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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는 작지만 꽤 의미 있는 전시 4가지가 진행 중이다. '1,500년 전 울릉도-그 곳에 사람이 있었다'와 '때때옷을 입은 선비', '계룡산 분청사기', '푸르름 속에 핀 순백의 미(美)'가 그것이다. 그중 '1,500년 전 울릉도-그 곳에 사람이 있었다'를 소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입구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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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 : 1,500년 전 울릉도-그 곳에 사람이 있었다
- 전시기간 : 2007. 12.18(화)~2008.2.24(일), 69일간
-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고고관 특집전시실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첫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이때의 발굴 조사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적지에서 느끼는 것처럼 차라리 없었다면 더 좋았을 만큼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때의 유적 조사들이 후대인으로서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자취나 흔적을 통하여 역사와 문화의 원형을 찾는 순수함이 아닌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운 강탈과 도굴이 목적으로 보이는데다 의도적인 훼손까지 다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흙이 귀하여 돌을 이용하여 만든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고분인 돌무지무덤 대부분은 이때 마구 파헤쳐지고, 부장품인 유물들은 도굴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옛 우산국의 역사, 즉 울릉도만의 독특한 고분과 유물들은 그 흔적을 감추고 만다.

역사적인 사건, '천부리 2호분 발견'

우리나라의 울릉도 첫 유적 조사는 1957년 7월 8일, 국립박물관 조사단에 의해서다. 당시, 대구로 향하는 통일호에 몸을 싣고 대구에서 포항을 거쳐 울릉도에 들어가기까지 사흘 이상이나 걸릴 만큼 교통이나 환경 모두 열악한 가운데 이루어진 아쉬운 첫 유적조사였다.

그후 1963년. 1957년의 유적 조사 시 미진했던 부분을 재조사하고자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울릉도에 다시 들어간다. 이때 도굴되지 않은 고분 1기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울릉도 유적, 혹은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하는 '천부리 2호분 발견'이다. 울릉도와 통일신라시대와 관련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나 할까?

<1500년 전 울릉도,그 곳에 사람이 있었다>전시실 일부
 <1500년 전 울릉도,그 곳에 사람이 있었다>전시실 일부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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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과 유물 발굴 설명
 유물과 유물 발굴 설명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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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리 2호분의 발견으로 우리는 비로소 울릉도 고분의 특성을 알게 된다.

울릉도 고분들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것, 모두 87기가 있었다는 것, 지상위에 편평하게 기단을 쌓은 후 시신을 넣는 돌방을 만든 뒤 흙 대신 돌을 덮었다는 것, 고분 입구가 대부분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것, 고분의 전체적인 모양이 물고기 모양에 가깝다는 것, 아울러 출토 유물들이 담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역사 등.

이번 전시는 이런 고분 발굴 그 결과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아울러 서울대학교의 1998년 유적조사와 영남대학교의 2000년 발굴 조사 결과물까지 종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1500년 전 울릉도-그곳에 사람이 있었다'에서 어떤 유물들을 만날 수 있을까?

굽다리 사발, 굽다리 항아리, 유리옥 목걸이, 도장무늬 토기, 금동 제품, 철기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실 설명 중 통일신라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인지 유물들은 더욱더 낯익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통일신라와 울릉도의 유물

하지만 언뜻 그렇게 보일 뿐이다. 전시실 설명에 따르면, 울릉도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대부분은 7세기에서 10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유물들과 모양은 같지만 색깔이나 흙이 다르다고 한다. 이런 설명 때문인지 울릉도만의 특징인 '회청색 경질토기'들이 달리 보였다.

"…(중략)…그러나 대일 항쟁기에 채집된 짧은 굽다리 접시나 독도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손잡이 달린 굽다리 사발 등을 통해 볼 때 고분의 연대가 6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중략)… 고분과 토기에 있어 울릉도만의 특색을 보인다. 울릉도에서 발견되는 회청색 경질토기의 경우 경주에서 만들어진 신라 토기와 모양은 같지만 흙이나 색상 등에 차이를 보이는 것들도 있다. 따라서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신라 토기가 들어왔거나 울릉도에서 직접 만들어 썼을 가능성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 전시실에 걸린 안내문에서

울릉도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
 울릉도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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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
 울릉도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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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의 우산국 복속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에게 널리 불리는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란 가사 중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중략)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관련이 있다. (독도는 죽도 등 40여개의 섬과 함께 그때나 지금이나 울릉도에 포함된 섬이다.)

신라 제22대 왕인 지증왕(재위 500∼514년) 13년(512년) 6월에 신라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 나섰단다. 하지만 무력으로 쉽게 정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계략을 써서 정복하고자 계획, 나무로 사자를 만든 다음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가에 이르러 항복하지 않으면 여러 마리의 맹수들을 풀어놓겠다고 엄포를 놓았단다. 이사부의 이런 계략으로 신라는 우산국, 즉 울릉도를 얻는다. 이 정도가 우리 역사에 나타난 옛 울릉도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거짓이 아닌 이상, 이 이야기는 512년 이전 우산국에 어떤 강력한 정치 집단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계략을 짜야 할 만큼 막강한, 국가의 체계가 반듯하게 선, 신라란 나라가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그런 강력한 나라 말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 현재 1만여 명의 사람들이 60여종의 동물 및 750여종의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섬, 독도로 가는 마지막 전진기지요, 호박엿과 오징어를 떠올리게 하는 울릉도에 우리 조상들이 살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부터일까? 6세기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옛 울릉도는 어떤 곳이었으며 어떤 역사를 이어 왔을까?

아름다운 섬 울릉도로 가는 낭만적인 여행을 수없이 꿈꾸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울릉도의 역사를 처음으로 제법 오랫동안 생각하게 한 전시회였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25일과 12월 30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국립중앙박물관, #울릉도, #우산국, #역사와 문화재, #회청색경질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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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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