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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모임을 할 때마다 정해진 코스처럼 군대이야기가 등장하게 마련이고 그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기 일쑤다. 남자들은 그것 빼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나처럼 방위를 나온 사람은 정말 할 이야기가 없다.

저마다 군대에서의 모험담을 자랑할 때면 나는 묵묵히 면벽참선(面壁參禪)에 들어간다. 그때 들이키는 소주는 왜 그렇게 쓴지 모르겠다. 가장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짝퉁'으로 마쳤으니 당연히 감내해야 할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방위출신은 뭔가 적지 않은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

그들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겠으나 방위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그들로서는 쉽게 입을 열기는 어렵다. 나 역시 어디를 가도 방위출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이 난 김에 방위시절 이야기 좀 해보도록 하자.

[에피소드①] 졸지에 군기 빠진 '방위'되다

80년대 중반, 방위병이었던 나는 '주교야경'의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주경야독과 비슷한 사자성어는 "주간에는 교육훈련하고 야간에는 경비를 선다"는 의미였다. 정문과 탄약고 등의 경계근무는 본래 현역병이 할 일인데, 1개 소대에 훨씬 미달하는 현역병들은 그런 데에까지 여력이 미치지 못했다. 현역병으로는 부대 운영에 따른 행정 및 기타 업무에도 빠듯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높으신 분이 뜬다거나 측정이 있기 전에는 대부분 우리들이 서게 마련이었다.

당시 방위병의 규모는 화기소대까지 포함한 1개 중대병력이었다. 하루에 1개 분대가 부대에서 대기하여 상황에 대비(?)하며 경계에 투입되었다. 어쨌든 방위도 군대다보니 짬이 되는 고참들은 내무반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분대원들이 정문과 탄약고를 로테이션하게 마련이었다.

일단 야간대기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짬으로는 취침은 아예 꿈도 못 꿀 일이다. 근무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시간이 정지한 것 같고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웠으며 배는 왜 그렇게 고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문과 탄약고에서 어떤 때는 외곽초소까지 로테이션 하다보면 어느새 하늘이 붉게 채색되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도 수류탄과 각종 화기로 중무장하고 해안지역 경계에 투입된 방위병-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들에게 비하면 그리 고생이라고 할 수 없는 데다 방위병의 특권인 '퇴근'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날'이 닥친 것은 밀어내기식으로 탄약고에 투입되었을 때였다. 겨울에 막 진입한 12월 초쯤으로 기억한다. 그날따라 유난히 별빛이 맑았다. 신병을 데리고 경계에 들어간 다음 그렇고 그런 잡담을 했다. 설마 거기까지 불순분자가 침투할 리는 없었고 잡담이라도 해야 약간이나마 시간이 흐르기 마련이었다.

금성(金星)이 영어로 골드스타라느니 어떤 탤런트가 재벌의 아기를 세쌍둥이나 낳았다느니 등등의 말도 안 되는 잡담을 하고 있는데, 현역병들의 내무반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뭐라고 악을 쓰는 소리에 와장창 부서지는 파열음이 적절하게 배합된 것을 보아하니 집합 한 번 진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거야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럴 때마다 방위병이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일직사관이 나타난 것은 소란이 그치고 약간 지난 다음이었다. 폭주기관차처럼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일직사관은 상병이었다가 최근에 진급한 최아무개 하사였다.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 얼른 경례를 붙이는데 "이 방위새끼가 군기가 빠졌다"며 대뜸 정강이를 발로 차는 게 아닌가.

정강이가 패여 나가는 것 같은 격심한 고통에 하마터면 소총을 떨어뜨릴 뻔 했다. 차가운 전류처럼 찌르르하게 퍼지는 고통을 겨우 참으며 자세를 바로 하는데, 최아무개 하사가 여기저기 플래시를 비추며 돌아다니더니 담배꽁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경계근무자는 담배를 피울 수 없고 특히 탄약고는 더욱 그렇지만 그것이 완전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끼리 근무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담배 한 개비쯤이야 얼마든지 피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미친놈이 탄약고 근무를 서면서 그 앞에 꽁초를 버리겠는가? 최아무개 하사가 집어온 것은 아마 다른 곳에서 버려졌다가 바람에 굴러들어온 것일 확률이 컸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 그러니까 "군기가 완전히 빠져 탄약고 앞에서 담배피운 방위새끼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날의 경계근무는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정신없이 구르다가 얻어맞다가 또 구르고 다시 터지는 것이 반복되면서 그것이 점점 확대재생산 되었다. 이러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공포를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죽도록 굴렸어도 최아무개 하사의 분은 풀리지 않았는지 비틀거리는 우리를 포로처럼 앞세워 내무반으로 향했다.

최 아무개 하사는 내무반에 있던 고참들이 화들짝 놀라 부동자세를 취하는 순간 따귀를 때렸다. 코피가 터진 분대장을 "이렇게 밖에 못 하겠냐"며 몇 대 더 쥐어박은 다음, '군기 빠진 방위새끼'가 저지른 군기위반 항목을 조목조목 말했다. 나는 졸지에 감히 탄약고 앞에서 담배를 피운 죽일 놈이 되고 말았다. 진정한 공포는 최아무개 하사가 나간 다음에 시작되었다. 내무반에서 고참들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굳이 상세하게 말하지는 않으련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최아무개 하사가 진급하기 전 고참이었던 상병에게 반말을 하다가 싸움이 붙은 것이 그 일의 원인인 것 같았다. 그 상병의 주먹이 훨씬 세어 몇 대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당시는 그런 하사들을 우습게 보는 풍토인데다 최아무개 하사가 인심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도 말려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어디다가 눈 흘긴다고 하급자에게 당한 화풀이를 만만한 방위병들에게 퍼부어댄 것이었다. 하기야 그런 것을 알아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군대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높은 놈이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군대의 생리가 아닌가? 그 철칙에서 방위도 예외가 될 수 없을 따름이었다.

[에피소드②] 야간행군 중에 기관총을 잃어버리다

탄약고 사건을 당하기 2개월 쯤 전이었다. 가을의 풍성함이 들녘에 충만할 무렵 우리 중대는 야간행군에 나섰다. 야간에 주둔지를 순회하는 행군은 1달에 1번 정기적으로 있었다. 취사병들이 지어준 저녁을 먹고 - 우리들은 항상 부대에서 준 밥을 먹었다 - 출발하면 다음 날 오전 8시쯤에 돌아왔다.

대략 40km 가량의 거리에 완전무장도 아니어서 현역병들이 보면 피식 웃을 것이지만 정해진 시간 내에 제법 가파른 능선을 돌파하여 수원지(水源池)와 변전소, 터널 등의 주요시설을 순찰해야 했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체력이 약하거나 경험이 없는 신병들은 가운데는 종종 낙오자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는데, 낙오자가 발생할 때마다 한바탕 곡소리가 났다. 우리를 굴릴 때의 중대장은 전형적인 '새디스트'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소프트웨어가 완전히 망가진 인간으로 보였다.

그날 저녁에도 출발 전 고참들은 "낙오하는 놈은 아예 각을 떠버린다"는 등등의 무시무시한 교훈을 넘치도록 내렸다. 특히 무전병과 M-60 사수는 한층 더 살벌한 교훈을 들어야 했다. 이윽고 출발명령이 떨어졌다. 늘 가던 길을 단조로운 몸짓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우리 소대가 선두였고 내가 포함된 분대가 첨병(尖兵)이어서 가장 앞에 나섰다. 부대 바로 뒤에는 작은 규모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거기를 지날 때면 언제나 기분이 야릇했다. 특히 그때처럼 스산한 가을밤에 묘지를 지나노라면 뒤에서 누군가가 당기는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그럭저럭 능선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잠시 쉰 다음 다시 출발하였는데, 가장 앞에 가던 후배가 갑자기 이상한 신음을 내면서 펄썩 주저 않는 것이었다. 아마 쥐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행군 도중에 쥐가 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레도 낙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다가가서 상태를 살피는데,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입에는 거품을 무는 데다 온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증상과 흡사했다.

만일 혼자 밤에 혼자 길을 가다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대로 기절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공포스러운 증상의 출처는 곧 밝혀졌다. 낮은 저음으로 붕붕거리는 소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바로 땅벌 집을 건드린 것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들고튀었다. 그 와중에서도 분대장이 벌에 쏘여 쓰러진 후배를 부축하여 피신시키는 것을 보니 과연 짬밥은 짬밥이었다.

땅벌부대의 포위공격을 당한 우리 분대가 지르는 비명을 감지한 중대장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으로 인해 1개 분대가 완전히 무력화 되었고 소대 전체로는 거의 2개 분대 가량이 피해를 당한 상태였다. 빨리 가고 싶은 욕심에 행군간 거리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선두소대는 더 이상의 행군이 곤란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소대원들이 다친 동료들을 부축하여 돌아가야만 했다. 벌에 쏘이지 않은 부류는 이게 웬 떡이냐며 입이 벌어졌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소박한 행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가 막히게도 M-60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사수가 벌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다가 엉겁결에 팽개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총을, 그것도 소총도 아니고 기관총을 분실했다는 것은 능지처참이 모자랄 대역죄(大逆罪)에 해당했다. 게다가 군대에서 내리는 형벌은 거의 100% 연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색이 된 우리는 벌에 쏘일 각오하고 다시 올라가 기관총을 찾았다. 우리가 결사적인 각오로 수색하는 동안 중대장은 사수를 그야말로 개 패듯 패고 있었다. M-60 기관총은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이상하게도 계속 꼬리를 무는 특징이 있다.

그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낸 M-60의 총신이 진흙으로 범벅된 것을 본 중대장은 완전히 돌아버리고야 말았다. 그날 행군은 취소되었다. 복귀하는 우리들은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발을 질질 끌었다. 부대로 돌아가서 당할 꼴을 생각하면 차라리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우리에게 밤새도록 가해진 사랑의 손길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에피소드③] 내가 밀고를 할 수 없었던 이유

방위생활도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하라는 성현의 말씀을 실천할 무렵에 터진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기만 하다. 우리 내무반 부근에서 M-16 소총 실탄과 함께, 캐리바 50이라는 기관총의 실탄이 발견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대장은 물론, 부대장까지 크게 놀랐다. 사격을 하고 난 다음 탄피 하나라도 없어지면 난리가 나는 판에 실탄이 발견되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부대가 발칵 뒤집히고 범인 색출에 들어갔다. 실탄이 발견된 곳은 청소용 빗자루와 걸레 등의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그 창고는 매우 허술해서 굳이 열쇠도 채우지 않았다. 그것을 다른 용도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최아무개 하사가 우리들에게 작업을 시켰는데, 바닥 구석진 곳을 뜯어내다가 실탄 몇 발이 발견된 것이었다. 곧 수사가 시작되었고 부대 분위기가 대단히 험악해졌다. 부대장은 우리에게 혐의를 두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사격을 많이 한 편이었다. 정식의 사격이라기보다는 예비군들을 대신해서 탄피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가끔씩 동원예비군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우리들이 총 쏠 일이 생겼다. 예비군들이 훈련에는 분명히 사격도 포함되지만 대낮부터 취해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총을 맡길 수는 없었다.

예비군들이 나간 다음 적당한 때를 잡아 탄피를 만들었다. 아예 1개 분대를 차출하여 사격을 실시하였는데, 사격은 가장 군기를 철저히 지켜야 했기 때문에 거의 한나절을 소비하기 일쑤였다. 6·25 당시 사용했던 M-1과 칼빈은 물론, 앞서 말한 캐리바 50 기관총도 함께 사격하여 탄피를 만들었다. 구경이 12.7mm인 캐리바 50을 쏘는 것은 정말 볼 만 했다. 거짓말 좀 보태면 시뻘건 주먹 같은 예광탄이 튀어나가 표적 뒤의 땅에 동굴을 팔 정도였다.

소총의 앙칼진 소리와는 달리 묵직하게 터지는 굉음도 아주 남자다웠다. 그런 사격을 드물지 않게 하다 보니 실탄을 빼돌릴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기관총탄의 탄피를 잘라내 반지를 만들고 소총의 탄두로는 목걸이를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용도로 두어 개 슬쩍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범인일 수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탄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 했다. 각종 포탄을 비롯한 실탄을 관리하고 수령하여 탄피를 회수하고 기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역병의 일이었다.

우리들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봉인된 박스를 운반 하는 등의 단순한 것에 제한되었다. 애당초 관리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빼돌린다는 말인가? 그리고 혹시 빼돌렸다면 퇴근할 때 가지고 나가 몰래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면 그만이지, 미쳤다고 창고에 숨긴단 말인가?

그것은 굳이 어려운 논리도 필요 없는 상식에 해당되는 일임에도 높은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분들은 "현역병이 그럴 리가 없다"며 이미 한 부분의 결론을 낸 상태였다. 때리거나 굴리지는 않았지만 하나씩 불러내어 구슬리고 겁을 주는데 피가 바싹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그 분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밀고'였다. 누가 의심이 가는지 말하면 너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밀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간혹 가다 의심을 받는 사례가 나타나기는 했어도 그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들 기미가 보일 무렵, 나에게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몇 기수 아래의 후배와 퇴근하여 함께 막걸리를 비우는데, 그 후배가 "야간 대기를 하던 도중에 현역병 가운데 누군가가 그 창고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역이라고 해서 거기를 드나들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애매한 사람 잡지 말라고 타박을 주자 "요즘 그 현역병의 행동이 매우 수상쩍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범인일 것 같다"며 강하게 확신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유심히 관찰한 결과 그 현역병의 혐의는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후배에게 입단속을 시킨 다음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가 100% 범인이라고 가정해도 그를 밀고할 수는 없었다. 군대에서의 밀고는 결코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다.

내가 밀고한 바로 다음 날이면 누가 누구를 밀고했다는 내용이 쫙 퍼질 것이 분명했다. 감히 현역을 고자질한 방위병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매일 같이 죽도록 얻어맞고 시달리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머지않아 끝날 방위생활이지만 가급적 무사히 나가고 싶었다.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이후의 사회생활에 좋은 보약이 되었다. 위에 소개한 내용 말고도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기는 해도 방위병이 고생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나불댈 것인가? 이미 새겨진 주홍글씨를 그대로 안고 갈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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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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