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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은 가축이라기보다도 전략물자였다.
▲ 말. 조선시대 말은 가축이라기보다도 전략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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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아가 있었다. 나라의 말을 관장하는 관서다. 임금이 타는 말을 비롯하여 군사들이 타는 말 등, 말에 관한 총괄부서다. 당시 말은 교통 통신 수단뿐만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전략물자였다. 때문에 말은 누구나 함부로 기를 수 없었고 병조에 소속되었다.

사복시는 업무 특성상 말을 기르고 번식시켜야 하기 때문에 전국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세종 때 53개에 불과하던 목장이 성종 때는 87개로 증가했으며 인조 때는 100여개로 불어났다.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말 목장이 늘어났다면 가상한 일이지만 이유는 딴 곳에 있었다. 말을 기르는데 초지가 필수라는 이유로 광활한 토지를 차지한 사복시는 그 땅에 말을 기르며 콩과 보리 등 곡식을 심고 목화를 경작하는 이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 '사복시 제조 2인중 한 사람은 의정이 겸임한다' 라고 명문화 되어 있다. 이것을 빌미로 3정승과 6판서는 사복시 제조에 눈독을 들였다. 목장에서 경작한 곡물을 착복할 수 있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복시는 황금알을 낳은 거위였다. 노비를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추수한 수확물이 바리바리 올라오니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복시 제조 중 1인은 의정으로 한다' 라는 경국대전을 깼다. 영의정 신흠과 우의정 김류가 제조를 겸임했다. 이에 젊은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이들을 두둔했다. 병조판서 산하에 있어야 할 사복시 수장이 탐욕에 눈이 어두운 정승들이 버티고 있으니 종마 실적은 미미했고 영이 서지 않았다. 이에 편승하여 목장 감독을 겸임하고 있는 지방수령들은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제삿밥에 눈이 어두운 관리들

조정에서 전국의 목장에 대한 감사를 했다. 제주 3개 읍 중, 정의는 마적 정수 미달이었고 대정은 암말 4백 53필에서 새끼 번식 겨우 79필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란을 겪으며 관리의 허술한 틈을 타 진주의 흥선도, 고성의 해평, 동래의 오해야의 목장에는 백성들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강화에서는 더욱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강화 진강목장은 기름진 땅이다. 굶주린 백성들이 생존을 위하여 야금야금 농사를 지었다. 목장 터가 줄어든 것에 위를 느낀 강화유수가 목장에 담장을 둘렀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나라에서 짐승은 귀하게 여기고 사람은 천하게 여긴다."

그러나 인조는 백성들의 소리를 외면했다. 방책을 더 튼튼히 하고 좋은 말을 길러내라고 격려했다. 이곳이 바로 궁중 마를 길러내는 내사복시 산하의 목장이었다. 내사복시는 임금이 타는 말을 길러내는 특권과 임무가 주어졌다. 의전용으로 쓰일 녀석은 의젓하고 잘생긴 놈을 길러내야 하고 비상시에 쓰일 녀석은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길러내야 했다.

임금과 세자가 궁을 나서면 의전용 말 이외에 비상용 말이 따라 붙였다. 말 그대로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말이다. 의주부윤이 보낸 전령이 타고 가는 말은 평범한 말이다. 세자가 보낸 밀사가 탄 말은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다. 더욱이 전령은 매 30리마다 있는 역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쉬어갔다. 반면에 밀사가 타고 간 말은 매 백리 어름에 있는 역참에서 물을 먹이고 곧바로 출발했다. 밀사가 타고 간 말은 내사복시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말이었다.
압록강에서 바라본 백마산성
▲ 백마산성 압록강에서 바라본 백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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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위태로운 사나이를 살려낸 소현은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 전, 통군정에 올랐다. 통군정은 의주성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자리 잡은 정자다. 평양 연광정, 강계 인풍루, 안주 백상루와 함께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정자이긴 하지만 그들 정자처럼 놀이를 위한 정자라기보다도 전략적 요충이었다.

백두에서 출발한 강남산맥이 판막령과 대성령을 만들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고 멀리 서해 용암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눈앞에는 압록강의 작은 섬들이 조개껍질처럼 엎어져 있고 백마산성이 손에 잡힐 듯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청나라의 구련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해남 토말에서 시작한 반도의 끝점이 아닌가. 여기에서부터 되짚어보면 반도의 시작점이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시작점이며 끝점이다. 강을 건너면 대륙이다. 대륙과 반도가 조우하는 지점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대륙과 반도. 의미 없이 생각하면 똑같은 땅이지만 소현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겨레가 저 강을 건너 대륙으로 뻗어나갈 때는 반도(半島)가 섬이 아닌 대륙이었고 강을 건너 밀려들어왔을 때는 도리 없이 갇혀 반도가 아니라 섬이 되었다. 서글픈 일이지만 신라 통일 이후 오늘날까지 현실이지 않은가?"

깊은 상념의 젖어있던 소현의 시선이 위화도에 꽂혔다.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개성에서 발진한 원정군이 머물던 곳. 장마비속에서 15일간을 머물며 심사숙고 했겠지만 이성계 장군이 회군하지 않고 요동으로 진군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나간 역사를 가정해보는 것은 자유이나 오늘날에 시사 하는바가 컸다.

우리의 나아갈 길은 대륙이다

"둘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요동의 주인이 되었거나 한반도가 대륙의 일부분이 되었거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온 몸이 돌처럼 굳었다.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군사들은 왜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렸을까? 좋다. 침공군을 통과 시키고 후방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병법이라면 산성에 들어간 군사들이 왜 나오지 않았을까?”

“청나라 군대가 두려워서 산성으로 도망갔고 청군이 무서워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지 않았는가? 전쟁이란 모름지기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한 싸움이다. 군대가 동등하거나 힘의 균형이 갖춰져 있을 때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전쟁이다. 우리의 강한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 주었다면 저들이 압록강을 넘어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소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요동의 주인이 되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심양으로 끌려가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삼각산에 머물던 구름이 압록강을 건너 대륙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길은 대륙이다. 하지만 대륙에는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청나라가 있다. 그들과 맞붙으면 꼭 이겨야 하고 승리는 우리의 생존문제다. 이기지 못하면 최소한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선택은 단 하나다. 힘을 기르는 길 밖에 없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소현은 통군정의 대들보를 바라보았다. 여느 정자나 누각과 달리 2중 대들보였다.

심양고궁에 있는 홍이포. 당시 홍이포는 오늘날의 미사일처럼 최신 무기였다.
▲ 홍이포 심양고궁에 있는 홍이포. 당시 홍이포는 오늘날의 미사일처럼 최신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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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대들보 하나로도 누각을 지탱할 수 있지만 2개로 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방책이다. 나라의 안위도 2중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를 요새화하자는 조정대신들의 생각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방어 개념이 아닌가?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다. 우리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저들의 홍이포에 무너졌지 않았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목도가 쳐놓은 동궁 경비망을 뚫고 잠입해 들어온 군기시 제조의 은밀한 속삭임이 떠올랐다.

"제주도에 표류한 서양인을 도성으로 압송해 별조청에서 홍이포를 시험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약이 조금만 젖어도 불발이 됩니다. 이것만 해결하면 홍이포를 여러 개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지금 현재로는 막막합니다. 저하께서 심양에 돌아가시거든 비법을 알아봐 주십시오."

특급 군사 비밀이다.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나가사끼로 향하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타고 가던 배가 풍랑에 난파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한양으로 압송했다. 한양에 도착한 그는 박연이라 개명하고 명나라에서 들여온 소형 홍이포 조작술을 조선군에게 교육하며 홍이포 제작에 매달리고 있었다.


태그:#홍이포, #말, #사복시, #군기시, #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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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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