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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하루 반나절을 '1,000원짜리 국수집'에서 노력봉사를 했다. 역전에서 두어 평 남짓한 국수집을 하는 후배가 일하는 아주머니 두 분에게 아주 넉넉한 명절휴가를 드리고 혼자 고군분투한다기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국수집이니 후배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청해 나섰다. 내가 누구냐? 국수 그러면 '조 국수'로 불리는 국수 아줌마 아니냐.

 

주전부리 빼고 주식류 중에서 '1,000원'짜리는 처음이었다. 천 원짜리 팔아 셋이 먹고 살려면 얼마나 바쁠까? 아주 정신이 없었다. 최소한 300 그릇 이상은 팔아야 기본은 되니 뺑뺑이도 그런 뺑뺑이가 없었는데 그래도 너무 재미(?)있는 것이었다.

 

 

인사동에서 맛대가리도 없는 '오만 원'짜리 한정식도 먹어 봤지만 이렇게 기분 좋지는 않았다. '1,0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먹으러 들어오는 손님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계층도 다양했다.

 

깔끔한 양복쟁이 신사 숙녀, 노점상, 역전에서 등뒤에 벌건 천으로 '예수' 이렇게 써붙이고 전도를 하는 젊은이, 약속보다 일찍 나와 시간이 남아 들어오셨다는 할머니. 손님들 구경하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모두 들어와서 너무 싼값의 너무 맛있는 국수 한그릇을 먹었다며 기분 좋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시던데 그 인사를 듣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

 

 

하루 반나절을 '빡'세게 국수장사를 하고 나서 나도 이런 국수집 하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쪽은 그래도 자신있는 편이다. 젊었을 적부터 머리 굴리는 것보다 단순작업을 더 즐거워 했던 나다.

 

예전에 전자계산기 만드는 전자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입사해서는 'QC'라고 불리는 품질 관리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생산라인으로 쫒겨났다. 노조결성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부서이동을 당한 것이었는데 'QC'는 준사무직으로 대접받을 만큼 한 '끗발'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생산라인으로 쫓겨갔다는 것은 해고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생산라인으로 가서 내가 맡은 일은 컨베이어 벨트에 순서대로 조립되는 회로판에 납땜을 하는 것이었다. 전기인두로 굵은 국수발(못말려, 뭐든지 국수가닥으로 보이니) 같은 납줄을 들고 주루룩 훑으면 동글동글한 납똥이 앉는데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납땜을 할 때면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생산라인으로 쫓겨나서도 징징거리기는커녕 말도 없이 회로판에 코박고  너무 열심히 일을 했던지라 생산라인을 관리하는 주임기사까지 '미스 조'는 참 희한한 아가씨라고 신기해 했는데 얼마 못가 쫒겨났다.

 

3교대 근무라 한 달마다 근무시간이 바뀌었는데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샘근무 때 말썽을 피운 것이었다. 신혼 때 남편한테 '조 잠'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잠이 많던 내가 야간근무를 버텨낼 리가 만무했다.

 

납땜을 하다 후딱하면 졸아 계산기를 곰보딱지로 만들어 놓지 않나, 근무 중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테라스에 있는 대형 박스 속에 기어 들어가 잠을 자고 있지 않나. 주임기사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당신"이 나였다.

 

손이 빠르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국수집 같은 단순노동엔 내가 딱인데 그놈의 부실한 체력이 '웬수'다. 하루 반나절 했을 뿐인데 뼈마디가 쏙쏙 에리고 허리가 빠지는 것 같고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파김치가 됐으니 뭣에다 쓸까.

 

우리 남편, 허구한 날 고르랑 고르랑 대는 불량품 마누라 '반품'하겠다고 달려들까 무섭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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