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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이라는 긴소설이 1970년대 끝무렵에 조그마한 '손바닥책(문고판)'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으나, 그 뒤로, 또는 그 앞으로 '긴 줄거리를 담은 책'이 손바닥책으로 나온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책이 새로 나온 뒤 얼마만큼 팔리게 되면, 손바닥책으로 보급판을 만드는 문화가 널리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토지> 같은 책도 일본에서는 손바닥책으로 나옵니다. 보도사진가를 이야기하는 어느 일본 손바닥책은 쪽수가 자그마치 1000쪽을 훨씬 넘는데 책 만듦새는 튼튼하여 책장이 안 떨어지고, 읽기에도 괜찮고 무게도 가볍습니다. 우리 나라였다면 이런 책을 큼직하고 무겁게 만들어서 들고 다닐 수 없게, 그러니까 책꽂이에만 모셔 두도록 했겠지요. 책값은 5만 원도 아닌 10만 원쯤 붙었을 테고요.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애장용'이라고 하며 양장에다가 책상자까지 만든 판이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좀더 많은 사람이 가벼운 마음으로 값싸게 사서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보급판'이나 '손바닥책'을 만들겠다는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토지>나 <혼불> 같은 긴소설도 손바닥책으로 만들겠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소설책을 한국처럼 두껍고 무겁고 비싼 고급종이를 써서 만드는 곳은 없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일본이든 다른 어느 나라이든, 소설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니까 공부하는 책, 학문 깊이를 파헤친 책, 인문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어떤 전문 분야를 다룬 책도, 그림과 사진이 많이 들어간 예술 쪽 책도 으레 가볍고 튼튼하면서 보기 좋고 값싸게 만드는 편입니다. 다만, 이렇게 만들면서도,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장서로 갖추어 자료로 쓸 수 있는 판도 함께 만듭니다(도서관에서 기꺼이 사 주니 이렇게 할 수 있을 테지요).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요새는 웬만하게 만들어서는 책이 안 팔린다고 해서 책값을 올리며 빛깔 곱게 꾸밉니다. 책마다 껍데기를 씌우거나 띠지 두르기는 유행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처럼 되었습니다. 그래, 책값을 올려붙인 책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독자들이 사 주지 않는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마을 흐름은 '어차피 이 책을 사서 볼 사람은 사서 보니까, 그렇게 사서 보아야 할 사람들 주머니를 털어내자'고 생각하는 도둑질은 아닐까요. 좀 지나친 말이라 하실지 모르겠으나, 우리네 책마을 모습이 이렇잖아요. '어차피 사서 읽을 사람'이라 한다면 '좀더 값싸고 즐겁게 사서 보도록' 해 주어야 좋고, '이 책을 몰라보고 못 사는 사람한테도 널리 알리는 길'을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이 모든 문제를 출판사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우리들부터 '속에 담은 줄거리'를 살피며 책을 사 보는 버릇을 제대로 못 들이고, 또는 안 들이고 있으니까요.

 

겉꾸밈(디자인이나 장정)이 좀 허술하더라도 속에 담은 줄거리가 알뜰해야 좋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널리 이름이 알려졌거나 무슨 교수가 쓴 책이라 해서 훌륭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책을 낸 역사 깊은 출판사라고 해서 ‘이곳에서 새로 내는 책마다 우리 삶을 밝히는 책’이 될까요. 우리들이 아직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써낸 책을 낯선 출판사에서 냈을 때, 이 책들은 찬찬히 살피며 돌아볼 값어치가 없을까요.

 

제가 헌책방을 자주 다니며 책을 보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 겉꾸밈이 좋다고 모두 읽을 만한 책이지 않습니다. ▲ 이름난 사람, 학식과 지위와 권력이 있는 사람이 쓴 책이라고 해서 훌륭한 줄거리를 담은 책이지 않습니다. ▲ 권위와 역사 깊은 출판사라 해서 한결같이 우리 삶을 밝히는 책을 내지는 않습니다. ▲ 책크기(판형)가 작고 가볍고 값싸고 좀 질이 낮은 종이를 쓴 책이라고 해서 뭔가 좀 덜 떨어지거나 모자란 책이지 않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은 사람이든 책이든 사물이든, 일자리든 자연이든 삶이든, 사진이든 연속극이든 영화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따라서 '좋고 싫고'를 가리기 일쑤입니다. 이름있는 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일도 잘하고 똑똑할 것처럼 생각하지 않나요. 얼굴이 곱상하고 예쁘면 더 마음이 끌리지 않나요.

 

참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일 때부터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일류대학교 들어가기 난장판'에 끌려들고 맙니다. 사물과 사람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자기가 참으로 좋아하고 즐길 만한 일자리를 찾기보다, 돈과 이름과 힘을 더 많고 높고 크게 얻을 수 있는 학벌과 연줄을 찾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갑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책 한 권을 볼 때에도 속보다 겉을 더 따지거나 찾게 되지 싶어요. 요즘 들어서 드물게 나오지만, 못생긴 탤런트나 영화배우 숫자는 참 적어요. 연속극에 나오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잘나고 잘생기고 몸매 늘씬한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아예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만큼 '장애인 이동권'과 '장애인 활동권'이 막혀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더욱이 장애인 이야기나 푸대접받는 소수자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구경하기 힘들고, 어쩌다 나오는 책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구호를 벗어나지 못해요. 영어니 논술이니 하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동안 아예 한참 뒤로 밀려나 버리고 만 '우리 말과 우리 문화 이야기'를 다룬 책은 큰 책방 진열장에서도 구석진 자리에나 조금 있을 뿐입니다. 뭐, 이런 책을 사 보는 사람이 드무니 책방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요.

 

 

사람 손은 하나라서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도 하나입니다. 욕심을 잡으면 나눔을 못 잡고, 명예나 돈이나 권력을 잡으면 사랑과 믿음과 즐거움을 놓칩니다. 겉멋을 잡으면 속멋을 놓치기 마련이고 학벌과 학력을 잡으면 참된 사람살이와 사람공부는 놓칠밖에 없습니다.

 

책 하나 만들어 사람들한테 읽히겠다는 책마을 일꾼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이 마음과 살림을 좀더 헤아리고 살피는 눈길을 잡지 않는다면 얄궂은 길로 갈밖에요. 책 하나 찾아내어 읽는 우리들도 겉꾸밈과 유명세 따위에 자꾸자꾸 빠진다면, 속을 잘 차리면서 알뜰하고 아름답게 가꾼 책하고 그지없이 멀어질 테고요.

 

<내 나이가 어때서> (황안나 지음·샨티·2005)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예순다섯 나이에 두 다리로 남녘땅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걸어서 밟아나가는 여행을 떠난 할머니 삶과 생각을 담은 책입니다.

 

"나 역시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무엇을 하기에 '오늘'은 항상 가장 적합한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언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본단 말인가!" 하는 대목에서 한동안 책장을 덮습니다. 이 외침 그대로 우리들은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을 밝히는 책, 겉멋이나 유명세나 유행이 아니라 자기한테 지금 가장 쓸모있으면서 올곧음과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책, 달디단 설탕이나 짜디짠 소금이 아니라 구수하면서 하루 세 끼니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된장찌개 같은 책을 즐기는 일이 출판사한테는 '조그마한 책'을 조촐히 내는 마음을 일으켜세우고, 우리 자신한테는 '조그마한 책'을 가붓이 즐기는 마음을 잠깨울 수 있을까요. 조용히 믿어 봅니다.

 


태그:#책이 있는 삶, #손바닥책, #문고판,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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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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