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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부역열호(不亦說乎).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님의 말씀이던가?

올해 나이 50세. 대학 2학년생 아줌마, 장남수 학생은 공자님의 '삼락' 중 하나인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2학년인 그녀는 70년대 원풍모방 노동자 출신이다. 매주 A4 4장 정도의 리포트는 기본이고, 한 학기에 과제로 내는 리포트만도 100여 장 가량, 그러나 그녀는 빡빡한 수업이 즐겁다.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많은 훈련이 될 거라는 기대에도 차 있다.

이번 학기에는 '자본주의의 이해'를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가 감성이 풍부해서이기도 하지만 논리적일 수밖에 없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감정이 복받쳤던 것은 남 다른 이유가 있다.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조건과 처지가, 자본주의 구조를 공부하며 머리와 가슴으로도 분명해지면서 회한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대학생들이 왜 어려운 경제사 공부를 권했는지 알 것 같다고 한다.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 장남수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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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에 인권이나 평화 등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이런 개념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은가를 깨닫게 되었고, '공부의 진정한 의미는 성찰'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딸(민혜인·고2) 또래 비슷한 학생들과 함께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다. '일이든 사람이든 꽂히면 몰두하는 성격' 덕분에 1학년 때는 과 수석을 차지해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성실은 노동운동가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지각 한 번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리포트도 미리미리 낸다.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아마 출석이나 수업태도 등 성실점수가 가산된 결과일 것이다.

70년대의 노동운동이나 운동가들을 '전설'처럼 배우는 학생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 또한 여성이요 어머니가 된 7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명예에 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젊은 학생들만큼 머리는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장씨는 생각했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입학전형 이외의 특혜는 없었으며 학생들과 똑같이 수업하고 평가받는다.

장남수는 경남 밀양군 상동면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그녀는 1973년 서울로 상경해 공장에 다니면서 한때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부활절 사건
1978년 3월 26일 50만여 명이 모인 여의도 부활절연합예배장의 새벽기도회에 6명의 노동자들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이크를 탈취한 사건이다. 당시 동일방직노조 탄압 등 노동 현안인  '노동삼권 보장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방림방적 체불임금 지불하라' 등을 외치다 구속된 사건이다. 언론 . 집회의 자유는 물론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완전히 막힌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으로밖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빚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명의 노동자(김정자 방림방적) (김지선 삼원섬유) (김현숙 남영나일론) (진해자 남영나일론) (정명자 동일방직) (장남수 원풍모방)가 구속되었다.

그가 원풍모방에 입사한 시기는 1977년 1월이다. 원풍모방은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 중 하나이고 이때의 노동조합활동 경험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1978년 4월 이른바 '부활절 사건'으로 구속되어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후, 노조 대의원으로서, 탈춤반 반장으로서 활동하다가 1980년 12월, 20여명의 노동조합간부들과 함께 '노동계 정화' 조치에 의해 계엄사에 끌려가서 해고되었다.

이들이 해고된 후에 어렵게 조직을 정비하여 지켜내던 원풍모방노조는 1982년 10월 1일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밖으로 강제로 끌려나오고 폭행당하며 강제 해산 당했다.

1982년 10월 1일 원풍모방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
▲ 원풍모방노조 강제해산 1982년 10월 1일 원풍모방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
ⓒ 원풍모방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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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노조 강제해산을 마지막으로 70년대 민주노조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해산 당했다. 그러나 군부독재의 탄압이 아무리 혹독해도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1984년 70년대 민주노조 주역들이 모여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했고,  장남수는 이때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의 기관지인 '민주노동'을 편집하는 등 노동운동을 계속해왔다. 84년 말에는 그간의 경험을 정리한 수기 <빼앗긴 일터>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장남수 지음 빼앗긴 일터
 장남수 지음 빼앗긴 일터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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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 8월 전국 노동자들의 들불처럼 타오르자 그녀는 투쟁 현장에 뛰어 취재를 하고 기관지의 기사를 썼다.  당시 거제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최루탄 파편으로 죽어간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노동운동의 큰 관심사업장이 된 대우조선 노동조합을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기록하기로 하고 88년에 거제도로 내려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우조선소 노동자들 주변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 일이 닥치는데 '글쟁이처럼' 기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거제도의 사람들은 현장으로 그녀를 불러들였고 '삼성조선노동조합 추진 공동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실무를 맡기도 하고 89년 초에는 대우조선 노동자들 10여명이 목돈을 거출해서 ‘일사랑 도서원’을 창립하여 실무를 맡기도 한다.

'일사랑 도서원'은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 와서 책도 보고 소모임도 하고 현장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명실공히 노동자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일사랑 도서원'을 통해 노동자들이 모이고 결속력도 강화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보아온 당국에서 '일사랑 도서원'의 운영위원인 노동자들을 '불온서적 소지'·'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하면서 도서원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원래 내려갔던 목적과 달리 거제도의 대우조선 해고 노동자와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결혼을 하게 되고 '거제도 사람'이 된다. 이후 복직되지 못한 남편의 생업을 따라 2006년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 오기 전까지 몇 년간은 거제경실련 사무국장 일을 맡아서 해왔다. 광명시에 오게 된 후에도 '광명경실련' 일을 하다가 2007년 3월에 성공회대에 입학했다.

왜 그 나이에 대학공부의 필요를 느꼈는가? 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그동안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할 때 뭔지 딱 집어서 얘기할 수 없지만 목에 턱턱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쌓은 지식들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체계화 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식인들이 어떤 이론을 내놓으면 감으로는 분명 아닌데도 경험으로만 쌓은 지식으로는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노동운동의 수많은 역사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거나 때로는 왜곡되어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 체계화 된 이론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명분 저변에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오랜 한과, 지적욕구에 대한 갈증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오게 하는 동력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대학에 들어온 그녀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지식의 확장을 통한 풍요로움도 느끼고 있고, 그동안 쉬지 않고 일만 해 오다 비로소 휴식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현장과 동떨어진 채 책상 앞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관념적인 주장을 펴는 먹물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지나온 삶과 학문의 태도에 기대되는 바가 크다. 갱년기인 그녀가 열아홉, 스무 살 청춘으로 돌아가 행복해 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교정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도 그녀는 자신 딸 또래인 동급생들이 언니, 이모, 선생님, 누님 등 다양한 호칭에 명랑하게 대답하고 즐겁게 웃는다. 술자리에서는 그녀한테 "왕 누님!"이라고 부르는 교수도 있다고 한다.

녹음 짙은 캠퍼스에 젊은 지성이 상큼하다.


태그:#장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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