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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고문 이겨내신 선배님들~

 

386 선배님들, 혹시 영화 <라이터를 켜라> 보셨습니까? '미달이 아빠' 박영규(국회의원 박용갑 역) 씨의 과장된 연기가 압권입니다. "나! 그 혹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버텨낸 민주투사야!". 정치깡패에게 사건을 의뢰한 뒤 돈을 떼어먹은 박용갑은 무시무시한 깡패들에게 납치된 뒤에도,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그 꼿꼿한 정신으로 돈을 뱉어내질 않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꼿꼿한 민주화 정신'에 비소(非笑)가 멈추질 않았습니다.


기실 87년 6월 항쟁 이후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 국회에는 그런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민주화운동 전력을 '가문의 영광'쯤으로 여기는 분들 말입니다. 뭐, 자기PR이 대세인 시대에 한 시대의 양심이었음을 내세우는 일이 꼭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현 시대의 과제는 방기하면서 '전력'을 내세워 권세를 이어가는 건 자파의 세력을 결집시키기에도,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건 마치 작가지망생이 소싯적에 받아쓰기를 잘했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일과 같습니다. 그만큼 유치하다는 말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선배님들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선배님들의 지난 20년간 정치는 상당히 조야했을 뿐더러 레파토리까지 똑같았습니다. 우선 거대한 악을 설정합니다. 87년엔 전두환ㆍ노태우였고, 92년엔 3당 합당한 작자들이었으며, 97년부터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이들의 만행을 나열할 차례입니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언급하고, 부도덕함을 폭로합니다. 온갖 부정부패와 친일행각이 단골메뉴 되겠습니다.

 

이 메뉴들을 기초로 저들은 ‘악’이고 선배님들은 ‘선’이라는 프레임을 구성하여 저들의 집권시 발생할 무시무시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민주개혁세력 바깥에 있는 진보세력에게 대동단결 또는 비판적 지지를 종용하여 표를 몰아줄 것을 주문하시죠.

요즘에는 선배님들께서 ‘범여권’이란 말을 쓰시더군요. 현재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여권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자는 게 선배님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이 레토릭 정말 식상합니다. 국민들은 어떤 감동도, 재미도 느끼지 못합니다. 70년대식 삽질경제론이 뜨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선배님들 민주는 도대체 어떤 민주입니까?

 

민주개혁 선배님들, 저는 위와 같이 ‘민주’가 희화화되고 있다는 점에 크나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나온 역사의 시간동안 피땀 흘려 민주를 쟁취해온 분들이 계시고, 우리는 그 분들을 ‘투사’라고 부릅니다.


선배님들 대부분이 최근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인이 된 이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데 반해,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의 얼굴은 어두운 그 장면 말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얼굴이 흙빛인 이유는 세상을 떠난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광주’에 대한 핏빛교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군부의 무자비함을 뼈저리게 확인하고, 운동진영의 미비함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사람의 임무를 각기 결의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만행’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선배님들의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 드디어 군부를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헌법이 개정되었고, 직선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민주, ‘국민이 주인’일수 있는 보다 진전된 방법들에 관해서는 더 이상 모색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투표를 하는 것으로 국민의 소임을 다하는, 국민의 권리를 다하는 나사 빠진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배님들께선 나사 빠진 민주주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아끼셨습니다.

 

즉, 386민주개혁 선배님들께서 내세우시는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실질화하지 못하는 껍데기에 불과한 틀이라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온 곳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이 사회는 해체되어 있습니다.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일어나는 차별과 배제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도무지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두 종류의 노동시장(정규직과 비정규직)과 두 종류의 교육체계(강남과 강북), 그리고 두 종류의 국민(일등국민과 이등국민)이 존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민주개혁 선배님들 중 어느 누구도 명확한 해법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선배님들께선 오늘날의 양극화를 초래한 장본인이십니다.

비정규직, 사회양극화, 청년실업. 이런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으셨으면서, 피눈물 흘리는 서민들을 언제 한번 제대로 대변치 않으셨으면서 선배님들은 민주, 민주만 되뇌어 왔습니다. 도대체 그 민주가 어떤 민주입니까? 누구를 위한 민주란 말입니까?


386민주개혁 선배님들의 몰락은 필연적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 외환위기 10주년이 되는 해로 주목받아왔습니다. 더군다나 한반도평화체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분단으로 인해 왜곡된 남ㆍ북한의 정치체제가 비약적 변화와 발전을 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어왔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전환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대선은 참 싱거워 보입니다. 딱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닥다리 경제론을 내세우는 후보가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줄만한 세력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선배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지난 10년간 선배님들께서 ‘민주’를 말아 잡수신 탓입니다.

 

한나라당의 독주 속에 이합집산을 꾀하는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길을 헤매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습니다. 안쓰럽습니다. 정당민주주의의 기본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인기에 영합해 개방형 경선을 떠들어오더니, 급기야 여론조사를 몇 퍼센트 반영할 것이냐를 놓고 ‘개밥그릇 싸움’을 벌이고, 종국엔 경선 도중에 방식을 바꾸는 황당무계한 일들을 벌이고 계십니다.

 

선배님들! 민주개혁 선배님들께서는 이 뿐 아니라, 전환의 시대에 적응조차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53년 체제, 87년 체제, 97년 체제에 대한 어떠한 진단이나 처방도 제시하지 않고 계십니다. 미래대안 없는 정치세력은 필연적으로 몰락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이신 오충일 선배님께서는 자당의 목표가 반(反)한나라당에 있지 않다고 말씀해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7 대선승리가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애매해졌나 봅니다. 범여권을 규합하는 과정에서는 ‘민주개혁 세력의 결집’을 호소해왔으면서 말로는 ‘반한나라당’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니, 이합집산에 불과한 세력 규합을 하시면서 말로는 ‘대통합’이라는 수식어를 같다 붙이시니 선배님들 스스로가 애매해진 것입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태가 되셨습니다. 기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합니다.

 

민주개혁 선배님들, 세상은 지금 200도씨로 끓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절규를 들어보십시오. 태반이 백수라는 20대의 처지를 들여다보십시오. 사회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 국민 공통성이 얼마만큼 훼손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18.0도씨 국회에 앉아 ‘성장을 통한 극복’이라는 효과 없는 처방전만 쓰시지 말고, 제발 세상에 나와 도대체 어떤 성장이 필요한지를 배워 가시길 바랍니다. 어떤 처방전을 써야 할지를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선배님들의 몰락이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이 결코 아니고, 지금 당장 고통 받는 이들의 처지가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 대선이 지나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예의겠으나, 솔직한 마음은 이제 제발 좀 쉬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86선배님들, 세상 걱정 놓으시고 이제 그만 쉬시지요.

덧붙이는 글 | 김규남 기자는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0학번으로, 졸업 뒤 현재 금민 한국사회당 대통령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원샷 경선, #범여권, #대통합민주신당, #386, #민주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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