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9월 4일은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98년이 되는 날이다. 간도협약은 일본이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대한제국의 영토였던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준 것이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가 간도협약이 체결됐던 역사적 장소를 찾아 본 뒤 <오마이뉴스>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간도협약 체결 때 청나라 대표였던 양돈언
ⓒ 박선영

관련사진보기

지난 4일은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를 청조에 귀속시킨 때로부터 98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국의 영토권을 일본이 자의적으로 처분한 간도협약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간도협약의 무효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도협약을 체결하게 된 전제로서의 1905년 을사늑약이 불법적이고 무효이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한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이다. 국제법에서 조약은 체결 당사국만 효력을 가지므로 간도협약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한국은 간도협약에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은 간도협약의 무효성을 외치면서도 한번도 간도협약 체결의 현장을 되돌아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수소문 하고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일본 외교문서를 뒤진 결과,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 긴박한 회담이 오고갔던 역사 현장을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간도협약의 현주소와 그 운명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간도협약은 어떻게 체결되었는가?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 청조와 일본은 오랫동안 외교문서를 통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국이 만나 본격적으로 협의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2월 28일이다. 이후로 1909년 1월 11일, 1월 27일, 2월 3일, 2월 10일에 개최된 회담에서 철도문제와 간도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1909년 2월 17일에 개최된 회의에서는 간도 영토권에 대한 일본의 '양보'내용을 다뤘으며, 그 후의 회담에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재판관할권을 논의하였다. 다시 8월 16일과 8월 21일에 만주현안을 논의하고, 8월 26일에 만주현안에 대해 양국이 대체로 타협하였다. 8월 31일 회의를 거쳐 결국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간도협약과 관련된 역사 유적지의 현주소

① 협약 체결자 양돈언 가택의 유적지
 외관상 양돈언의 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사진 왼쪽). 그러나 마센후퉁 3호라는 표지는 없다. 왼쪽 끝부분의 대문이 추정지
ⓒ 박선영

관련사진보기



양돈언은 1873년 제1회 청조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예일대학에서 유학하였고 후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양돈언은 주미국, 멕시코 및 페루 공사로 부름을 받고 출국하려다가 자희태후의 만류로 어전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외무부 우승(右丞·지금의 副部長)으로 승진하였다. 1909년에는 외교부 부장급에 해당하는 외무상서로 승진하여 간도협약 체결의 당사자가 되었다.

베이징시 둥청구 마센후통 3호에 있는 양돈언의 집은 원래 105칸의 중국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을 찾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싶은 중국은 베이징시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고 있어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센후퉁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야말로 묻고 또 물으며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찾아간 마센후퉁은 전체적으로 철거되어 가옥이 몇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센후퉁 3호라는 표지자체가 보이지 않았고 외관으로 보아 양돈언의 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센후퉁 3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처는 공사용 철문이 굳게 닫혀있고 인기척이나 어떠한 표지도 없어서 실상을 확인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마센후퉁 주변은 이미 거대한 빌딩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고 도로도 확장되어서 전체적인 재개발이 불가피해 보였다.

② 일본 공사관 유적지
 일본 공사관 유적지 표지판(왼쪽)과 일본 공사관 유적지 전경(오른쪽)
ⓒ 박선영

관련사진보기



일본공사관은 1872년 북경에 개설되어 민간 주택을 활용하다가, 1886년 서양식 건물을 건축하여 공사관으로 활용하였다. 이 건물은 북경시 둥자오민샹 지역에서 19세기에 건축한 건축물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오는 것으로 현재 베이징시 둥자오민샹 21호에 있다.

현재 베이징시위원회 숙소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관리원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진 조차 찍지 못하도록 하여 단지 건물 외벽에 설치된 표지판으로 과거의 역사를 회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1900년 의화단사건 이래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둥자오민샹의 외교공사관 구역은 새롭게 재편하게 되었고, 이로써 일본공사관은 정이루 신관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정이루 2호에 있는 일본공사관 유적지는1909년에 건축하였고, 현재는 북경시 인민정부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③ 청조 외무부 유적지
 총리각국사무아문 유적지 표지판
ⓒ 박선영

관련사진보기



간도협약은 1909년 9월 4일 청조 외무부에서 체결되었다고 한다. 외무부는 청조 역사의 변화와 각국과의 외교관계 변화에 따라 그 위상이 달리해 왔던 곳이다.  아편전쟁 전 청조는 외국과의 외교 관계를 무시하였으나 아편전쟁에 패한 후에는 태도를 달리하여 서양과 교섭할 수 있는 전문 기구를 마련하였다.

1861년 1월 20일 공친왕의 주청으로 함풍제는 양무(洋務) 및 외교업무를 위해 특별히 중앙기구로서 총리각국사무아문 설립을 비준하여, 1861년 3월 11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외교 업무를 담당할 전문 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이 탄생하였다.

현재 베이징시 둥청구 둥탕즈후퉁 49호에 있는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원래 청조 대학사인 새상아의 가택이었는데 1854년 철로국공소가 사용했다가 1861년에는 총리사무아문이 되었다. 1901년 7월 24일 총리아문을 외무부로 변경하여 중앙 6부중 최고의 부서로 삼았다.  현재는 공안부 접대실로 활용하고 있다. 굳게 닫힌 문 앞에 공안 차량까지 있는 모습이 매우 삼엄해 보인다.

 공안부 접대실 표지(왼쪽)과 청조 외무부 유적지(오른쪽)
ⓒ 박선영

관련사진보기


간도협약 유적지와 간도협약의 운명은?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의 현장을 둘러본 느낌은 착잡하였다. 더운 여름 불볕 더위 아래 지친 몸을 이끌고 지나가는 행인한테 또는 경찰서에 들어가서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현장을 찾아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현장은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앞둔 북경 재개발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아니면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는 공공건물로 활용하고 있어서 유적지 내부를 들여다 본다거나 유적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봉쇄되거나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고 역사속에 파묻혀 허물어져 가고 있는 간도협약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더욱 힘들었다. 이는 현재 중국이 간도협약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보는 것과도 같았다.

간도협약이 체결된지 1세기가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간도협약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중국은 간도협약의 재론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버릴 것은 버리고 재개발하며 봉쇄할 것은 봉쇄하는 정책을 통해 간도문제가 새롭게 제기되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이는 간도협약이 체결되기 까지의 역사 유적지 현장을 둘러 본 느낌과도 흡사한 것이다. 유적지 현장을 돌아보면서도 과거 역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간도협약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 힘으로 체결한 모든 조약이 무효로 된 것 뿐만 아니라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1910년 8월 22일 이전 대한제국과 일본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의 무효'에 의해서도 효력이 부인된다.

간도협약 무효성 제기는 갈등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중간의 평화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것이다. 한중간에 갈등의 불씨를 키워 계속해서 시비가 붙는 것 보다 양국이 미래지향적으로 고려하여 평화적인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첫걸음이 되지 않겠는가? 간도협약이 한중간의 갈등이 될 것이냐 아니면 평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1세기가 되어가는 간도협약의 운명은 기로에 서 있다. 간도협약은 어떤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가?


태그:#간도협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