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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핑 시장 매주 월요일마다 얼하이 북단 시골마을에 서는 장.
▲ 사핑 시장 매주 월요일마다 얼하이 북단 시골마을에 서는 장.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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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 사핑 마? (사핑 가나요?)”

제법 능숙한 척 중국말을 외쳐가며 버스를 탔다. 따리 고성의 서쪽으로 나와서, 월요일 아침마다 장이 선다는 사핑(沙坪)으로 향한다. 봉고차만한 버스에는, 타고 내리는 사람들과 이웃처럼 얘기를 나누는 차장 아가씨도 있다. 앉을 자리가 없으면 동네 삼류극장에서나 보던 간이 의자를 할머니들 엉덩이에 받쳐준다. 차창 밖으로는 펼쳐진 평야와 얼하이가 시합하듯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좁지만 제법 곧은 길을 가는데도 엉덩이는 들썩인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정겹고 편안하고 아늑하다.

사핑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띄는 건 빠빠(粑粑) 장사. 지난 저녁을 푸짐하게 삼겹살로 배를 채운 탓도 있지만, 오전 10시가 지나도록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골목길에서 파는 중국식(?) 아침을 먹어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으나 딸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데다 위생상태까지 불량하다 보니 아이는 식욕을 완전히 잃은 상태다. 먹성 좋고 비위 좋아 가리는 음식 없던 딸은 끼니 때가 되어도 배가 고픈 줄 모르겠다며, 신호체계가 마비된 지경에 이르렀다.

딸은 아빠를 실험맨으로 부추긴다. 비교적 먹성이 가장 좋은 남편은 중국식 호떡 빠빠를 하나 고른다. 꾀죄죄한 유리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인 빠빠는 딴에 또 두 가지 맛이다. 하나는 푸릇푸릇한 걸로 보아 야채 빠빠고 하나는 뭔지 모르겠다. 뭔지 모르겠는 빠빠를 고른 것은 순전히 지저분한 손이 덜 갔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시식을 한 남편의 표정은 제법 그럴 듯하다. 딸과 나는 한 점 얻어 먹어본다. 속에는 설탕이 꿀처럼 녹아 있고 아주 맛이 좋았다. 빠빠는 아예 딸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고 우리는 아침 끼니를 빠빠로 때우기로 했다. 야채 빠빠도 맛을 보니 향긋한 냄새가 괜찮다. 비교적 맛이 담백하고 깔끔한 게 간단한 아침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사핑의 빠빠는 우리 호떡보다 크고 두툼해서 씹는 맛이 좋다.

윈난의 빠빠는 지역마다 다르고 종류도 다양하다는 걸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리장의 빠빠는 단맛과 짭짤한 맛으로 나뉘고 색깔도 가무스름한 게 먹음직스럽다. 샹그릴라의 빠빠는 하얗고 바삭거리며 구수한 맛이 난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빠빠는 그곳 사람들을 닮은 듯하다. 투박하고 꾸밈없는 따리 사핑의 빠빠, 한결 다듬어진 듯한 리장의 빠빠, 잡스러운 맛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샹그릴라 빠빠.

 사핑 시장의 빠빠(위)
리장의 빠빠(아래 왼쪽)
샹그릴라의 빠빠 한조각(아래 오른쪽)
 사핑 시장의 빠빠(위) 리장의 빠빠(아래 왼쪽) 샹그릴라의 빠빠 한조각(아래 오른쪽)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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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은 이렇게

어느새 시장은 점점 활기를 띠며 사람들로 북적댄다. 벼슬 꼿꼿한 닭을 바구니에 앉힌 채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 고작 꿀 한 병만을 발밑에 내려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 절굿공이만큼이나 크고 굵은 향을 파는 할머니들, 파는 물건보다도 화려한 민속 의상이 더 눈길을 끄는 아가씨….

우리는 그들을 구경하지만 실은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아직 여행 성수기가 아니라 눈 파란 외국인들은 거의 안보였지만, 카메라 들고 입성 깔끔한 우리 가족이 외국인이란 걸 그들은 금방 알아본다. 호기심을 갖고 호의 가득한 웃음을 띠고 바라본다.

그럼 나는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한마디씩 날린다. '뚜어샤오치엔?'(얼마예요?) 그러다 코 꿰기 일쑤. 도자기 모양의 작은 목공예품이 한 쌍에 80위안(1위안=133원 정도)이란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돌아선다. 꼭 사려고 물어본 건 아니니까. 그런데 상인은 전자계산기를 들고 따라온다. 팔던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따라온다. 나는 당황한다. 계산기를 내 코앞에다 들이댄다. 원하는 가격을 찍으라는 거다.

늘 듣던 소리,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는 3분의 1이나 2분의 1로 깎아라, 그 조언에 충실하기로 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30이라고 눌러본다. 정말 이렇게나 깎아도 되는 걸까, 조금은 미안해 하면서. 그 상인, 잠깐 실망하더니 조금만 더 올려서 다시 찍으라고 적극 권유한다.

나는 흥정할 마음이 안 난다. 더 올릴 정도로 물건이 탐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50위안이나 깎아서 사자니 미안한 마음도 들고. 간곡하게 사양한다. 상인은 더 간곡하게 계산기를 들이댄다. 이 악물고 30을 다시 찍는다. 상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니면 말고, 독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오케이! 오케이! 다급하게 매달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그렇게 터득한 흥정법으로 난 제법 짭짤한 재미를 여러 번 보았다. 중국에서 물건 흥정만큼 재밌는 일이 또 있을까. 왜냐, 내가 부르는 값에 살 수 있으니까. 파는 사람 맘이 아니라 사는 사람 맘이다. 대신 속으로는 안 사도 그만이라는 배짱, 겉으로는 겸손하게 부탁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어느 정도 밀고 당기다가 아쉽지만 안 되겠다는 듯 돌아서면 두세 걸음도 떼기 전에 승전보는 울리게 되어 있다. 그 순간 물밀듯이 희열이 밀려오면서 절로 만세를 외치게 된다, 물론 마음 속으로.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제시하는 값을 점점 더 깎아내리는 배짱을 부리게 되고, 중국 사람들이 참으로 귀엽게 느껴진다.

내게는 빤히 보이는 걸 턱없이 가격을 높여 부르고는, 안 산다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히 깎아준다. 그들은 끈질긴 듯하지만 선선하고 마음 약하다. 그악스럽지 않고 순한 그들의 성정이 귀엽다.

결국, 나는 400위안이라고 부른 은(銀)불상을 130위안에 샀으며, 남편은 한자와 영어로 된 빨간 표지의 <모주석 어록>을 반 넘게 깎아 15위안에 샀다.

여행자의 피해 의식은 가라!

복작거리며 어지러워 보이는 사핑시장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차례로 둘러볼 수 있게 길이 갈라져 있고 섹션 나뉘듯 나누어져 있다. 야채상은 야채상끼리 육류상은 육류상끼리 잡화는 잡화끼리 모여 있다.

 버터를 꾹꾹 눌러주는 모습(왼쪽). 푸른 빛이 도는 것은 오리알인 듯(오른쪽).
 버터를 꾹꾹 눌러주는 모습(왼쪽). 푸른 빛이 도는 것은 오리알인 듯(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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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핑 시장에는 먹을거리도 많다. 사진을 다 올리지 못해 아쉬울 따름.
삶은 고기(왼쪽)와 약간 쌉쌀한 맛이 담백한 부침개(오른쪽).
 사핑 시장에는 먹을거리도 많다. 사진을 다 올리지 못해 아쉬울 따름. 삶은 고기(왼쪽)와 약간 쌉쌀한 맛이 담백한 부침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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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팡이가 잔뜩 피어오른 쉰두부. '코에서는 역하나 입에서는 즐겁다'는 간식으로 구워 먹는 쉰두부가 있다더니 아무래도 이 두부가 그 재료인 듯 싶다.
 곰팡이가 잔뜩 피어오른 쉰두부. '코에서는 역하나 입에서는 즐겁다'는 간식으로 구워 먹는 쉰두부가 있다더니 아무래도 이 두부가 그 재료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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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채도 울긋불긋 모자도 울긋불긋.
 야채도 울긋불긋 모자도 울긋불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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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재미를 주는 사진.  돼지 한마리가 그냥 통으로 꾸밈없이(?) 드러누워 있다는 것과 두 사람이 참 많이도 닮았다는 것.
 두 가지 재미를 주는 사진. 돼지 한마리가 그냥 통으로 꾸밈없이(?) 드러누워 있다는 것과 두 사람이 참 많이도 닮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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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을 파는 할머니들.
 향을 파는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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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 파는 아주머니. 옷이 더 눈길을 끈다.
 꿀 파는 아주머니. 옷이 더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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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일을 몇 알 사기로 했다. 윈난의 오렌지는 껍질도 물렁물렁 잘 까지고 우리의 한라봉처럼 달고 맛도 좋다. 오렌지를 집어들고 값을 묻는다. 2위안이라고 한다. 한 알에 2위안이라고? '타이꾸 에이러!' 비싸다고 외쳤다.

'야오피엔이이디엔바.' 깎아달라는 말을 빼먹을 순 없지. 오렌지 파는 중년의 아줌마는 씨익 웃는다. 깎아주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물건을 다 고르고 나서 흥정해야겠다고 속으로 벼른다.

오렌지 여섯 알과 사과 두 알, 바나나 한 송아리를 골랐다. 아줌마는 받아들더니 저울에 달고 나서 6.5위안이라고 손짓을 한다. 한 봉지 가득한 오렌지와 사과, 다닥다닥 붙은 바나나 한 다발이 겨우 6.5위안이라고? 나는 그제야, 중국에서는 과일을 저울로 달아 판다던 가이드북의 안내가 생각났다. 2위안이라고 했던 건 킬로에 그렇다는 거였다.

비로소 아줌마의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킬로에 2위안밖에 안 하는 과일을 비싸다고, 깎아달라고 했으니. 아줌마의 웃음은 아마 이런 의미였으리라. 이렇게 싼데 뭘 더 깎겠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중국말 연습 삼아 한번 해보는 거지?

한 봉지 가득 과일을 받아든 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아, 간절하게 외치고 싶은 말, '너무 싸요!'라는 말은 어떻게 하는 건지. 낭패다. 비싸다는 말만 쓰일 줄 알았지, 너무 싸다는 말이 이렇게 절실할 거라고 한 번도 생각 못했다.

이거야말로 여행자의 피해의식이다. 물정 모르고 물색없는 여행자들은 현지인들의 봉이 되기 십상일 거라는 피해의식. 낯선 곳에서 만만하게 보일까봐 방어하고 부정하는 말부터 익혔던 피해의식. 송구스럽고 고마운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아쉽게도 뻔하고도 의례적인 말, 시에시에뿐이었다.

 멋모르고 비싸다고 했더니 씨익 웃기만 하던 아주머니.
 멋모르고 비싸다고 했더니 씨익 웃기만 하던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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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핑장은 사람들로 더욱 북적댄다. 살 것은 없어도 가장 번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야채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야채를 파는 곳은 가지가지의 색들이 줄을 선 듯 뽐내고 있다. 마치 색색의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 같다. 게다가 울긋불긋 독특한 모자를 쓴 소수민족들로 가득 차 있다. 장터로 오는 길엔 내 마음이 흑백사진처럼 젖어들더니 이번엔 내 눈이 색채의 향연에 번쩍 뜨인다.

아, 이제야 알겠다. 소수민족들의 의상이 왜 그렇게 화려한지를. 얼하이의 물빛을 닮아 파랗고 태양빛에 익은 과일을 닮아 붉으며 바람결에 마른 야채를 닮아 푸르다. 그들의 옷은 물이고 구름이며 오렌지이고 사과, 또한 배추이고 홍당무다. 그렇게 그들의 옷은 자연과 생활과 맞닿아 있었다.

 다양한 야채들.
 다양한 야채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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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도 맛도 모르는 야채들.
 이름도 맛도 모르는 야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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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를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빠빠장사의 유리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여전히 남편은 아내가 반죽한 빠빠를 고소하게 구워내는 중이다. 누추하지만 예뻐 보인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인다. 삶의 위대함은 그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어느새 삼륜차가 줄줄이 서서 길을 메운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메롱 약오르지롱 하듯 혀를 내민 삼륜차를 타고 우리는 시저우 마을로 향했다. 컬러사진처럼 울긋불긋하던 사핑 시장이 다시 흑백사진처럼 아득해진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13일 떠나 중국 윈난을 여행하고 12월 24일 돌아왔습니다.



#사핑 시장#윈난 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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