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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형 떠나신 지가 14년째라고 한다. 거리가 멀다면 그 핑계라도 대지만 형이 잠들어 계신 망월동 묘역은 바로 지척이다. 기일 때 맞춰 절 두 자리도 못 올린 게으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대목이었다.

 

2월 17일 ‘민족시인 김남주 제 14주기 추모제’ 연락을 받고 망월동 묘역으로 길을 나섰다. 봄이 멀지 않았다지만 2월의 칼바람은 아직 매섭고 추웠다. 오전 11시 추모식이 열리려면 40여분 남짓 기다려야 할 터.

 

 

조화와 생화를 쌓아놓고 손짓을 하는 꽃가게 아줌마를 뒤로 하고 5·18 구묘역으로 들어섰다. 5·18 항쟁 당시 희생된 시신들을 매장하기 위해 급조됐다는 묘역. 곤봉과 군화 발, 총 칼에 무참히 희생된 가족을 손수레나 소달구지에 실어 허겁지겁 매장했고, 5월 27일 도청 마지막 항쟁 희생자들이 시청 청소차에 실려와 묻힌 곳이 바로 이 묘역이다.

 

5·18 항쟁 열사와 5월 항쟁 이후 민주화운동 투쟁 과정에서 산화한 열사들의 묘소가 이곳에 속속 안치되면서 망월동 묘역은 모란공원과 함께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5·18 국립묘지가 완공됨으로써 항쟁 열사들은 모두 신묘역으로 이장을 한 뒤 지금은 민주열사 36분의 묘소만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주형 묘소 앞에는 일찍 도착한 조화 바구니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4년 전 그날.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던 것 같다. 서울 강북 삼성병원에서 출발해 너덧 시간, 광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장지에 도착하니 빽빽하게 조성된 묘역은 이미 만원 사례였다. 그 묘역 가장자리, 깎아진 모퉁이를 언 흙더미 덧대 간신히 넓혀놓은 자리가 남주형 유택이었다. 9년 몇 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세상구경한 지 불과 다섯 해. 남주형이 자유의 콧바람을 만끽한 세월이라는 게 고작 5년 남짓이었다.

 

9년여의 세월, 그 모진 세월 누가 시킨다고 할 것인가? 군대만 가도 고무신 거꾸로 바꿔 신기 일쑤라는데 9년이라는 그 긴 세월 남주형 옥바라지로 청춘을 보낸 여인. 희로애락의 감정이 마치 탈색이라도 된 듯 광숙언니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무덤덤한 것 같이 보여 저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존경스런 마음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출옥 후 결혼을 하고 아들 토일이를 낳았다. 아빠를 닮아 까무잡잡한 피부에 똘망똘망한 눈동자, 어린 토일이를 봤을 때 “역시 피는 못 속여” 한바탕 웃었다. 아들 이름을 ‘토일’이라고 지은 것도 고단한 아빠처럼 살지 말고 아들만큼은 ‘금토일’ 평안한 휴일을 만끽하는 좋은 세상을 만나라는 아빠의 염원이었을 거라고 후배들이 깔깔거렸던 기억. 웃으면서도 뻐근해졌던 가슴이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세상을 밟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 귀한 아들도 얻고. 세속의 잣대로 따지자면 그만하면 살 만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감옥 밖으로 나온 남주형의 얼굴을 그다지 밝지 않았다. 형님의 그 암울했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시.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서른에서 마흔 몇 살까지

황금의 내 청춘은 패배와 투옥의 긴 터널이었다

이에 나는 불만이 없다

자본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겨

금방 이겨

혁명의 과일을 따먹으리라고는

꿈에도 생시에도 상상한 적 없었고

살아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나또한 혁명의 길에서

옛 싸움터의 전사들처럼 가게 될 것이라고

그쯤 다짐했던 것이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

…."

 

언젠가 남편 따라 찾아 가게 된 남주형 댁. 열 평도 안 되는 것 같은 좁은 목동 임대 아파트에서 뵌 남주형의 모습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그 날 두 남자는 민족민주전선의 암울한 현실을 고민했던 것 같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길 아닌 길을 버릴 수 있는 미망에서 깨어 나오는 길. 숱한 선택에서 두 남자의 고민은 깊어졌다.

 

서른에서 마흔 사이, 전사와 투사의 가슴으로 외길을 달려오다 만난 또 다른 세상에서 남주형이 겪었을 방황과 고통은 다른 이의 몇 배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깊은 시름에 잠긴 남주형을 위로하기 위해 형을 모시고 길을 나섰다.

 

후딱하면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후배가 뭔 재주로 승용차까지 마련했는지 차를 모는 남편을 보고 남주형은 신기해 하셨다. 여차저차 마누라가 장사를 하는데 물건 배달도 해야 되고 아무리 봐도 자가용 몰 것 같지 않은 형님 콧바람 쐐드리는 데도 활용하고. 다양한 쓰임새를 목청 높여 읊어대는 후배를 바라보며 “좋구먼, 좋구먼”을 연발하시던 남주형.

 

강화 들녘을 구경하며 꽃게탕도 드시고, 도토리묵, 파전에 막걸리도 걸치시고. 오랜만에 느긋한 휴식이 즐거웠는지 형은 그날 정말 유쾌한 표정이셨다. 그 날은 피치 못 할 약속 때문에 언니가 함께 오시지 못했지만, 앞으로 종종 두 부부가 만나 산천경계를 유람하자고 철석같은 약속을 주고받기도 했다.

 

남편이 늘 남주형, 남주형 부르는 것을 그대로 따라 나도 김남주 선배에 대한 호칭을 자연스레 남주형으로 굳히고 말았지만 남주형과의 면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주형 시집에서 혹은 구속자 소식지에서 남주형의 근황을 알았을 뿐 실상 남주형을 처음 본 것도 감옥에서 출소해 언니와 결혼식을 올리던 광주 무등산 ‘문빈정사’에서였다.

 

약혼자 신분으로 남주형 옥바라지를 했던 광숙언니. 당시 구속자 가족으로 민가협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던 내가 언니를 알게 된 계기는 소설가이자 교사였던 언니가 직업을 팽개치고 ‘민가협’ 총무로 상근을 하면서였다.

 

과묵한 언니는 말 대신 빙그레 웃음이 앞서던 사람이었다. 가볍지도 뜨겁지도 않았던 그 웃음. 아마도 그 웃음이 바로 언니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주형 시 속에 등장하는 언니.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 모든 여자들 중에서

첫 키스의 추억도 없이

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

 

그런 마음이었기에 1~2년 세월도 아닌 그 긴긴 9년여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주형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약혼자 신분의 언니도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는데 결혼하고 아이새끼 낳은 내가 고작해야 2~3년을 넘지 않은 서방 옥바라지에도 힘들다고 인상 박박 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언니 때문에 반성도 많이 했다.

 

 

암 중에서도 제일 악질이라는 췌장암. 형의 영혼과 육신을 좀먹어가는 그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잠시잠깐 통증이 가라앉은 시간에 형의 얼굴은 투명했다. 가뜩이나 까만 얼굴이 먹장을 입힌 것처럼 타들어갔지만 형의 가지런한 이빨은 언제나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처럼 빛나기만 했다.

 

"오 여보게 친구 우리 아기 좀 보게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호미를 쥐어줘야겠네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괭이를 쥐어줘야겠네

봄이면 들에 나가 나물이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가을이면 산에 올라 칡뿌리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콩나물 한 그릇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서울이 무서워서 그러네

별 하나 아름답게 키우지 못한 서울 하늘이 저주스러워서 그러네

…"

 

맑은 물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가까이 벗하며, 흙과 더불어 시골에 살았으면 좋겠다던 아들 토일이가 벌써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 아들에 대한 아빠의 간절한 소망을 아는 듯, 어린 토일이는 서울을 싫어했다고 한다. 엄마와 함께 강화 너른 들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며 건강한 청소년기를 보낸 토일이. 건강하고 듬직한 헌헌장부가 되었다고 한다.

 

"악몽

 

밤에 누가 문을 두드리면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고

내 머리는 순간적으로

체포

감금

고문

재판

투옥의 단어를 기계적으로 떠올린다

아 언제 나는 자유를 노래하고

감시의 눈을 의식함이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아 언제 나는 노동자를 두둔하고

자본의 보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 언제 나는 또 하나의 조국을 사랑하고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전사 김남주선배 아니 남주형. 이제 편히 쉬시라. 감옥 속에서나 감옥 밖에서나 체포, 고문의 악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형의 고통 훌훌 떨치시고 자유세상, 영혼의 안식을 깊이 누리시라.


태그:#민족시인, #김남주, #망월동 구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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