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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부적들. 이 곳에 살고 있는 이는 과연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 입춘대길 수많은 부적들. 이 곳에 살고 있는 이는 과연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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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한창 짓고 있는 고층건물이 보인다.
▲ 모래내시장 저 멀리 한창 짓고 있는 고층건물이 보인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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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3차 25개 뉴타운 가운데 순우리말 이름을 붙인 곳이 단 한 곳 있다. 가재울뉴타운.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이라고 불린 이 동네를 지금 사람들은 '가좌동'이라고 부른다. 몇 년 뒤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할 이 동네는 서울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동네 중 하나다.

이 곳엔 명지대가 있다. 1991년 4월 26일 오후 5시 15분경 남가좌동 명지대 교문 앞에서 시위를 하던 강경대(당시 20세)가 경찰 쇠파이프를 맞고 숨졌다. 그 뒤 몇 달 동안 전국에선 분신 사태가 이어졌고, 나는 지방 어느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고 있었다.

옛날 일이다. 이제 남가좌동은 강경대의 학교인 명지대가 있었던 곳이 아니라, 초고층 아파트단지로 바뀔, 옛 기억을 지우는 동네일 뿐이다.

11월 중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어느 날 남가좌동을 찾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거리

2001년 5만3290명이던 남가좌동 인구는 올해 초 4만9163명으로 줄었다. 그동안 서울 인구가 계속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6년 동안 4천여 명이나 동네를 빠져나간 남가좌동은 남다르다.

여기엔 66년 만들어져 41년이나 된 모래내 시장이 있다. 붙어있는 서중시장은 73년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서중시장이 더 크지만, 흔히 두 곳을 합쳐 모래내시장이라고 부른다.

'모래내'란 명칭은 인근 홍제천 부근 바닥이 모래로 덮여있는 데서 비롯했다. 근처 다리 이름은 그래서 사천교(沙川橋)다.

현대화한 시장이 즐비한 서울에서 모래내시장은 무척 색다르다. 구불구불한 길, 바짝 붙어있는 가게들, 군데군데 박혀있는 기와집과 쪽방집들. 모래내시장에 들어서면 시계를 40년 전으로 되돌린 듯한 느낌이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장 양 옆으로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남가좌동을 구경하는 방법은 시장 입구에서 끝까지 가면서 골목들을 누비면 된다.

골목집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다

모래내시장 입구 쪽 가까이 있다.
▲ 카페촌 모래내시장 입구 쪽 가까이 있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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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단순한 담이 아니다. 고추를 키우는 훌륭한 밭이 되기도 한다.
▲ 담과 고추 담은 단순한 담이 아니다. 고추를 키우는 훌륭한 밭이 되기도 한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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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입구 근처에 카페촌이 보인다. 이렇게 따닥따닥 붙어있는 카페촌을 어디서 봤나 싶다. '야화' '토마토' '둥지' '프로포즈' 같은 이름들이 친근하다. 주머니가 부족해도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카페거리를 지나자 주택가가 나타난다. 골목이 시작하자마자 양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있고, 저 멀리까지 쭉 이어지는 곳도 있다. 가볍게 굴곡을 그리며 꺾이는 곳도 있다. 그렇게 각기 다른 골목에 차려진 집들도 모두 다르다.

골목집을 보면 사람 생긴 게 다 다르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아파트야 복사기로 찍어낸 듯이 집이 다 똑같지만 골목집들은 그렇지 않다. 대문·대문 지붕·창틀·지붕 등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어떤 집 대문은 봉 간격이 듬성듬성하고 어떤 집 대문은 봉 간격이 오밀조밀하다. 어떤 집 대문 위는 비어있고, 어떤 대문 위엔 배추가 심어져 있다. 골목과 집을 보면 주인의 마음씨가 드러나는 듯하다. 골목집은 곧 의인화한 주인의 마음이다.

창틀에 매달려 말라가는 야채,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장독대, 얼기설기 만든 철사줄로 적당히 안과 밖을 나눈 화장실 창틀 등 곳곳에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다.

골목이 푸근한 이유는 단지 옛집이 많아서가 아니라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붕이며 담이며 틈날 때마다 손을 봐야 하는 골목길엔 사람 손때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낙서조차도 골목길에선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8개 국어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 

이 곳 공중화장실에서 본 특이한 표지판.
▲ 미끄럼주의 이 곳 공중화장실에서 본 특이한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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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몸이 언 가운데 먹은 떡볶이... 맛있었다.
▲ 추위엔 떡볶이? 잔뜩 몸이 언 가운데 먹은 떡볶이...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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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을마다 특징이 있는데, 남가좌동에서 눈길을 끈 것은 공중화장실이었다. 관광지도 아닌데, 깔끔한 공중화장실이 보인다. 여기선 공동화장실 두 개를 찾았다.

공동화장실 입구엔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한글·영어·일본어·중국어 외에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네가지나 더 있다. 8개국어안내판이 공중화장실에 붙어있는 것도 독특하지만, 그 내용이 '미끄럼주의'라는 것도 재미있다.

혼자서 감탄하며 골목을 정신없이 누비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너무 추워요. 어디 분식집 들어가서 떡볶이 먹어요."

또 다른 일행이 '씩' 웃으며 "저두요" 한다. 그러고 보니 둘의 얼굴이 새파랗다. 바닥에 얼음이 얼어 있고, 이날 따라 바람도 강하다. 대략 잡아도 체감 온도는 -5℃다. 추위에 지친 둘은 가까운 아무 분식집이나 들어갈 태세였다. 급 제안을 했다.

"여기까지 와서 전국 어디나 있는 김밥 체인점 들어가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이 곳에만 있을 것 같은 분식집을 찾자."

그렇게 해서 15분 정도 헤맨 끝에 찾은 분식집. 내가 고집을 부렸지만 모두는 만족했다.

2년 전 이 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는 재개발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발이 되면 이 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반면 시장 가운데서 만난 빵집 주인 아주머니는 재개발을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암튼 잔뜩 웅크렸다가 먹는 떡볶이·순대·수제비는 맛있었다. 꿀맛이란 게 이런 맛일까?

끝까지 가봐야 끝을 알 수 있는 곳


모래내시장에 있다.
▲ 금성아파트 모래내시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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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좌동엔 유명한 건축물이나 유적지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골목길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특정 목적지를 방문하는 여행에선 가는 과정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기 위해선 길은 넓고 바른 게 좋다. 그래야 과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도변 식당이 점차 사라지고, 고속도로 휴게소가 번성하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

멀리 관광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여행이라면 골목 여행은 면 여행이다. 선과 선을 이어 결국은 동네 전체를 그려내는 여행. 미로와 같은 남가좌동은 면 여행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막힌 것 같으면서도 뚫려 있고, 뚫려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혀 있는 남가좌동 골목길은 재미있는 놀이터다. 그날 나와 함께 여행을 한 이는 두 명. 두 사람이 "이 길은 반드시 막혀있다"고 호언장담한 곳에 들어가 뚫고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저 멀리서 우두커니 되돌아나올 것을 기다리던 일행은 내가 꺾여서 사라지자 뒤따라오곤 했다. 오로지 끝까지 가봐야 막힌 곳인지 뚫린 곳인지 알 수 있는 곳, 남가좌동이 지닌 매력은 그처럼 은근하다.

발은 즐겁지만 이럴 때 난감해지는 것은 자전거다. 타고다닐 수는 없고, 어디다 묶어놓고 갈 수도 없다. 답은 하나. 끌거나 들고 다니는 것이다. 골목여행을 하면 자연스레 상체운동도 된다.(^^)

4시간 가량 다닌 이날 여행길에서 두 사람이 한 번도 투덜거리지 않은 것을 보면 자전거를 끌고 다닌 게 그다지 성가시진 않았던 모양이다(나중에서야 털어놓길 너무 추워서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단다).

골목여행에 나서기 전 나는 속도를 즐기는 편이었다. 출퇴근 시간 자전거 속도를 쟀고, 평속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가장 열심히 다니던 시절 자전거 평속은 23㎞ 정도였다. 지금 자전거 평속은 12㎞ 초반이다.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옛 기억을 깡그리 지우는 일과 개발

남가좌동 골목에서.
▲ 사물함 남가좌동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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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내시장에서.
▲ 오리 모래내시장에서.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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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휙휙 지나쳐선 골목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자전거 속도를 낼 때는 골목마을에 갈 때와 집으로 돌아올 때 뿐이다.

담길을 걷다보면 높이 자란 꽃이 담 너머 고개를 내미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골목이 궁금해 기웃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집 한 번 구경하라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소 삭막할 수 있는 시멘트마을이 화사할 수 있는 데는 이들 꽃 친구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날 모래내시장에선 오리가 시장 안을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을 봤다. 아마 어디서 살짝 빠져나온 모양인데, 시장 상인들은 숱하게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했다.

백화점에서 또는 할인점에서 오리가 시장 안을 걸어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우연히 또는 이벤트용으로 오리를 풀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모래내시장에서 오리는 아주 오래 된 식구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골목길 특징은 과거를 안고 간다는 점이다. 바닥과 벽을 보면 덧칠한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헐어내고 부수기보다 다독이면서 함께 간다. 벽돌길 위에 시멘트를 덮은 길, 시멘트 위에 다시 시멘트를 덧칠한 길, 골목길 길과 벽은 세월과 함께 두꺼워진다. 내치기보다 안고 가는 넉넉함을 골목길에서 본다.

결국 골목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곳에 있는 집과 길을 무조건 보존하자는 게 아니다. 옛 기억을 깡그리 지우는 지금 개발 방식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다. 과거가 사라져 결국은 얄팍한 현재만 남은 신식 동네. 어쩌면 현대인들이 한없이 외롭고 외로운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태그:#남가좌동, #모래내시장, #골목, #미니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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