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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자유무역협정) 협상과정에서 농업개방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논리 중 하나는 ‘농업을 희생시키는 대신 공업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면, 한국경제 전체적으로는 이득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논리이지만,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들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무굴제국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한때 명나라·청나라와 더불어 아시아의 대제국으로서 세계경제를 주도한 무굴제국(1526∼1857년)의 경험을 살펴보면, 농업 파탄이 농촌 와해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도시의 서민가계까지 와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르판 하비브(Irfan Habib)는 1963년에 인도에서 발행된 <인도 무굴제국의 농업 시스템>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경제적 침탈 이후 인도에서 발생한 농업과 도시경제의 관계를 다룬 적이 있다. 

이 책에서 하비브는, 농민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농민들이 토지에서 대대적으로 유리되기 시작했고, 이들이 도시 노동자로 편입됨에 따라 도시의 임금 수준이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지적했다.

농업과 도시경제의 이 같은 연쇄적인 악화가 무굴제국의 붕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하비브의 지적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농촌의 붕괴가 농민과 소지주들의 반란을 초래했으며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고 지적했다. 무굴제국에서는 민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데에 많은 군사적 비용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굴제국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의 경우에도 농업 개방이 농촌 붕괴로 연결되고 나아가 이것이 도시 서민경제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될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한국인들은 ‘농업이 개방되면 도시 서민들이 보다 더 싼 값에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서민 경제가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기대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농업 개방이 가속화되면 농산물 가격이 지금보다 더 낮아지기는 하겠지만, 도시 서민들은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에 당혹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삶의 터전을 상실한 대규모의 농민들이 도시의 공장과 점포 앞에서 ‘이력서’를 들고 서성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도시의 노동시장에서는 공급과잉이 출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임금인하 효과까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기존의 도시 서민 즉 도시 노동자들은 값싼 수입산 농산물을 사먹는 대신, 새로운 경쟁자들과 저임금의 출현 때문에 생활수준이 오히려 더 낮아질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식탁(값싼 외국산 농산물로 가득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도시 노동자들은 한숨과 시름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식후에 겪는 정신적 고뇌는 좀 전의 즐거움을 상쇄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위장장애’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정부가 아무 대책도 없이 농업을 개방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대책이 있다면, 농민들이 저토록 시장개방을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농업개방 이후 농민과 농촌을 살릴 만한 대책은 현재로서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물론 고급 유기농 등의 방법으로 농업경쟁력을 가질 수도 있다. 특화된 작물을 개발하여 외국에 수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한 것이고, 대다수의 소농들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일일 뿐이다. 그것은 몇몇 농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TV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이 사회복지제도가 발달한 나라라면,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시장개방으로 농업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안정적 궤도에 연착륙할 때까지 국가가 그들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강조하지도 않아도 충분할 만큼, 한국은 사회복지가 그다지 발달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이 사회복지에 관한 노하우가 일천하다는 점은, 단적으로 한국정부의 국민연금 운용능력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농업개방의 가속화로 농민들이 일터를 잃게 되면 그들은 당장에 사회불안세력으로 돌변할 것이며 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시 서민의 생계를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농촌의 붕괴는 도시의 불안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처리하기 위한 비용도 만만찮게 소요될 것이다. 그 비용은 모두 도시 서민들의 세금에서 충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 서민들은 농민들의 도시 유입 때문에 임금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사회불안의 처리를 위한 추가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이중고·삼중고를 안게 될 것이다.

한때는 세계적 경제대국이었다가 영국에게 시장을 내준 이후로 농업 경쟁력을 상실하고 급기야 나라까지 빼앗긴 ‘무굴’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느 나라에게도 ‘무굴’(無屈)할 수 있는 농업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그 경쟁력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시장을 개방한 뒤에 한국 농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안을 차근차근 모색해보자고? 그럴싸한 말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 시점에서 한국이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일단 시장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태그:#FTA, #농업개방, #무굴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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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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