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레이싱 더 플래닛: 베트남(Racing The Planet: Vietnam)

[셋째 날] 비, 안개 그리고 사람 : Ben Den - Sin Chai - Nam Nhiu - Nam Than - Nam Cang - Nam Sai

2008년 2월 20일,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우리가 밤을 지낸 이곳 캠프 지역은 잔디밭이라 밤에도 차가운 한기를 느끼지도 않았고 어제 오후부터는 날씨도 좋아져서 참가자들의 마음이 밝아졌다.

이틀간 고생한 나의 다리는 언제 부상을 당했느냐며 생기가 돈다. 물론 다리 전체적으로 많이 부어있기에 앉는 것이 부자연스럽지만 마치 오늘은 처음부터 뛸 수 있을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과 현실은 따로 놀듯이 출발선에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이내 나의 상태를 알 수가 있었다.

아침의 쾌변과 맛난 식사는 이미 늘어지고 찢긴 나의 근육과 인대에 더 이상의 도움이 되질 못했다. 단지 심리적인 안정감만 주었을 뿐이다. 출발 후 10여 미터를 왔을 뿐인데 나의 몸은 계속적인 대회 진행이냐 포기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다. 제대로 앞으로 못 나가고 주춤거리니 일본의 이소무라 할아버지가 '유상, 다이조부?'(괜찮아?)하며 걱정 어린 얼굴로 상태를 확인한다.

그동안은 어느 대회를 가건 68살의 이 할아버지를 내가 항상 챙겨주고 통역을 해줬지만 오늘은 반대로 내가 보살핌을 받는다. '뭐~다이조부데스, 이마까라 잇쇼니 하시리마쇼!'(이정도야 괜찮죠, 지금부터 함께 뜁시다!). 상황이 별로 안 좋지만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즐거운 듯 이야기한다. 몸은 분명 문제투성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마음이 가볍다. 지금 당장 포기를 해야 할지 말지 결정해야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생각이고 뭐고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기로 했다.

이소무라 할아버지와 짧은 대회를 나누며 긍정적 사고를 찾고 마음을 비워서인가? 기적같이 나의 다리가 자동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무슨 윤활유를 칠한 기계같이 관절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조금 전까지 포기의 갈림길을 방황하게 만든 둔화된 움직임과 통증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무슨 마약에 취했나? 갑자기 변화된 나의 신체 반응에 스스로 놀랍기만 하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뜀박질은 자제하고 스틱을 이용한 속보로 치고 나갔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더니 이제는 좀 살만하다고 참가자들과 '낄낄'거리며 길을 가고 있으니…. 주변의 동네 아낙들이 수줍은 듯 대문 뒤에 숨어서 손을 흔들어 준다.

.
▲ 연속으로 이어지는 진흙길 .
ⓒ 유지성

관련사진보기


오늘 가야 할 거리는 50km. 몸만 정상이다면야 상관이 없지만 현재의 상태라면 1000m 산을 두 번 넘는 코스가 결코 쉽지않을 것 같다. 특히 전체 코스의 절반인 25km 구간은 진흙밭이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경험했지만, 황토가 물을 먹으니 접착력이 좋아져서 일단 한번 빠지면 한발자국을 움직이는 게 힘들 정도로 신발 바닥에 붙어버린다. 발을 힘껏 빼내면 진흙이 심하게는 10cm이상 두께로 신발에 달라붙어 10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 느낌이다.

또한, 비 내리는 진흙밭은 스노타이어, ABS 브레이크 없이 전속력으로 빙판길을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몸의 중심이 높은 사람들은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기가 일상 다반사다. 가뜩이나 첫날 고생을 한 몸들이라 다리의 제어가 안 되어 온몸 구르기의 연속이었다.

.
▲ 상당히 인상적인 고산족 모습 .
ⓒ 유지성

관련사진보기


첫 번째 체크포인트까지는 중간에 물살이 센 강을 목숨 걸고 건너기는 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부터 산을 오르는 길이 시작되었는데 아주 사람을 잡는다. 수없이 깔린 진흙밭이란 지뢰들을 통과해서 전진하지만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날씨는 안 좋아지고 길은 험해지더니 급기야 안개와 비가 몰아친다.

두 번째 체크 포인트의 도착 제한시간은 6시간. 나름대로 부지런히 간다고 했지만 제한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제한시간 전 마지막 한 시간은 죽기 살기로 뛰다 걷기를 반복했다. 거미줄처럼 늘어져있는 안개를 헤치며 나가면 군데군데 낙오된 참가자 몇 명과 대나무로 만든 고산족들의 축제용 장식이 나타나 묘한 기분과 공포감을 조성한다.

몇 미터 앞도 안 보이는 뿌연 안갯속에 갑자기 어디선가 식인종이나 좀비들이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 정말 무서웠다. 대회 참가하기 얼마 전 좀비 영화 <아주 황당한 새벽의 아침>을 본 것이 괜스레 후회된다.

.
▲ 무서웠던 안개 숲 .
ⓒ 유지성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체크포인트를 8분 정도 남겨두고 가까스로 통과했다. 체크포인트를 통과했다고 길이 좋아지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내리막의 시작이란 점. 어차피 구를 거라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올라가는 것보다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는 중간 중간 고산족이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이전에 보지 못한 옷차림과 머리,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Red Dao(Zao) 사람들이라 불리는 부족이다. 미끄러운 진흙밭에서 연신 미끄러지고 구르고 있으니 재미난 듯 어린 아이들과 아낙들이 쫓아온다.

나는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리는데 그들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진흙을 타고 다닌다. 신기하다. 말은 안 통하지만 어쨌든 온몸으로 대화를 나눈다. 가지고 있는 과자며 초콜릿을 나눠주니 품 안에서 고깃덩어리를 건네 준다. 이럴 수가! 돼지고기 같은데 이건 완전 보약이다. 바쁠 때 일수록 돌아가고 쉬어 가라고 했지 않나? 가끔은 쉬어가는 지혜도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닐 때는 좋은 약이다.

스키 타는 기분으로 비탈을 내려가는데 앞쪽에 아트로포스 팀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여자 멤버인 '린다'가 무릎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팀원 3명의 모습은 그동안 얼마나 넘어지고 굴렀는지 불쌍한 마음이 들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이 팀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진통제를 나눠주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세 번째 체크 포인트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높은 곳을 지나자 안개가 걷힌 사이로 저 아래쪽에 계곡물이 흐르고 건너편에 산을 오르는 참가자가 보인다. 가야 할 거리를 따져보니 끔찍하다.

그런데 마지막 약 2Km 정도의 내리막, 이거 장난이 아니다. 너무나 미끄러워서 스틱으로 버티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팍팍' 돌아간다.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순간적으로 무릎이 돌아가면서 오른쪽 무릎 뒤쪽에서 '뚝' 소리가 들렸다. '악!' 소리를 내며 몸의 중심을 잃고 약 10여 미터를 미끄러지며 굴렀다. 정신을 차리니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겼지만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부상을 잘 몰랐지만 귀국 후 병원에서 전치 4주의 집중치료와 요양판정을 받았다.)

.
▲ 미끄러지고 구르고... .
ⓒ 유지성

관련사진보기


제한시간이 12시간이라 마음이 급하다. 아끼던 진통제 2알을 한꺼번에 먹고 나머지 구간도 미끄럼을 타고 계속해서 내려왔다. 중간 위험 구간은 진행요원이 로프를 설치하고 안전벨트로 연결해서 타고 내려올 정도였으니 코스의 난이도와 심각성은 이번 대회 최고였다.

아까 건너편에서 봤던 산을 기를 쓰고 오르니 세 번째 체크포인트인 학교가 나타났다.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육포와 과자로 약간의 배를 채우고 시간을 보니 제한시간까지 1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남은 거리는 12km. 코스도를 보니 초반 1km가 언덕, 나머지 10km 내리막, 마지막 1km 언덕. 생각해보니 내리막 50분, 오르막을 30분으로 해결하면 가능할 것 같다. 이것저것 계산해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일단 뛸 수 있는 데까지 뛰기로 했다.

'낑낑' 용을 쓰며 언덕을 올라오니 매끈하지는 않지만 포장된 도로가 나타난다. 정말 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이제부터는 쇼 타임이다. 뒤도 안 보고 거침없이 달리기만을 했다. 지나가던 진행요원들이 차에서 내려 나의 투혼에 박수를 보내준다. 결국 1시간 10분 만에 결승점에 도착했다. 골인점 앞에서부터 촬영을 하던 미디어 팀의 제이슨이 인터뷰를 요청한다. '음… 오늘은… 주저리 주저리 떠들고 마지막 멘트로 헝그리…'.

나중에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장에서 비디오를 보여주었는데 모두 배꼽 잡았다. 롱데이 코스 같이 긴 하루를 11:39:45에 마쳤다.

.
▲ 미끄러운 진흙밭 중심잡기 .
ⓒ 유지성

관련사진보기



태그:#베트남, #여행, #마라톤, #어드벤처레이스, #건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