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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도로 중에는 아마도 15번 도로만큼이나 쉽디 쉬운 루트가 없을 것이다. 그저 태평양 연안으로 수백 km를 쭉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멕시코 서부 해안의 등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15번 루트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고민거리를 해결해야 했다. 고속도로를 어떻게 타고 가야 하느냐는 문제다. 당연히 엔진도 없고 사고 발발시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자전거를 타고 무턱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국도로는 길이 연결되지 않는다. 미국과는 또 달라서 멕시코 일부 도로는 국도 없이 고속도로로만 가는 길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고민에 앞서, 서부 해안의 주요 도시인 마사뜰란을 향해 출발하기 전 타코 3개로 배를 채웠다. 타코 가게 특징 중 하나가 물이 준비된 곳은 없다는 거다. 그것은 이를테면 목 마르면 물이나 음료수, 맥주를 사 먹으라는 얘기다.

 

멕시코는 물값이 석유값보다 비싼 나라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멕시코는 본래 산유국이다. 그래서 석유수출을 많이 한다. 하지만 휘발유는 수입한다. 왜냐하면 정유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SK에서 정유시설을 설치해 휘발유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석유보다 비싼 콜라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고서는 주행을 시작했다.

 

 

쿨리아칸을 벗어나는 길. 점심은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물과 함께 먹는다. 식사가 많이 부실해진 지 오래. 이젠 식빵에 잼 발라 콜라랑 먹는 것도 사치다. 언제부턴가 식빵에 잼을 바를 경우엔 그냥 물로,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식빵 그 자체만을 먹을 땐 콜라를 먹게 되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심산이다. 점심을 달랑 식빵 6조각으로 때우니 속이 속이 아니다. 설사가 일상다반사가 되고 속은 센 불 위의 스프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그렇게 다니니 힘차게 페달질 몇 번하면 배가 꺼지는 건 금방이다. 뭔가 뭉근하게 오래도록 남을 고기류를 섭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간단한 점심 식사 후 계속해서 지루한 길을 밀치고 나갔다. 한적한 도로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 연달아 꼬르륵 삼중창을 내니 배가 고파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았다. 더구나 주위엔 가게도 없을 뿐더러 이제 나에게 남아 있는 돈은 단돈 100페소(9000원). 이 걸로 최소 10일은 버텨야 했다.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나온 길이지만 그 길 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본능과의 대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배고픔과 맞서는 건 저급한 도전이야' 폄훼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인간의 본능에의 도전은 애초에 타협이 최선의 협상이다.

 

 

때마침 유일하게 보이는 농장이 있길래 무턱대고 들어갔다. 농장에는 사람들 몇 명이 석양을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자가 있길래 사정을 설명했다.

 

"아미고, 우리 농장을 찾아온 것을 환영하네. 난 페르난도(fernando)라고 하네."

그러더니 단박에 차에 올라타란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며 물어왔다.

 

"치킨 좋아해?"

'당신은 독심술을 가졌군요.' 때론 표정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침묵의 언어가 탁월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농장에서 십여분 정도 떨어진 마을로 데려가 노점치킨을 주문했다.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치킨을 바라보자니 절로 군침이 돈다. 가게 주인은 먼저 토르티야부터 내 주었다. 토르띠야를 먹기 전 손을 씻으려고 했다.

 

"손 씻을 곳이 어딘가요?"

주인은 가게 밖에 놓인 플라스틱 통을 가리켰다. 별 생각 없이 다가가 손을 씻으려 보니 탁한 물 위로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저 물에 어떻게 손을 씻는담?'

 

잠시 망설였다. 손을 씻고 나서 개운치 못한 느낌이 나진 않을까. 그래도 먼지 자욱한 손보다 못할까 싶어 통을 세워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끈적끈적한 미끄러움이 손에 남았지만 더 이상의 청결을 바라기엔 무리인 환경에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22마리의 파리들이 식탁과 음식들을 왔다갔다했다. 정말 비위생적이었다. 하지만 그깟 파리들 때문에 아쉬운 소리 할 수도 없었다. 대접받는 상황이니깐. 그저 손을 휘저어 반찬을 노리는 파리를 쫓아내기에 바빴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주문한 치킨이 나왔다.

 

역시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는 멕시칸 치킨(뽀요, pollo)은 폭풍감동이다. 한 끼에 반 마리가 나오는데 이것을 토르티야에 각종 야채를 더해 싸 먹으면 그 맛이 정일품이다. 눈 앞에 고기를 두고 너무 황홀해 하며 이제 본격적으로 맛있게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뒤로 차가 지나갔다. 그러자 먼지가 음식물 위로 쏴악. 기름에 한 번 칠해진 치킨은 먼지에 다시 한 번 칠해졌다. 아니, 이미 훈제되고 있을 때부터 지나가는 차들로 먼지범벅이 된 터였다. 그 치킨을 기름물로 씻은 손으로 먹고, 파리가 잠깐씩 앉았다 간 것을 먹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 먹는 것이다.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니 그래서 싫어? 기름물로 씻은 손으로 토르티야 집어서 파리가 잠시 앉았다간 야채를 얹어 먼지 뒤집어 쓴 치킨을 입에 넣기 싫다 이거냔 말이지?'

마음 속에 또다른 내가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단 거지.'

 

내 생각을 고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맛있게 먹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건 일단 배를 채우난 후의 일인 것을. 한 입 베어물 때마다 입 안의 미각세포들이 어깨 춤을 들썩들썩 추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 뼈에 붙어 있는 기름기까지 쪽쪽 빨아먹고 손가락에 기름기까지 한 번 더 핥아내고 페르난도에게 파르르 떨리는 격한 감정의 표현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도 당연히 내 심정을 안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반응해 주었다.

 

"1인분 더 먹을래?"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씨(Si)!" 한 마디 대답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는 거다. 페르난도는 이미 식사를 했다며 옆에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며 나에게 숫불 위에 구운 훈제 치킨 1인분을 더 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페르난도와 옆 테이블의 사람들은 뜻모를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친절하게 별종 취급하는 분위기다. 사람들이 내가 '치나'냐고 물어보기에 페르난도가 '꼬레아'라고 답한다.

 

이미 식사 중에 차들이 몇 번 더 지나갔기에 두 번째 나온 치킨은 아마 오염농도가 더 진할 것이었다.

'세포들아, 꼭 이겨내야 한다! 니들만 믿고 속으로 밀어 넣으마!'

 

이런 걸 대비해 A형 간염주사를 맞고 온 게 다행이었다. 첫 번째 때 이미 500ml짜리 병콜라 하나를 들이켜서 두 번째는 색다른 파인소다로 입가심을 했다. 두 번째 먹는 치킨도 역시 최고였다. 어찌나 한국 음식처럼 짭짤한 게 내 입맛에 그리 잘 맞는지. 두 번째도 남김없이 비워내고서 이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며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인사를 나누고는 느닷없이 50페소를 도네이션했다. 그의 이름은 앙헬(남미 이름이 그리 다양하지 못해 여행기에 나오는 이름이 중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하면 천사라는 뜻이다.

 

이 남자, 자신의 이름처럼 천사의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러자 페르난도 역시 한 번 책임진 사람 끝까지 간다라는 취지인지 치킨 2인분을 사 준 것도 모자라 40페소를 더 얹어주었다. 갑자기 이 장면에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야. 그런데 더욱 놀랄만한 장면은 바로 다음번에 나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식당 주인이 우리를 향해 크게 소리 지른 것이다.

 

"이봐, 이거 다 공짜야!"

 

그의 외침은 훈훈한 분위기에 화룡점정을 찍어버렸다. 아, 세찬 감동의 물결. 그렇게 길 위에서 급조된 천사, 세 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길 위로 나왔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친절이란, 장님에게 보이고, 귀머거리에게도 들리는 거라고 했던가.

 

그들의 작은 행동이 페달을 밟고 있는 지금 내게 인생의 소소한 아름다운 배려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 그곳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나는 자전거 여행을 통해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석양을 오른편에 두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다.

 

 

이제 날이 저물어져갔기에 멀리 불빛이 보이는 타운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오비스포(Obispo)라는 작은 타운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당연히 경찰서로 직행했다. 별 수 없었다. 카메라 값으로 재정을 다 써버려 최소한 대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무조건 버텨야 했다. 마침 거리에서 만난 한 중학생이 통역을 해 주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유학한 나름 브레인이다. 이런 촌에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소년이 있다니.

 

"이름이 뭐니?"

"헤수스."

"헤수스? 무슨 뜻이야?"

"예수라구요. Jesus."

 

이름이 예수란다. 깜짝 놀랐다. 카톨릭 국가이기에 지금껏 성서의 인물들과 동일한 이름들은 많이 봐왔지만 아예 이름이 예수라니. 괜히 녀석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쨌든 녀석의 도움으로 모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합의보고 경찰서에서 보금자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멕시코 경찰을 조심하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난 그들이 최소한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사람에게까지 무지막지하게 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지금껏 행동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성공. 이제는 경찰서가 당연히 내 숙소라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일단 짐 정리 후 샤워부터 하는 게 순서.

 

 

"저 샤워 좀 하려는데 비누 있나요?"

"비누? 잠깐만."

경찰은 잠시 창고로 들어가더니 비누를 꺼내왔다. 노란 세탁비누였다.

"이건 세탁비누잖아요?"

내가 비누를 옷에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말하자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반박했다.

"괜찮아. 옷도 빨고 얼굴도 닦을 수 있어."

 

마치 우리 할머니들의 말씀 "암상토 안 해('아무렇지도 않아'의 전라도 방언)"라는 구수한 사투리를 듣는 듯했다. 경찰은 태연했다. 내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자 경찰은 이번엔 샤워실로 들어갔다. 같이 샤워실로 들어가보니 바닥에 떨어진 비누가 있었다. 비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경찰 왈, "저거면 됐지?"

 

졌다. 그냥 아쉬운 대로 그걸로 닦기로 했다. 내 비누도 있긴 했지만 꺼내기 귀찮기도 했고 바닥에 떨어진 비누가 생각보다 쓸만했던 것이다. 세탁비누로는 제 임무대로 오늘 입었던 속옷과 양말을 빨기로 했다.

 

시원하게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바깥에 여자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듣자하니 치나(중국)에서 온 자전거를 탄 남자가 이 안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 듯. 여기 경찰서는 우리네처럼 멀리하거나 무섭거나 혹은 격리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방문하는 친근한 곳이었다.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파악할 정도로 한 가족 같은 시골동네라서 가능한 일이다.

 

샤워를 마치고 무슨 일인가 밖으로 나가보자 아이들이 날 보며 마치 신기한 것을 마주한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런 외딴 곳에 동양인이 오니 마냥 신기한가 보다. "사진 찍을래?" 애들한테 말했더니 꺄르르 웃으면서 다들 좋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아이들에게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걸 보고서 또 다들 좋아라 한다. 아이들과는 이렇게 작은 나눔도 행복한 시간들이다. 그런데 여자애들 뒤에 남자애들도 생경스러운 듯 이 장면을 수줍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한 여자아이가 물어왔다. "남자애들하고는 안 찍어요?" 그러자 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여자애들이 포복절도한다. 물론 나도 농담으로 그런 것이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남자애들도 무척이나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같이 사진 찍자고 권유하니 오히려 여자애들보다 더 수줍게 도망가 버린다. 사내자식들이.

 

한창 애들과 어울려 즐겁고 놀고 있는데 경찰이 나에게 물어왔다.

"식사했어?"

아마도 식사를 대접해 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두 시간 전쯤 페르난도를 만나 치킨으로 배불리 먹었던 터. 그렇다고 또 거절하자니 왠지 허전해질 것 같았다. 자전거 여행자야 먹어도 먹어도 뒤돌아서면 배고픈 인생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안 먹었다고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다.

 

착한 마음이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해. 저녁 먹었다고. 굳이 비열하게 거짓말로 배를 채울 필요는 없잖아. 너를 도와주려는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는 옳지 않잖아. 넌 충분히 거짓의 유혹을 극복하리라 믿어.'

 

그러자 나쁜 마음이 바로 반격했다.

'밤에 배고프면 어떡할 건데? 지금 경찰이 물어보는 건 저녁 먹었냐는 게 아니라 밤참 먹었냐는 거야. 시간을 봐. 식사의 개념은 저녁이 아니라 바로 밤참이라구! 밤참 먹었어? 안 먹었잖아. 거 봐, 괜찮아. 그냥 안 먹었다고 해. 넌 밤참 안 먹은 거야.'

 

두 마음이 혼란스럽게 판단을 흐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경찰에게 대답했다.

"배고파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이었다. 식사의 유무를 논하지 않고 그저 배고프다는 짧은 말로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경찰은 즉시 옆 타코집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평소 때 같으면 6개도 집어넣을 텐데 배도 그렇게까지 고프지 않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타코 2개에 음료만 시켜 먹었다.

 

이렇게 경찰은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간 나에게 비록 누추하긴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를 섬겨주었다. 다만 아이들이 원숭이 바나나 먹는 장면 쳐다보듯 식사 시간 내내 나를 주의깊게 쳐다본 건 나도 살짝 무안할 지경이었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담대함. 자전거 여행은 나의 부족하고 천박한 모습을 꾸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며 사람을 만나 교제하고 추억을 만드는 데 최고의 조건이 되었다. 어느덧 체면치레에 익숙한 한국의 문화를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맛있게 타코를 먹고 다짐했다.

 

'내 언젠가 한 번 반드시 어디에선가 아이들을 위해 파티를 열리라!'

여행은 이게 매력인 것이다. 배운 것을 실천해 볼 수 있는 것. 오래지 않아 내가 그들을 섬길 수 있는 때가 분명 있을 거라고 부끄럽지 않게 약속해 본다.

 

 

아침에 떠날 때 경찰이 새 화장지를 하나 챙겨주었다. 사람들이 이렇다.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하다 보면 짐가방에 뭔가가 잔뜩 들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미련 없이 버리려고 해도 물건 하나하나에 추억과 인심이 배어 있어서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니 가끔 지나친 무게로 힘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엔 돌고 도는 인생, 물건도 돌고 돌아야 한다는 철학으로 나보다도 누군가에겐 더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것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전달자일 뿐. 그 물건에 담긴 사랑과 정성을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전해주는 꿈의 메신저가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오비스포 경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일단 화장지는 앞 패니어에 넣었다. 그리고 식빵과 딸기잼을 샀다. 그래도 이번엔 속 좀 보호한답시고 1L짜리 우유를 사서 그 자리에 식빵 반을 잼발라 먹고 우유를 다 비워냈다. 모처럼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한 것이다.

 

마사뜰란까지 가는 길에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특별하다면 고속도로여서 자전거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을 경찰의 제지 없이 계속 간다는 정도? 고속도로에서의 문제점은 경찰의 비호 아래 무난히 해결된 것이다. 낮에도 남은 식빵 반과 음료로 때웠다. 비록 영양과 맛은 기대할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먹는 작은 빵 한 조각에 감사가 되는 마음을 철저하게 훈련받고 있었다.

 

한참을 건조하게 달리던 오후 늦을 때쯤이었다. 일이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뒤틀린 것이다. 안장 위에 있는데 금방이라도 설익은 소화물들의 불협화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간만에 속 보호한답시고 마신 우유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 빵만 먹어서 소화기관이 약해진 탓인지. 시간이 갈수록 고통의 농도는 점점 더 진해져 왔고 급기야 화급을 다투는 순간이 찾아왔다.

 

눈앞이 하얘지고 호흡은 막혀왔으며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급한 마음에 자전거를 도로에서 조금 여유 있는 자갈밭으로 끌고 와 얼른 세워놓고 밑도끝도 없이 화장지를 꺼내 풀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바지를 내리자마자 장렬하게 발사! 순간 진한 암모니아 냄새가 어찌나 향기롭던지 그만 그 향기에 취할 지경이었다.

 

배앓이를 한 번에 화끈하게 털어내니 모든 번뇌가 씻긴 듯 세상이 온통 내 것만 같았다. 마침 화장지가 떨어진 시점이었는데 정말 그 화장지를 아침에 안 받았다면 아찔할 뻔했다. 아마도 대형사고가 터져도 제대로 터졌을지도. 선견지명이 녹아든 경찰의 배려가 날 살린 것이다.

 

 

길 위에서 난 곧 죽을 것 같아도 살아날 방도를 발견했고, 이만하면 됐겠지 싶은 일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분명히 있었고, 사방이 다 뚫려있어도 가지 못한 길 또한 있었다.

 

길은 말한다.

 

"여행은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깨닫도록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준다. 동시에 그것은 네가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도록 때론 함부로 허락지 않는 일도 있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할 수 없으되 함께라면 너끈한 일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시험을 던지기 때문이다."

 

여행은 인생의 미니어쳐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오비스포#자전거#비전노마드#문종성#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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