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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천연두를 앓은 것처럼 곰보자국이 선명한 쉰음산 정상
 마치 천연두를 앓은 것처럼 곰보자국이 선명한 쉰음산 정상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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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쉰음산은 두타산의 한 줄기인데 왜 굳이 다른 산 이름을 붙였을까요?"
"산봉우리 너른 바위에 이렇게 마마자국이 많아서 특별히 붙인 이름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십정이라고 하지만 이게 어디 50개만 되겠습니까? 작은 구멍들까지 합치면 수백 개도 넘을 것 같은데요."

두타산을 오르는 길에서 만난 쉰음산(670m)에서 일행들이 나눈 말입니다. 오십정(五十井), 50개의 우물이라는 이 봉우리의 넓은 바위는 마치 천연두라고 앓은 것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패여 있어서 곰보자국들이 선명했습니다.

10월 16일, 100대 명산 중에서도 특별한 기대감으로 찾은 두타산은 역시 우리 일행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기대 이상의 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단풍이 현란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침 7시에 서울을 출발한 산악회가 대절한 관광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시로 들어섰습니다. 동해시를 벗어난 버스는 곧 천은사 입구에서 우리들을 내려주고 무릉계곡 입구에서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돌계단도 철제 사다리도 없는 두타산 등산로는 비단길

산행은 천은사 뒤쪽으로 열린 계곡 길로 시작되었습니다. 천은사 뒷마당에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지요. 골짜기 산길 곳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등산로를 다듬는 일손들이었습니다.

병풍 같은 모습의 바위
 병풍 같은 모습의 바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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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오르시는군요. 힘드실 텐데."

일하는 분들에게 “수고하십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지나는 일행들에게 그들이 걱정을 해줍니다. 높은 산이어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저 사람들 멀쩡한 산길을 왜 파헤치고 있지?”
“그러게 말예요, 저렇게 산길을 손대기 시작하면 또 돌계단이나 잔뜩 만들어 놓을 텐데.”
“어디 돌계단뿐이겠어요? 철제 사다리며 나무 사다리도 만들어 놓겠지요. 모두 자연 훼손일 뿐인데.”

등산객들은 지레 걱정을 합니다. 요즘 어느 산에서나 너무 쉽게 만나는 돌계단과 나무나 철제사다리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등산객들은 대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계단길을 싫어합니다. 인부들에게 물으니 산길 공사는 국유림관리사업소에서 시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발 공연한 시설 만들어 놓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을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산길은 싱그러웠습니다. 두타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아직은 사람들이 손대지 않은 자연 등산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니까요. 어느 곳 하나 위험하거나 깎여나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요.

“두타산 등산로는 비단길입니다. 비단길. 이렇게 높고 유명한 산에 계단 하나, 철제 사다리 하나 설치 된 곳이 없다니.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은 텐데.”
“정말 이만하면 비단길이 맞네요. 더구나 흙길에 적당히 아기자기한 바윗길도 있고, 더구나 사람들이 설치한 계단이 없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두타산 정상에서 청옥산으로 이어진 능선 풍경
 두타산 정상에서 청옥산으로 이어진 능선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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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라오던 여성 등산객 두 명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몇 사람이 두타산 등산로를 ‘비단길’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제발 돌계단이나 철제 사다리 같은 인공시설물을 만들어 놓지 말고 자연 상태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오르막 산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지요, 가이드가 ‘깔딱고개’라고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1시간쯤 올라 당도한 곳이 쉰음산이었습니다. 쉰음산은 특별히 정상이 불쑥 솟아올랐거나 능선이 다른 산이 아니었지요. 그냥 두타산의 한 줄기였습니다.

너른 바위봉우리가 천연두를 앓았을까, 온통 곰보자국이네

그런데도 굳이 쉰음산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 부르는 것은 정상의 너른 바위지대가 온통 곰보자국처럼 크고 작은 수많은 구멍이 파여 있었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50정과 쉰음산, 50이라는 숫자가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관성이 많은 산 이름이 분명했지요.

쉰음산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일품이었지요, 뒤쪽의 두타산 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옥산과 그 아래쪽으로 펼쳐진 능선과 골짜기가 비단결 같았지요. 두타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가에 쌓아 놓은 돌무더기는 무슨 제단 같기도 하고 작은 성벽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쉰음산에서 잠깐 쉬며 간식을 먹고 다시 정상을 향했습니다.

길가에 솟아오른 병풍 같은 바위 모습에 감탄을 하며 잠깐 오르니 또다시 가파른 깔딱고갯길입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모두들 헉헉 몰아쉬는 숨소리가 백두대간 중에서도 주봉에 해당하는 두타산을 실감케 했지요.

능선길에서 만난 곱게 물든 단풍
 능선길에서 만난 곱게 물든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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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정상은 얼마나 더 올라야 하는 거야. 30분이면 오른다더니 30분 지난 지가 언젠데.”

산악회 쪽에서 안내할 때 쉰음산에서 30분만 오르면 두타산 정상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을 걸어도 정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산행시점부터 정상까지 1200미터나 됩니다. 한두 시간에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에요. 대개의 산들은 산행시점이 꽤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이 산은 다릅니다. 우리들이 시작한 천은사 아래쪽은 해발 150여 미터 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오르막길은 더욱 가파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참을 오르니 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정상과 쉰음산, 그리고 두타산성으로 내려가는 갈래길이었지요. 그곳에 산행을 안내하는 후미대장이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상까지는 앞으로도 40여분은 더 올라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자신 없는 분은 여기서 두타산성 쪽으로 내려가십시오.”

힘겹게 이곳까지 올라온 몇 사람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앞으로도 40여분을 더 올라야 한다는 정상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선두 그룹은 이미 정상을 거쳐 박달령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지요.

곱고 화려한 비단결 같은 산자락의 단풍 풍경

우리 일행들은 정상까지 오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전망 좋은 바위에서 바라본 풍광이 일품이었지요. 두타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박달령을 거쳐 청옥산까지 이어진 모습은 병풍을 둘러친 모습이었지요.

비단길 같은 소나무 숲속 등산로
 비단길 같은 소나무 숲속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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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저 단풍 좀 보세요? 얼마나 고운 모습인지, 노랗고 붉은 비단 치맛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네요.”

옆에서 바라보던 여성등산객이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병풍능선에서 줄줄이 흘러내린 산자락을 곱게 물들인 단풍이 정말 곱고 화려한 비단 치맛자락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쪽은 약간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적당한 위치에 밧줄이 걸려 있어서 오르고 내리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약간 험한 길이면 으레 철제 사다리를 만들어 놓은 다른 산들보다 이렇게 밧줄만 걸어 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기도 했지요.

정상에 오르니 먼저 오른 몇 사람이 쉬고 있었습니다. 제법 넓은 정상 공터에는 작은 바위들이 몰려 있는 위에 ‘두타산 1353m’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표지석 근처에 봉분이 큼직한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히야! 놀랍구만, 1353미터 산꼭대기에 무덤이라니? 저 무덤 과연 조상을 위해 이 높은 곳에 모셨을까? 아니면 자신과 후손들이 복 받으려는 욕심으로 이 높은 곳까지 모시고 올라왔을까?"

두타산 정상 풍경, 옆에 무덤의 귀퉁이가 보입니다
 두타산 정상 풍경, 옆에 무덤의 귀퉁이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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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서있던 등산객 한 사람이 혀를 끌끌 찹니다. 두타산이라면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명산인데 이 높은 산꼭대기 정상에 무덤을 만들어 놓다니? 아무래도 결코 바람직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저쪽 박달령으로 내려가면 또 40분에서 한 시간 가량 더 걸립니다.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으니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다가 두타산성 쪽으로 해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십시오.”

어느새 쫓아 올라왔는지 삼거리 갈래 길을 지키던 후미대장이 다시 빠른 하산길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후미대장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의 말대로 삼거리를 거쳐 두타산성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지요.

“웬 사람들이 그렇게 생고집을 부리는지 원! 오늘도 잘 못하면 서울에서 지하철 막차 놓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우리들보다 20여분이나 늦은 등산객 다섯 명은 고집을 꺾지 않고 박달령으로 향했다며 뒤좇아 내려온 후미대장이 투덜거리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도 경사는 급했지만 험한 곳은 없었습니다. 가끔씩 만난 길에 자갈을 깔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은 신비감을 더해 주었지요. 내려오는 길에서 잠깐 쉬다가 삼거리에서 뒤돌아선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두타산성
 두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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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으셔서 힘들지 않은 모양이네요?”

자신이 없다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삼거리에서 돌아선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젊다니 조금 놀랐지요. 70대 노인이 두 분 보이기는 했지만 오늘 등산객들 중에서는 우리 일행들의 연령대가 높아 은근히 걱정하며 올랐던 산행이었으니까요.

젊어 보인다는 말에 기분 좋아진 일행들

그 아주머니에게 우리들이 젊어 보이느냐고 물으니 자신보다 한참 아래일 것 같아 보인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셨느냐고 물으니 1949년생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행들보다 3~4년 아래인 셈입니다.

“허허 젊어 보인다니 기분은 좋지만 사실은 우리들이 아주머니보다 몇 살 윕니다.”
“나보다 많다고요? 에이! 거짓말, 한참 아래 동생들 같은데요, 뭘?“

아주머니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일행들은 은근히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지요.

“우와! 저 바위절벽들 좀 봐? 중국의 장가계 저리가라구만”

다시 하산을 재촉했습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아래로 내려갈수록 태양은 산 너머 쪽으로 더욱 빠르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무릉계곡이 가까워오자 경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골짜기를 타고 오른 하얀 절벽엔 희미한 물줄기만 보였지만 비라도 많이 내리는 날이면 장관을 펼쳐보였을 폭포였습니다. 골짜기 맞은편의 바위절벽들도 층층이 바라보이는 모습이 정말 중국의 명승지인 장가계가 부러울 것 없는 절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산성 바로 밑에 있는 좁은 바위사잇길
 산성 바로 밑에 있는 좁은 바위사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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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과 기암괴석, 층층단애를 이룬 절벽과 우거진 숲이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풍광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주차장에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는 다른 등산객들 때문이었지요. 부지런히 내려가다가 두타산성에 올랐습니다.

바위절벽 위에 흔적만 남은 산성은 신라시대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둘레가 250미터나 되었었다는 석성은 조선 태종 때 삼척부사 김맹손이 다시 쌓은 것이라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이 지역 피난민들과 의병들이 왜병과 맞서 싸우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함락당한 슬픈 전적지이기도 합니다.

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서는 산성 바로 밑에 곧바로 서있는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이 아주 이채로운 모습이었지요. 맞은편 산록에 자리 잡고 있는 관음암이 숲속에 숨어있는 모습이 고즈넉한 풍경입니다. 산성에서 내려서면 바로 무릉계곡입니다.

중국의 명승지 장가계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절경 무릉계곡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인 무릉계곡은 고려 충렬왕 때 이 산에 들어와 은둔생활을 했던 이승휴가 중국의 무릉도원 같은 선경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삼척부사 김휴원이 역시 같은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는 말도 전해지지요.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무릉계곡은 정말 이름처럼 아름다운 계곡이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가 만난 금란정은 날아갈 듯한 모습이었지요, 금란정 옆에는 검은 색 바위에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 쓴 초서체 글씨가 현란한 모습입니다

삼화사 보광전과 불상
 삼화사 보광전과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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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래 무릉계곡 입구에 있는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던 글씨인데 조선시대 한석봉, 김정희와 함께 4대 명필로 불렸던 양사언의 글씨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사언이 강릉부사 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절경에 반하여 무릉반석에 새긴 석각은 오랜 세월과 개울물에 씻겨서 마모가 나무 심하여 1995년에 이를 본뜬 석각을 금란정 옆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금란정에서 양사언의 글씨를 감상하다가 내려오는 길에서 삼화사를 만났지요, 삼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선덕여왕 11년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라 불렀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1905년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지요.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 옛터인 이곳으로 이전한 절입니다.

절집은 조용한 모습이었지요,  몇 사람의 등산객들이 대웅전인 보광전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삼층석탑 뒤로 바라보이는 보광전 옆에 서있는 불상이 인상적이었지요. 절집을 나서 부지런히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깊은 산골의 가을해는 어느새 산 너머로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격한 감정을 드러낸 말싸움으로 개운치 않은 산행 마무리

버스 옆에는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있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낯설어 보입니다. 그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일어서자 산악회 사람들이 안절부절하는 모습입니다. 아직 몇 명의 회원들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정상에서 후미대장의 충고를 무시하고 다른 길로 간 사람들이었지요.

무릉반석 골짜기
 무릉반석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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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30여분을 기다린 후에야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는 산악회 총무의 얼굴은 싸늘했습니다. 심사가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녁도 먹지 못한 그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지만 늦게 내려온 사람들과 총무 사이에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격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놓은 양측의 말싸움은 모처럼 멋진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다른 등산객들의 기분을 여지없이 망쳐놓고 말았지요. 산악회 측의 충고를 받아드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등산객들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기분 나쁜 말로 쏘아붙인 산악회 총무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다른 등산객들의 중론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산행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과 함께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고 감정을 다스리는 지혜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마무리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두타산, #청옥산, #무릉계곡, #장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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