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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0일~13일 자전거로 안데스를 넘어가는 과정을 전합니다.

18시 30분. 입김나는 어둠이 도로 위로 출근하고 있는 안데스의 오르막에 잠시 멈춰서서.

29 커브길 올라가는 길
 29 커브길 올라가는 길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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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지친다. 네버엔딩 오르막인가?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올라왔구나. 29커브길만 올라가면 된다더니……. 떡 달라는 호랑이라도 있었으면. 하하. 가자! 올라가자!' 

여행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K방송사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특별 고객이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단순한 행동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물어보기'를 통해서 생각보다 쉽게 자신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에게 '물어보기'가 이제 남사스럽지(창피스럽다의 경상도 사투리)않다면 그만큼 마음이 열렸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자유분방하고 필요 이상의 긴 답변 후에 자신에게 그 이상의 질문을 할 경우에도 차분하게 듣고 웃으며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귀안에는 인내심이, 마음속에는 넉넉함이 자라났다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눈 감고도 안다는 투로 알려준 길에 도착했는데 '헉'이란 말이 절로 나올 경우에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운전자는 너무 빨라서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며 그냥 한번 웃으며 왔던 길로 다시 핸들을 돌릴 수 있다면 '다른 상황에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다.

아, 이제 살았다! '칠레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세움 간판이다. 국경지대 도착! 기쁨도 잠시, 온 몸이 서서히 안데스의 밤 공기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눈 위에서
캠핑을 고의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정규야, 이건 아이다! 이건 아닌기라!' 
라고 몸과 마음과 머리가 일제히 외친다. 흔하지 않는 일인데, 그래, 이건 아닌가 보다!  

칠레의 국경에서나 볼 수 있는 방문을 환영한다는 표지판이다.
 칠레의 국경에서나 볼 수 있는 방문을 환영한다는 표지판이다.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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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쾅쾅 찍어 주나요?"
"아니요."
"네? 그럼 도장은 어디서 받나요?"
"더 올라가야 해요."
"네? 얼마나요?"
"차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터널이 나와요."

현재시간 19시. 입김 공장 풀가동. 차로 30분 거리가 300분 거리처럼 느껴진다. 그냥 오늘은 여기서 자고가자! 마침 사무실 직원이 건물 밖에 서있다.

"저기요, 혹시 건물 안에 캠핑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없는데요."

아, 없단다. 9톤 트럭이 5-6대는 넉넉히 주차할 만한 공간에 조나단과 내가 잘 곳은 없단다. 사무적으로 말하는 그의 말 한마디는 차가운 물 한바가지가 되어 심장을 후려치는것 같았다. 없다니까 없다고 했겠지, 그래. 아직 힘이 있잖아! 가보자! 터널을 향해!

두 갈래 길 중에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세관이다.
 두 갈래 길 중에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세관이다.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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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요?"
"아르헨티나요. 저기 터널은 더 가야하나요?"
"여기서 기다리면 차를 잡아 드릴게요."
"음…. 오늘은 피곤해서 그러는데 저기 사무실 안에서 자고 가면 안될까요?"
"네, 물론이죠!"

분홍색 목도리에 머리에 딱 맞는 연한 푸른색 털모자를 쓴 미소 가득한 여자친구, 앞 머리가 없을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 부분이 갈매기처럼 보이는 덩치 좋은 남자친구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오케이란다. 오케이!

필자에게 잠자리를 허락한 친구들
 필자에게 잠자리를 허락한 친구들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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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올라가자 트럭들에게 서류를 받고 확인 후에 통과시켜주는 곳이 나타났고,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날 불러세웠다. '피로에 장사없다?'고 나도 모르게 도움을 청했는데, 흔쾌히 그들이 받아준 것이다.

작은 사무실은 조나단 같은 여행용 자전거가 20대 정도 주차할 만한 공간이었다. 입구 좌측에는 한 명이 잠시 누워서 쉴 수 있는 담요가 몇 장 깔려있는 긴 의자, 우측에는 조나단만 겨우 주차할 만한 공간, 앞 쪽에는 노트북을 두 대 올릴 만한 사무용 책상과 몇 개의 회전의자, 그리고 조나단 바퀴 하나보다 조금 작은 이동형 가스 난로가 안데스의 밤을 지켜주고 있었다.

경찰과 아두아나 직원들은 함께 일하며 08시-16시, 16시-24시, 24시-08시까지 3교대(10일마다) 근무를 한다. 필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친구들은 16시-24시 팀이었고 여자친구 1명, 남자직원 3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아까 필자가 문의했던 그 아래의 큰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사진 찍기 좋아하던 아두아나 친구들과
 사진 찍기 좋아하던 아두아나 친구들과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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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매기 머리 친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든다.

"음… 어르신들은 한국전쟁 때 많은 도움을 받아서 고마워하고 계시고(필자가 만나온 어르신들의 경우), 젊은 사람들은 소고기 문제로 싫어하고 있어요."
"한국경제는 어때요?"
"콜라 500ml 한 병에 얼마죠?"
"한 800원 정도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여기가 더 좋네요!"
"빈부격차는 어때요?"
"여기는 엄청 차이가 심해요. 아까 지나온 스키장 같은 곳은 저희는 못가요."
" 네…. 가격이 미쳤어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비싼 스키장의 숙박비에 불평하는 필자를 보고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아두아나 사무소  여직원과 함께
 아두아나 사무소 여직원과 함께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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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먹어요."

아래 건물에 음식을 가지러 간 친구가 하얀 휴지에 포장된 무언가를 건넨다. 빵이다! 다 식은 빵 위에는 미안할 정도로 엄지 손가락 두개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많은 양의 고기들이 휴지 디딜틈 없이 쌓여있다.

"당신은요?"
"괜찮아요, 그냥 먹어요."
"네…."

혼자만 먹는게 좀 그랬지만, 일단 먹고보자!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대사관에서 무료로 제공받은 <한국의 문화상징>이란 13분 길이의 DVD를 함께 봤다. 다들 유치원 아이들에게 만화영화를 틀어준 것 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른 나라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뒷돌기 하면서 칼 끝에 살짝 꼽혀있는 사과를 차는 태권도 소개 장면,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는 불고기 소개 장면, 누가 봐도 아름다움을 절로 느끼게 하는 한복 소개 장면에서는 서로 "저거봐! 저거!"를 연발하면서 흥미로워했다.   

친구들이 준비해 준 저녁
 친구들이 준비해 준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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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던 문제의 복장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던 문제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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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교대할 시간이,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간다.

"우리 사진 찍어요. 밖에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이거 태극기 좀 잠시 들어줄래요?"

밖에 나서자마자 안데스의 밤 공기는 필자의 몸에 '감전 댄스'를 신청하고 멈췄던 입김 공장에는 빨리 일을 하라고 난리다.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손에 묻은 추위를 털어내며 삼각대의 다리를 하나씩 내린다.

"하하하하. 아니, 이 친구들이! 봤구나! 봤어!"

고개를 들자마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 2006,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상징적으로 나오는 '성조기를 꽂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잖아요! 무릎을 더 구부리고요, 앞 사람 어깨를 잡아야죠, 도와주는 것처럼요! 자아 다시!"

나름 자세 지도를 한다고 했는데, 필자가 타이머를 맞추고 달려가는사이에 다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세는 자유 분방하게 되어버렸다. 아무렴 어떠리요. 그렇게 안데스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고 친구들은 숙소로, 온도는 영하로 내려갔다. 필자는 사무실의 긴 의자에 슬리핑 백을 펼치고 다음 교대팀과 조금 이야기 하다가 꿈나라로 출발했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
ⓒ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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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명장면을 패러디 해보았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명장면을 패러디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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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여행기 용어설명(자료출처: 네이버 국어사전과 필자의 머리세상)

감전(感電)댄스: 감전(感電)은 전기가 통하고 있는 도체(導體)에 신체의 일부가 닿아서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는 것을 말하며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화상을 입거나 죽기도 한다. 이에 아이디어를 얻어서 전기가 아닌 추위에 감한(感寒)되어 온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춤에 비유했다.

입김 공장: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필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

희망 여행 노트
1. 이동경로.  
Rio Blanco -> Portillo (고도 3200미터 / 밤에 영하 10도라고 함.) 
2. 주행기록.
주행거리: 29.98km / 주행시간: 4시간 24분 / 평균속도: 6.6km/h
3. 사용경비: 11,100 PESOS (1U$ = 500 PESOS)
어제 숙박비: 7,000, 어제 저녁: 4,100(콜라 600포함) 
4. 음식
아침: 빵, 햄, 커피
점심: 고기 맛 컵 라면
저녁: 빵2, 커피
간식: 물2통, 오렌지 4개, 사과1, 호두 1봉지  
5. 숙소: 아두아나 사무실 안의 긴 의자
6. 신체: 전체피로, 허벅지 근육통, 무릎 통증(살짝 눌러도 아프다)
7. 위생: 양치만
8. 길 정보: 29커브 오르막, 터널 3-5개, 경사 제법, 밤에 영하 10도라고함. 

희망여행 카페: www.kyulang.net

희망여행 저서: 대한민국 청년 박정규의 “희망여행”


태그:#안데스, #PORTILLO, #자전거세계여행, #자전거세계일주, #남미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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