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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닐곱 살적 우리 동네(전체 55가구)에는 '개똥이', '소똥이'로 불렸던 고만고만한 애들이 많았다. 6.25 전쟁이 끝난 오륙년 뒤라 소위 '베이비 붐' 세대였다. 조그만 마을에 동갑내기들이 열다섯이었다. 아이들이 흔하다 보니 개구쟁이 짓도 많이 했고, 그만큼 마을 어른들에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다.

 

"너, 원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걸핏하면 집안 어른들은 놀렸다. 그러면 주워온 아이 당사자는 울며불며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재미를 붙인 어른들은 조무래기들을 놀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마을 동갑내기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로 취급당했다.

 

근데, 한 번은 내 사촌이 그런 어른들의 말을 진짜로 믿고 일을 저질렀다. '우리 엄마' 찾으러 간다고 괴나리봇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멀거니 방안에서 자고 있을 아이가 없어지자 새벽부터 집안어른들은 사촌을 찾으러 부산을 떨었다.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원다리 부근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사촌을 찾아서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다리 밑에서 주워왔으면 어쩌나, 진짜 엄마를 찾아가야 하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유년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원다리'는 영산만년교(靈山萬年橋)다. '만년교'는 너비 3m에 길이 13.5m, 높이 5m이다. 개울 양쪽의 자연암반을 주춧돌로 삼아 홍예(虹霓)라는 반원형 아치모양의 구조를 걸쳤다. 무지개다리 홍예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좁도록 다듬은 화강암을 반원형으로 쌓아 다리의 무게가 옆으로 작용하게 한 구조물이다.

 

양쪽에 놓인 다리 벽은 자연잡석을 쌓아 메웠으며, 홍예 머릿돌 위에는 제법 큰 정형의 각석을 배열했다. 홍예 석축 위는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돌들로 쌓인 부분은 개울 양쪽의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반원형곡선은 물 위에 뜬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다리다. 홍예는 우리나라에서 무지개다리나 석빙고의 천장을 만드는 데도 사용됐다.

 

 

 

13세 소년이 썼다는 석교비에 따르면, '만년교'는 조선 정조 4년(1780) 석수장이 백진기(白進己)가 처음 이 다리를 만들었으나 정축(丁丑)년 대홍수 때 그만 떠내려가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고종 29년(1892)에 현감(縣監) 신관조(申觀朝)가 석수장이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남천석교를 중건하면서 '이 다리가 만년을 갈 것이다'하여 '만년교'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 하여 '원다리'라고도 불리는 만년교는 선암사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와 흥국사 홍교(虹橋, 보물 제563호), 벌교 홍교(虹橋, 보물 제304호)와 더불어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희귀한 유구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교 구축기술을 보이는 예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함박산 약수터' 초등학교 때 단골 소풍장소였다. 거기에 가면 으레 어른들은 소주대병과 큰 주전자를 덤으로 안겼다. 약수를 떠오라고. 소풍을 마치고 약수를 담아서 이 '원다리'를 건널 때 참 신기하고 웅장했었다. 그런데, 다시 찾아보니 만년교는 작은 하천에 조그만 다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교는 영남 최초로 삼일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으로, 고향의 자존심이 담겨있는 아름다운 다리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종국 기자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현재 창녕부곡초등학교에서 6학년 아이들과 더불어 지내고 있으며, 다음 블로그 "배꾸마당 밟는 소리"에 알토란 같은 세상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산만년교#만년교#홍예#석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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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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