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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적인 일자리를 찾아서 갈 필요가 있지, 공무원이 되겠다는 소극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기사를 보니 이명박 후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왜 다들 그런 소극적 생각에 매달릴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취업난은 해가 가면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도전적인 일자리를 찾아가지 않는 젊은이 탓이라는 어른들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더 나은 기회를 찾고자 해외로 나온 한 젊은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취업난이라고 하지만 어떻게든 도전하려는 젊은이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반성하고 도와주어야 할 부분은 없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1부 <그래 다 내 탓이다, 하지만>에 이어 2부 <정말 다 내 탓?>을 연재하고자 한다. 부디 나무를 통해 숲을 그릴 수 있는 작업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기자주>

 

"그 중국 학생 5명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데 한국어 수업도 하실 수 있죠?"

 

학생 하나 없이 밥값만 축내고 있을 때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들렸다. 중국 학생들이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데 가르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물론 그 전까지 중국 학생들을 학원에서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내게 중국어를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조금씩 가르쳐 보았을 뿐이다. 허나 그렇다고 '자신 없는데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부분 중국에서 보습학원이나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경우 한국어반을 개설해 놓기는 하지만 개설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한국 학생 한 명만 와도 받을 수 있는 학원비를 중국 학생을 받을 경우 더 많은 인원을 받아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경제 사정을 고려하여 중국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는 한국인 학생에 비해 수강료가 낮게 책정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장이 내게 한국어 반을 개설하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국어’에 대한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어 반이라도 맡아 ‘밥값은 좀 하라’는 이야기였다. 본래 내가 이 학원에 온 목적은 중국에서 자라난 한국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기 위함 아니었던가. 그런데 중국 학생 수가 한국 학생 수보다 더 많으니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잘릴까봐 새로운 수요를 끊임없이 고민하다

 

'이러다가 한 달만에 나가라는 소리 듣는 거 아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우연치 않게 새로운 시장에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내가 가르치던 중국 학생 중 한 명이 한국어를 제법 잘 하는 중국인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이 중국인이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한국어가 유창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외국인이 하는 한국어 발음이라 한국어를 가르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일요일에 시간을 내어 그 중국인이 가르친다는 한국어 반을 찾았다. 그는 근처 한 대학교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투자비용이 전혀 안 드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는데도 수십명이 와서 그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한 번 읽어주세요."

 

나를 자기가 하는 한국어 수업에 데려온 중국인이 교재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래도 얼마간 학원 선생을 했다고 내가 책을 읽는 순간 중국 학생들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 60~80년대 영화를 보면 영어 수업 시간에 발음이 무척 나쁜 영어 선생님을 보다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 영어 선생보다 더 발음 좋은 아이가 책을 읽을 때 보이는 아이들의 반응과 같은 것이었다.

 

이왕 온 김에 아예 중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쳐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중국 친구에게 말해 내가 한 번 가르쳐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30~40분 간 가르치면서 '아 이거 시장이 제법 크겠는데!'하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난 원장에게 가서 중국 학생들을 모집하겠다고 했다.

 

"제가 한국 학생이 얼마 없으니까 중국 학생들을 좀 더 모아보면 안될까요? 주말에 가서 보았더니 제법 학생이 많이 올 수도 있겠는데요. 제가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일하면 되니까 한 번 해보죠."

 

원장은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 이제부터 중국 학생을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허나 어떻게? 일단 중국 학생들에게 뿌릴 전단지를 만들어야 했다. 며칠간 여러 번을 쓰고 고치고, 중국 명문대에 다니는 원장 딸에게 메일까지 보내 전단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전단지를 들고 내가 있던 학원 근처에 있는 대학교로 갔다.

 

 

그때 당시는 이래 저래 쓴 돈이 많아 돈을 아껴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학원에서 대학교까지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가 다니기는 했지만 외곽 지역이라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택시는 우리나라 전철비보다도 쌌지만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택시비로 돈을 길에다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이 학교에 가 수업이 없는 오전에 그 대학교까지 걸어가 전단지를 뿌리기로 했다. 한 번 차 타고 가 본 기억만 있을 뿐 걸어가 본 적은 없어 제대로 가면 40분 가량 걸릴 길을 첫 날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물어 물어 국수 대학교(가명)을 찾아가 드디어 정문 앞에 섰다. 이제 들어가 전단지를 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드디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갈망하던 이 학생들이 모두 내게 올 것이었다. 그리고 일정 수가 넘어 학생 수가 우리나라 외국어 학원 인기 강사만큼 많아지면 학원측이 나를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미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전단지를 뿌려야 하는데 몸은 얼어 붙고

 

'그래, 이제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다가오는 중국 학생이 보였다. 그러나 그 학생을 향해 내가 내민 것은 전단지를 든 손이 아니라 멍한 눈빛이었다. 어쩐지 몸이 얼어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묘하게 자존심도 상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괜히 대학교 안을 둘러본다는 명목으로  빙빙 돌기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학원에 점심을 먹기 전까지 돌아가려면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를 어쩌지.'

마음만 자꾸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냥 갈까, 그래도 한 장이라도 돌리고 갈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계속 고민했다.

 

<6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위에 나온 이름 및 지명, 건물명 등은 모두 가명입니다.


태그:#중국, #양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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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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