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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이튿날

심포항을 찾아갔다

항구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었는지

한창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폐선 몇 척만이

고아처럼 버려져 있는 부둣가는 한산하다

식욕 부진으로 떠도는 갈매기와

조개 파는 아주머니 서넛만이 분주할 뿐 

걸음을 멈추고 비켜서서  

그녀들과 손님들 간에 벌어지는 흥정을 지켜본다

이 아주머니들에겐

도무지 이데올로기가 없다

왜 새만금방조제가 환경을 파괴하는지

왜 새만금방조제 없이는

삶이 진척이 안 되는 것인지 따지지 않는다

백합 1kg에 만원

이것만이 그녀들의 가장 확실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것조차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기미가 비치지 않으면

곧장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수정해 버린다

그럼 9,500원만 내요

상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땐 얼른

개조개라든가 피조개 한두 개 따위를 덤으로 얹어준다

 

잠시 그녀들의 삶을 훔쳐보면서 생각한다

지난겨울,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얼머나 치열했던가를

종북파와 평등파

착한 보수와 나쁜 진보를 두루 섭렵하면서

서푼 짜리 이데올로기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던 일을  

언젠가 그대도 짬을 내어

이곳 심포항에 오면 저절로 알게 되리라

우리가 품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여기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치열함

오로지 그 한 가지 이데올로기만이 통용돤다는 사실을

그것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독단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받아들일 만하다 추종할 만하다

심포항 아주머니들의 이데올로기엔 무엇보다

덤이라는 타협의 여지가 있다

적당한 지점에서 상대를 받아들이고

적당한 선에서 자신을 접을 줄 아는.


태그:#심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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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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