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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못이 청송 주산지에 버금간다는 말에 넘어가

신록이 푸르르고 꽃이 피어나는 위양못
 신록이 푸르르고 꽃이 피어나는 위양못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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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서 밀양 시내로 들어오면서 문성남 해설사가 제안을 하나 한다. 시간이 있어 사명대사를 기리는 비석인 표충비를 보거나 밀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못인 위양못을 볼 수 있다고. 표충비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고, 위양못은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청송 주산지에 버금간다는 것이다. 차 안에서 토론을 할 수도 없고 손을 들어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한다.

오늘 함께하는 답사팀은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어서 표충비가 대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위양못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그동안 문화유산만 너무 봐서 이제는 자연유산도 한 번 보자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청송 주산지 정도 된다는 문 해설사의 밀양 자랑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경상도 말로 "그라모 한 번 가 보제이"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위양못 가는 길의 보리밭
 위양못 가는 길의 보리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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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못은 부북면 위양리에 있는 농사용 못(池)으로 경남 문화재자료 제167호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밀양 시내로 들어가 교동과 시청을 지나 58번 국도를 타야 한다. 부북면 위양리에 이르면 왼쪽으로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녹지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위양못이다.

가는 도중에 보니 밀과 보리가 많이 심어져 있다. 오래간만에 보는 광경이라 정겹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작물은 사람들이 먹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사료용으로 재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료용 목초 포장 방식으로 만들어진 하얀 둥치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양못에 울려 퍼진 밀양 아리랑

차에서 내려 위양못까지는 150m쯤 걸어 들어가야 한다. 5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보리밭 밀밭길을 지나간다. 현장에 도착하니 위양못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우릴 반긴다.

1634년 밀주(밀양)부사였던 이유달이 양민을 위해 쌓았다고 한다. 못 안에는 안동 권씨들이 세운 완재정이 있고, 못 주변으로는 미루나무, 이팝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농업용 외에 관광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개한 이팝나무
 만개한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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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팝나무 개화 철이라 하얀 이팝꽃이 초록의 이파리들과 정말 잘 어울린다. 더욱이 이팝나무가 물이 비쳐 보여주는 하얀 실루엣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이 깨끗하지 않아 그 반영이 주산지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물은 수량이 많아 들어오는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갈 때 깨끗한 것인데 이곳은 수량이 그렇게 많지를 않은 편이고 농업용수로 쓰는 물이라 수질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회원들 모두 물을 보며 완재정을 향해 왼쪽으로 한 바퀴 돈다. 정자에 오르니 넓은 위양못이 한 눈에 들어온다. 300~400m에 이르는 나지막한 산들의 검은 그림자가 물속에 어린다. 수면을 경계로 상하 대칭을 이룬다. 미술에서 많이 얘기하는 대칭(시메트리: symmetry)다. 정자는 사모지붕이고 마루에는 난간이 쳐져 외부와 구별된다.

정자의 실루엣: 오른쪽 기둥 옆 사람이 노래를 부른 문성남 해설사이다.
 정자의 실루엣: 오른쪽 기둥 옆 사람이 노래를 부른 문성남 해설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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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오르자 짓궂은 회원들이 문성남 해설사에게 밀양아리랑을 주문한다.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인 밀양아리랑을 이곳에 왔으니 꼭 들어야겠다는 것이다. 마음씨 착한 경상도 아지매,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 곡조 뽑는다. 그렇게 잘 부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설이 의미심장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노래가 끝나자 회원들은 모두 박수로 화답을 한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 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예림서원의 역사 속에 담긴 것

예림서원의 정문에 해당하는 독서루
 예림서원의 정문에 해당하는 독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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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못을 보고 나서 우리는 다시 밀양시 서쪽으로 나 있는 58번 국도를 따라 예림서원으로 향한다. 예림서원은 부북면 후사포리 173번지에 있다. 예림서원 가는 길에 우리는 영남 농업연구소를 만난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자연구소로 벼를 비롯한 곡물, 포도를 비롯한 과수, 배추를 비롯한 채소 등의 종자를 보존하고 개량하는 곳이라고 한다.

후사포리에 들어서니 비가림 시설을 한 포도나무가 줄지어 있다. 이곳 후사포리가 대표적인 포도 재배단지란다. 밀양의 대표적인 과수가 대추와 포도인데, 대추는 단장면에서 포도는 부북면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예림서원에 이르니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평일이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니 예림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독서루(讀書樓)가 보인다. 2층 누각으로 아래는 문으로 쓰이고 위는 시인묵객들의 독서공간으로 또는 시를 주고받는 풍류 공간으로 쓰였을 것 같다.

몽양재의 날렵한 모습
 몽양재의 날렵한 모습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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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루를 지나면 좌우로 몽양재(蒙養齋)와 열고각(閱古閣)이 보인다. 몽양재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집이라는 뜻이고 열고각은 옛 서적을 열람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공간에는 봄을 알리는 노란 들꽃들이 쑥쑥 솟아오르고 있다. 여기서 다시 계단을 올라야 서원의 중심건물인 구영당(求盈堂)에 이르게 된다. 이곳 구영당에는 옛 선현들의 글귀에서 따온 현판들이 여럿 걸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신재(日新齋)와 시민재(時敏齋)이다. ‘일신우일신’은 <대학>에 나오는 말로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시민'이란 때에 맞게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구영(求盈)'은 말 그대로 가득 참, 즉 완성됨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모두 어진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 현판에 새겨 학생들로 하여금 그 뜻을 되새기게 했다.

예림서원 현판: 극준조약무생과실
 예림서원 현판: 극준조약무생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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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밀양부사였던 이몽억(李蒙億)이 쓴 8자 문구는 이곳 예림서원에 모셔져 있는 김종직 선생을 위해서 쓴 글 같다. '극준조약무생과실(克遵條約無生過失)', 이것을 해석하면 '이치와 규약을 지극히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날 수 없다'는 뜻이다. 김종직 선생이 원칙에 충실하게 살았고, 그 때문에 잘못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곳 서원 명칭인 예림은 이 서원이 상남면 예림리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예림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인 1567년(명종 22) 부사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들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덕성동(현재 용활동)에 지었고 그 이름을 덕성서원이라 불렀다. 이후 1635년(인조 13) 서원이 퇴락하여 상남면 예림리로 옮겨졌고 그 이름이 예림서원으로 바뀌었다. 이 서원은 1680년(숙종 6)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졌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바 있다. 1874년 이곳 사림들의 노력으로 다시 건립되었고, 1985~1987년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점필재 문집' 목판
 '점필재 문집' 목판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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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 장판각에는 <점필재 문집> 책판과 <이존록>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25권7책으로 된 <점필재 문집>은 1497년(연산군 3) 조위의 편집으로 정석견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해 모두 폐기되었고, 1520년(중종 12) 점필재 선생의 조카인 강중진에 의해 다시 간행되었다. 이후에도 <점필재 문집>은 수정과 보완을 거듭했으며 이때 쓰인 목판들이 바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김종직은 어떤 사람인가?

김종직을 모신 예림서원 구영당
 김종직을 모신 예림서원 구영당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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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아버지 김숙자를 통해 정몽주로 이어지는 고려 성리학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또한 조선 전기 사림파의 종장(宗長)일 뿐만 아니라 영남 유학의 태두이다. 김종직은 성균사예를 지낸 아버지 선산인 김숙자와 어머니 곡산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밀양(부북면 제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유학을 배워 16세의 나이에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었으나 낙제(落第)하였다. 1457년에는 단종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조의제문'을 지었다. 그러나 145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도승지, 이조 참판, 한성부윤, 형조판서 등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사당으로 가는 길
 사당으로 가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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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부터 1480년대 초까지는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지방관을 거치면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불행도 겹쳐 세 아들을 모두 잃게 된다. 1482년에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한 마디로 불행의 연속이다. 그래서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제문'이 더욱 절절하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寂廖西閤 君其在玆
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衣衾盥櫛 象君平時
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飮食供具 亦且隨宜
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君昔劬勞 終無一兒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끝났구나.  執喪者誰 嗚呼已而

경북 고령에 있는 김종직 종가: 김호년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경북 고령에 있는 김종직 종가: 김호년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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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평 문씨와 다시 결혼해 늦게 아들을 하나 얻는다. 1489년에는 형조판서를 끝으로 은퇴하여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곳에 추원재(追遠齋)를 마련하고 살다 1492년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1498년 제자인 김일손이 자신의 '조의제문'을 사초로 채택한 일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김종직은 동시대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한 개혁적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소학>을 중심으로 교학을 펼쳐 많은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학에도 밝아 학문과 문장 모두에서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한 김종직이 태어나 죽은 고장이 바로 밀양이다.


태그:#위양못, #이팝나무, #밀양아리랑 , #예림서원, #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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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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