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도에 무사히 들어왔다는 기쁨에 우리는 잠시 게으름을 피웠다. 배에서 보았던 해넘이는 아직도 진행중이었다. 붉은 기운은 바다에 빠져 넘실거리고 해는 아쉬운지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방을 구하러 다닌 건 깜깜해진 다음. 숙박시설은 죄다 해안가에 몰려서 마치 여행객들의 등대라도 되는 양 요란스럽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알아보니 보통 3만원에서 4만원선. 사실 우리가 아낄 수 있는 건 방값뿐이었다. 먹거리는 맛집 정보가 필요해 찾아가 먹어야 할 판이고, 차는 이미 렌트를 해서 타고 다니니까 더 이상 절약의 여지가 없다. 몇 집을 물어보고 3만원짜리 방에 들었다.

방을 잡고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영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7년 전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내렸던 선착장이 있는 동네로 갔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깜깜절벽이다. '이게 아니었는데, 난 분명히 여기서 자리 물회를 먹었는데.' 이런 때 도깨비한테 홀렸다고 하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을 지나 해안가를 더듬고 다녔지만 헛수고. 다시 돌아와, 내키지 않아 지나쳤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매운탕이 2만원! 이런 만 원 이하 메뉴가 없다. 어쩔 수 없어 매운탕을 시켰는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달랑 물고기 한 마리다. 제주에 물가가 비싸다는 말이 실감나면서 한숨이 나왔다. 5일 동안 내내 이래야 되나.
 


다음 날, 내 의문은 깨끗히 풀렸다. 검멀레 해안에서였다. 간식거리를 파는 좌판에서 땅콩 한 봉지를 사면서 물었더니 젊은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7년 전에는 우도항밖에 없었는데 관광객이 늘어나 한 곳에서 수용하기가 어려워지자 하우목동항이 새로 생겼다는 것. '아아, 그러니까 우리가 내린 곳은 하우목동항이었구나.' 하우목동항은 우도항보다 훨씬 아랫쪽에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우목동항에서 아래로 더 내려갔으니 깜깜절벽만 만날 수밖에.

 


우도봉과 검멀레 해안은 여전했다. 우도를 한 바퀴 돌다보니, 비양도라는 섬이 나온다. 비양도라면 한림에 있어야 하는데, 아마도 이름만 같은 거 같다. 작은 섬인데 우도와 길을 연결해 놓았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을 지나 우도항으로 갔다. 배 시간을 보니 마침 종달리로 가는 배 시간이다. 성산항보다는 종달리가 가까워 보이고, 마침 배가 떠난다기에 종달리행 배를 탔다.
 


아침은 늘 그렇듯이 빵 하나와 커피, 그리고 과일로 때웠다. 그런데 어느덧 점심 시간이 지나 배가 고팠다. 우리는 조금만 참고 있다가 전복죽으로 유명한 오조해녀촌에서 전복죽을 먹기로 했다. 오조해녀촌은 종달리에서 섭지코지 가는 길에 있었다.
 


전복죽은 1만500원. 500원은 뭐냐니까, 일하시는 분도 모른단다. 사장님 마음이라나. 제주에 와서 입이 호강한다. 아침은 그럭저럭 때웠다지만 계속해서 비싼 밥만 먹었다. 해녀촌이라서 해녀가 서빙도 하는지 나이드신 어른들이 주문도 받고 식사도 내온다. 전복죽도 물론 진짜 전복으로 쑨 거다. 파르스름한 내장 색깔이 나고 맛도 좋았다.

 

섭지코지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섭지코지는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래서 그때 난 택시를 타고 섭지코지를 들어갔다. 택시는 섭지코지를 한 바퀴 돌고 올 동안 기다려주는 조건이었다. 30분, 아니면 1시간이었다. 검은 바위와 길가에 핀 들꽃과 투명한 바닷물이 가져다주는 파도.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용기를 내서 택시를 보냈다. '이런 풍경을 다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지나친다면 그건 진짜 여행이 아니지. 힘들더라도 걸으면서 온몸으로 느껴야 참다운 여행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느리게 섭지코지를 구경하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서 나왔다.

그때 흙길이었던가? 그것까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차로는 얼마 안 돼 보여도 걷기에는 먼 거리였다. 걷다가 바위 위에 앉아 구경도 하고 바다에서 나와 해물을 챙기는 해녀들도 보았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그 분들이 알아 듣지도 못할 말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침묵하는 너른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일어나 다시 걷곤 했다.

 
아무도 나처럼 걷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씩 자동차가 내 옆을 쌩하니 지나쳐 갔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스쳐갔다. 마치 이상한 여자 다 보겠다는 듯. 그러거나 말거나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데, 사실 여행자에게 아름다운 경치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가다가 힘들면 멈춰서 바라보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면 되지.
 


그런데 섭지코지가 망가졌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을 통해 들었다. 어떤 풍경이든지 5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허가를 받아 개발을 하는 건지. 도대체 인간에게 그걸 허가할 권리가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올인하우스 뒤쪽으로도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주차장은 북적북적 사람에 엉켜서 걸음을 걷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숨겨진 비경을 보거든 절대 공개하지 말라는.

 

하긴 그렇다. 그때만 해도 차가 흔하지 않았으니, 또 인터넷이니 뭐니 정보가 넘쳐나지 않았으니 그나마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보다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보고 싶은 사람만 와서 보시오'라고 할 만큼 배포가 큰 지자체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난 섭지코지 가는 길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제주 올레길 기사를 보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름다운 제주에 걷는 길이 생겼다니, 가슴이 설레기도 했고. 실제로 한 구간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일 뿐,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나 혼자 와야지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만 바라보았다.

덧붙이는 글 | 제주에는 10월 초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우도, #섭지코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