 기숙사의 혜택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수한 학생을 스카우트하여 사회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던 학교가 원서만 내면 입학할 수 있는 3류 공고로 바뀌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되자 농고 시절의 우수한 선배들이 공고 출신의 후배들을 좋게 볼 리가 만무했다. 후배들 역시 그런 선배들을 그리 곱게 여기지 않았다. 유전적 동실성이라고는 같은 건물에서 공부했다는 것 밖에 없는 선후배들이 반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아무튼 회의가 대충 마무리 되고 식사를 하러 갔다. 나는 그 자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책을 팔아먹을 결심이었다. 실제로 같은 공고 출신의 선배들은 장하다며 적지 않은 분량을 팔아 주었다. 술자리가 그럭저럭 무르익을 무렵 공고 선배들이 사과를 했다. 후배들이 솔직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자 화해는 급물살을 탔다. 그때부터 아주 화기애애해졌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공고 선배들이 농고 선배님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였다.

제법 취해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선배님들께 경례를 하면서 "필승!"이라는 해병대 구호를 때렸는데, 그 순간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치열한 사격이 교차하다가 느닷없이 뚝 그친 것처럼 불길한 느낌이었다. 정적을 산산이 박살낸 것은 "해병대 집합!"이라는 대선배의 외침이었다.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기저기서 해병대 출신 동문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하나같이 매섭고 살벌하게 생긴 선배들은 농고와 공고와는 완전히 구획된 별도의 무리를 형성했다.

그들은 내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얼결에 해병대 출신 선배들 가운데 앉게 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서 술잔이 내밀어지는 것을 하나도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마셨다. 순식간에 두 병 이상을 마신 것 같았는데도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는 술을 전혀 취하지 않게 해주었다. 감히 방위가 해병대를 사칭하다니! 그것도 가장 졸업이 늦은 새까만 후배 놈이 그랬다면 당장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잔을 삼킬 때마다 마치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처음 집합을 외쳤던 대선배가 잔을 주면서 "몇 기냐?"고 묻는 것이었다. 해병대 기수를 알 리 없던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우물쭈물 하는 나를 바라보는 대선배님의 눈초리가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처럼 변했다. "해병대 역사 이래 너 같이 군기 빠진 새끼는 처음 보았다"며 머리를 쥐어박던 대선배가 "군기 잡는 데는 빳다가 최고"라며 직접 손을 쓸 기세로 일어섰다. 다른 선배들이 "오늘은 참으시고 다음에 우리끼리 모였을 때 실시하시라"며 만류하여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선배는 "어떻게 저런 동사무소 방위 같은 새끼가 해병대가 될 수 있느냐, 이러니까 해병대가 개판이 되는 것 아니냐"며 깊이 탄식했다. 다른 선배들은 "그래도 겨우 우리 학교를 나온 학력가지고 역사소설을 일곱 권씩이나 써낸 근성을 보니 과연 해병대가 틀림없다"며 위로했다. 어떤 선배가 "내가 우리 동네 해병전우회 간부니까 책을 얼마든지 팔아 주겠다"고 말하자 선배들은 경쟁적으로 책을 팔아주겠노라며 격려했다. 너무나 고마웠지만 어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밖에 없었다.

잠시 후 해병대 선배들은 "땅개(육군) 출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려니 영 술맛이 나지 않는다"며 따로 일어섰다. 그들과 함께 나가 별도의 술자리에 참석했다가는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작가적인 순발력을 발휘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시간을 번 다음 핸드폰의 알람을 1분 뒤로 설정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알람이 울었고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나는 큰 목소리로 "어느 병원이야?"를 외쳤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술자리를 빠질 수 있는 좋은 핑계였다. 부딪치고 엎어지며 황급히 나오는 나에게 선배들이 택시비를 하라며 돈을 집어주었다. 그날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출근한 다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해병대 행세를 했을 때 얻게 될 이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의 신변이 동문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 그때가 처음 나간 것이다 - 때문에 노력만 잘하면 계속 해병대가 될 수 있었다. 즉시 해병대 공부(?)를 시작했다. '민간군사전문가'인 나에게 해병대 연혁과 기수를 암기하고 6·25와 베트남전의 대표적인 전적지 및 현재의 주요 주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 해병대 군가를 몇 가지 외우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그럴싸했다. 거기에 해병대 출신을 만나면 기수와 근무한 부대를 먼저 물어본다는 원칙까지 확립했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 있었지만 그것을 써먹지는 못했다. 나 같이 어수룩한 사람에게 당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듯 사기도 쳐 본 사람이 잘 치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내 인격이 모자란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동문회에서는 그 후로 거의 1년간을 해병대로 대우해주었다. 마침내 커밍아웃 하게 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에세이를 출판하면서 그때의 에피소드를 사실적으로 기술하여 선배들에게 증정하면서 솔직하게 사과한 것이다. 그들은 크게 웃으며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사주거나 책을 팔아주면서 격려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간신히 군대 위조 혐의에서 사면될 수 있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난다.

방위 출신이라는 주홍글씨가 자자(刺字)된 남자들은 어디서든 기를 펴지 못한다. 방위 출신자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기간은 방위병으로 판정 받고 복무 기간이 만료되기 직전까지다. 나 역시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는 나름대로 선민(選民)의 특혜를 누렸지만, M-16 소총과 군장을 비롯한 군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반납하고 부대 정문을 나선 직후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전투 부대에서 별별 훈련과 상황을 경험했어도 예비군복을 받은 다음부터는 그저 '방위 출신'으로 버무려져야 했다. 졸업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처럼 방위 기간의 만료는 병역의 의무에서 해방이 아닌 최악이 고통이 발원하는 수원지였다.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술자리가 제발 어서 끝나기를 바라기를 바라는 고문과 다름 아니다. 특히 해병대나 공수부대를 나온 친구나 직장동료들이 무협지 뺨치는 훈련을 통과하고 무공을 세운 것을 앞 다투어 자랑할 때마다 묵묵히 면벽(面壁)하는 고통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지겹도록 리필 되는 축구와 장교들 골려 먹던 등등의 이야기까지 감내하노라면 어느 틈에 성인의 반열에 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죽은 다음에 화장을 하면 진주처럼 영롱한 사리 한 말 이상을 수확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때는 위조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학력은 위조가 가능하지만 군대는 그렇지 않다. 학력이야 나중에 대학에서 개설한 과정을 이수하거나 아예 외국의 대학 졸업장을 돈 주고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방위 나온 남자가 다시 현역병으로 입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인데다 군대 경력을 돈 주고 세탁할 수도 없다. 일단 제대한 다음에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현역과 방위의 갭은 학력과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견고하다.

본의 아니게 군대 위조 경험을 가진 나는 최근 불거진 학력 위조 사건의 당사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것은 입장에 제한된다. 그들이 학력을 위조하게 된 원인은 이해할 수 있어도 그런 방식으로 취한 이득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능력보다 학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원인제공을 하였다는 주장은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지만 그것이 면죄부로 기능할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은 잠적한 다음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부분의 지분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들의 잠적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당한 피의자가 도주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최소한 분량의 알리바이도 마련하지 못하고 서둘러 잠적하는 그들의 뒤태에서 전락의 모습을 본다.

문제는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그리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속이고 뒤통수치는 것이 전문인 정치권이야 말로 가장 의혹이 가는 바닥인데, 왜 거기서는 아직까지 커밍아웃이 없는 것인가. 커밍아웃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전락한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방위, #필승, #해병대,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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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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