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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이라크 중앙 정부가 한국의 석유 컨소시엄이 쿠르드 지방정부(KRG)와 계약한 원유 개발사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원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정부와 보수파가 그토록 강조해온 '파병 국익론'의 허상이 새삼스럽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올해 들어 이라크 중앙정부와 쿠르드 지방 정부 사이에 석유법(oil law) 및 석유 이권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이라크 석유부 장관은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원유 개발 거래는 불법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피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마치 자이툰 부대 파병을 통해 한국과 쿠르드 지방정부와의 원유 개발사업에 유리해진 것처럼 홍보해왔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라크 파병을 정당화하겠다는 욕심에 눈먼 나머지, 석유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중대한 문제를 간과하고 만 것이다.

 

자이툰 파병했으니 원유개발에 유리하다고?

 

문제가 된 곳은 이라크 북동부 쿠르드 지역의 바지안으로, 한국석유공사·SK에너지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11월 10일 쿠르드 자치정부와 계약을 맺고 이 지역에 대한 탐사광구와 생산물 분배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라크 중앙정부가 쿠르드 자치정부와 맺은 계약은 불법이라며, 이 계약을 취소하지 않으면 석유 수출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섬으로써, 오히려 한국의 석유 수급이 차질을 빚게 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라크 정부는 한국 기업뿐만 아니라, 쿠르드 지방정부와 계약을 맺은 영국과 호주 기업에도 같은 내용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외국기업이 쿠르드 지방정부와 맺은 계약을 불법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올해 이라크에서 수입한 원유는 3712만 배럴로 전체 수입량의 5.2%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한국 컨소시엄이 계약을 취소하지 않아 원유 개발 사업을 강행하고, 이라크 정부가 원유 수출을 중단하면 적지 않은 타격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쿠르드족의 독자 행보... 중앙정부의 강력 반발

 

기실 이번 사태는 석유를 둘러싼 이라크 종파간의 복잡한 갈등 구조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올해 2월 들어 시아파 주도의 중앙정부가 석유법 초안을 내놓으면서 잠복되어 있던 종파간 갈등은 표출되기 시작했다. 키르쿠크 등 원유 매장량이 풍부한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지방정부가 외국 기업의 계약 체결 및 수입 분배 등 석유 통제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원유 매장량이 많지 않은 이라크 중부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수니파는 중앙정부가 전체 이라크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공평하게 그 수입을 분배한다고 맞서왔다. 특히 외국 기업이 원유 개발을 주도하는 것은 이라크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국부(國富)를 외국 자본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라며, 외국 기업의 원유 개발사업 참여에 상당히 부정적이다.

 

후세인 축출 이후 중앙 권력을 장악한 시아파는 쿠르드족의 원유 통제권도, 수니파의 중앙정부에의 영향력 행사도 차단하려고 한다. 쿠르드족이 자치 지역 내 원유 통제권을 갖게 되면, 자칫 분리독립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한 시아파는 수니파의 영향력이 재건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석유 통제권에 대한 접근 차단을 삼아 왔다.

 

이러한 이견 때문에 이라크 석유법은 초안이 나온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석유법에 대한 종파간의 합의 여부가 이라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전망도 이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라크 중앙정부는 정부의 승인없이 외국 기업이 지방 정부와 맺은 계약은 모두 불법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쿠르드 지방정부는 ‘독자 행보’를 가속화해왔다. 쿠르드 지방정부는 이라크 석유법 제정이 지체되자, 지난 8월 독자적으로 지방 석유법을 제정하고 현재까지 외국 석유업체와 20여건의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중앙정부가 이를 불법으로 간주한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갈등이 커지자 쿠르드 지방정부는 12월 중순 최고위급 관리들을 바그다드로 보내 중앙정부와의 조율에 나섰다. 그러나 양측이 첨예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정책 조율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라크 중앙정부는 쿠르드 자치정부와 외국 기업이 맺은 계약은 모두 무효라는 입장을 거듭 천명하면서 계약을 맺은 기업들에 대해 원유 수출 중단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한국 석유 기업, 저항세력의 공격 대상될 수도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파병 연정'을 해온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은 '파병 국익론'의 핵심적인 근거로 이라크 석유 수급을 강조해왔다. 불법적이고 반인도적인 전쟁을 도우면서 석유 이권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갖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마저도 ‘실용’이라는 이름하에 묵살되기 일쑤였다.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대선 유세 때, 자이툰 부대의 파병 연장을 지지한다며 그 이유는 한미관계보다 석유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당선자는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그 곳(이라크 북부)이 기름밭 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가올 자원 전쟁에 대비해 파병 연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원유 수출 중단 경고 사태가 보여주는 현실은 자명하다. 한국이 침공의 당사자였던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곤 가장 많은 병력을 이라크에 보냈지만,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안정적인 이라크 원유 확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오히려 이라크 중앙정부의 잇따른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석유 컨소시엄이 쿠르드 지방정부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안정적인 원유 도입에 차질이 생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자이툰 부대의 주둔을 통해 쿠르드 지역의 원유 개발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고 홍보해왔다는 점에서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 석유 컨소시엄이 원유 개발 사업을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적지 않은 자본이 투자되었고, 개발 지역에 약 5억배럴의 원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 사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세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는 원유 수출을 중단하겠다는 이라크 중앙정부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중앙정부와 쿠르드 지방정부가 석유법에 합의하지 못하면, 원유를 채굴하더라도 한국에 들여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2003년 4월 미국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부터 2007년 4월까지 4년간 이라크 저항세력이 원유 시설을 공격한 횟수는 400회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수니파는 외국기업의 원유 개발 참여에 상당히 적대적이다. 원유 개발 사업의 안전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부와 국회는 '파병 실리론'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때마침 국회는 27일이나, 28일에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벌겨벗겨진 ‘파병 실리론’ 앞에서 국회가 어떤 선택을 할지 두고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정욱식은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라크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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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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