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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연구원이었다는 목수정씨가 문화와 정치를 어떻게 버무리며 살아왔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본 책.
▲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연구원이었다는 목수정씨가 문화와 정치를 어떻게 버무리며 살아왔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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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흐뭇한 웃음 지어본 적, 참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 읽은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짜릿함과 흥분으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책과 만나는 일. 목수정씨가 쓴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레디앙 펴냄), 이 책이 바로 그랬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던 시절, '목수정'이라는 이름이 맨 아래에 나오는 '문화' 관련 성명서들을 자주 봤다. 그때마다 내가 속한 당에서 '문화'를 전문으로 연구한다는 이 사람은 누굴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그에 대해 적극 알아 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아니어서 궁금해 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이 책은 그래서 샀을 테지.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연구원이었다는 이 사람이, 문화와 정치를 어떻게 버무리며 살아왔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적어도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나,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눈길 끌 법한 부제에 끌려서 산 건 아니었다.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연구원으로 일했다는 사실 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큰 기대감 없이 시작한, 목수정이 살아온 이야기에 다가서기. 시작부터 나를 잡아끈 건, '예술'과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와 '마음'이었다.

"문화예술인들은 태초부터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온갖 사회안전망에서 이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방치하는 것도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 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 창작과 창조 정신을 사회 최전방에서 실천할 이들의 불안정한 삶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 그들이 특별히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역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하는 시민의 한 사람이며, 한 사회에서 문화와 예술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가치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에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예술인들 자신이다. 연대? 예술가가 무슨 노동자냐? 정부에 대한 요구? 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국가가 왜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느냐? 이런 소리가 여전히 그들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판에서 연극이 아직도 매일 올라간다는 건 언제나 기적이다. 그 기적은 연극인들의 희생을 근거로 줄곧 이어져 왔다. 그러나 한 사회에 연극이 혹은 예술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라면, 그들의 가난을 장르의 숙명으로 치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질문에 반드시 해답을 찾고 싶었다. 이는 이후에 한국에서 여러 문화단체들과 함께 프랑스의 문화예술비정규직 제도를 한국 사정에 맞게 도입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책 가운데

이런! 나랑 정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순간, 이 사람과 이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급관심'이 일어났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 관심의 대가는 곳곳에서 받아낼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스물아홉에 혼자 훌쩍 프랑스로 떠나 그곳에서 문화 정책을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들은, 따라해 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다.

"문화예술인들의 불안정한 삶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 과제"

갸를롱 프로젝트  무엇이 되겠다고 미리 계획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즐기면서 놀이를 하듯 만들어가는 문화 공간 '갸를롱'의 입구
▲ 갸를롱 프로젝트 무엇이 되겠다고 미리 계획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즐기면서 놀이를 하듯 만들어가는 문화 공간 '갸를롱'의 입구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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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의 과제는 평범한 프랑스 사람들 개개인의 밑바닥에 있는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탐문하는 것이었다. 헌법의 규정에 따라 문화부가 집행하는 이런 문화정책들이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관찰하고, 다양한 계층에 있는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문화의 영향력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야만 했다."
(*프랑스는 1996년에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실업급여 제도를 도입해 연간 2개월 이상 계약에 근거해 일한 문화예술인들은 나머지 기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 책 가운데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파리 8대학 공연예술학과에 입학한 그. 관광공사에서 4년 동안 일하면서 오랜 탐문 끝에 '문화'라는 굳건한 연모 대상을 찾아냈고, 그 연모를 실천할 공간으로 동숭아트센터 기획자로 지냈던 시간들을 거쳐 드디어 그가 뛰어놀 진짜 '물'을 프랑스에서 만나게 된다. 함께 뛰어놀 동반자 '희완'까지도.

서른 중반에 이른 한 여자가, 예순 넘은 예술가이자 아나키스트인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면서 아이까지 낳은 이야기. 누구한테는 그 상황이 참 독특하고 신기하게 다가왔을 법도 한데…. 목수정이 차근차근 가꿔가는 '문화 대지' 이야기에 너무 깊이 빠져서일까, 프랑스 남자 '희완'과 엮어간 사랑 이야기는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희완이 평생에 걸쳐 만들어가는 그만의 성 '갸를롱 프로젝트'가 더 다가왔다.

무엇이 되겠다고 미리 계획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즐기면서 놀이를 하듯 만들어가는 문화 공간 프로젝트가 바로 '갸를롱 프로젝트'다. 목수정씨 표현에 따르면 이 공간은 경제적 가치에 이바지하거나 공동체를 위한 어떠한 미덕에도 기여하지 않으면서 상당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한다. 인간의 행위라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믿어온 '생산성'의 개념을 비켜가고, 동시에 예술행위의 필수 전제로 생각해온 '관객' 개념마저도 없는 공간. 목수정씨도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그 '성', 갸를롱 프로젝트 이야기는 그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득 불러낸다. 그런 공간을 내가 사는 이곳에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까지도.  
 
이렇게 프랑스에서 학문과 체험으로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그의 '문화 씨앗'은 한국에 돌아와 민주노동당이라는 조금은 낯설고 메마른 땅에서 새롭게 움트게 된다. '문화사회'를 바라는 정책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마음에 깊이 들어온 곳이었다. 그러나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라는 그의 정신을 뿌리내리기엔 민주노동당이라는 땅이 조금은 척박했나 보다.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남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없고, 자유를 누려보지 않은 사람이 더 큰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집단이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주장을 세상은 얼마나 진실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 - 책 가운데

당에 이미 정해진 주인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주인이 되어 함께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아직도 거기 있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목수정씨가 즐겁게 버티어 갔던 민주노동당.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나 또한 그랬던 것처럼 2008년 2월 분당 시점과 맞물려 그도 민주노동당을 떠난다.

"행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남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없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건 문화다  목수정씨와 '삶'을 연대하고 있는 프랑스 예술가 '희완'이 표지를 만들어 주고 목수정씨가 내용을 채운, 17대 대선 문화공약집.
▲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건 문화다 목수정씨와 '삶'을 연대하고 있는 프랑스 예술가 '희완'이 표지를 만들어 주고 목수정씨가 내용을 채운, 17대 대선 문화공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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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수정씨가 진보신당 당원인지 몰랐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실조차 몰랐으니. 그렇기에 책 끝머리에서 진보신당 파리지부의 소박한 당원 자리로 돌아가겠노라는 글을 만났을 때, 참 많이 기뻤다. 이토록 강렬하게 '글'만으로 나를 끌어당긴 사람과 같은 정당 당원으로 지낼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나한텐 커다란 행운을 잡은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해도 책에서 느낀 이 흥분과 감동이 무뎌질 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문화가 교육처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국가가 일정한 수준까지는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공서비스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저마다 정신의 양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일궈내는 일은 그만큼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된다." - 책 가운데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정신은 나와 많이 맞닿아 있다.

"우리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 치며 물었다. 결론은 역시 그 모든 사람들 머릿속에 경제 효율이 최우선 가치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틀을 조금이라도 이탈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숨 쉬는 자로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오늘 나의 삶의 태도가 진실하다면, 내일의 나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나의 욕구와 관심은 나와 함께 진화할 것이며, 열심히 그 새로운 호기심과 열정에 화답하며 살고 싶다. 그래봤자 1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을 뿐이고 나의 관심사는 '문화'라는 거대한 대지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거릴 뿐이다." - 책 가운데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밀려오는 '삶'에 대처하는 그의 생각과 방식들 또한 나랑 많이 비슷하다.

"다른 세상에 대한 실험은 우리 내부에서 시작하는 게 마땅하다. 실험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아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자신의 본질적인 지향과 욕망에 충실한 선택으로서 좌파, 자유롭고 당당한 생활좌파가 많을수록 미래가 밝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책 가운데

누구처럼 긴 역사를 함께해온 동지도 없고, 따라서 배신할 대상도 없다는 목수정씨와 나는 참 닮았다. 뭔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 두려움까지 더한 마음으로 민주노동당 당원이 된 해도 그와 비슷한 2003년. 찢긴 마음으로 어렵게 시작한 진보신당 당원의 길, 아직까지는 즐겁게 걸어갈 수 있는 것도 목수정씨 말처럼 자유롭고 당당한 '생활좌파'가 많아지는 것이 진보신당이,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이라 믿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러니 문화와 삶, 나아가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아가는 정신까지 비슷하게 맞닿는 목수정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서 내가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동에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 잡은 지 몇 시간 만에 다 읽어버린 이 책을 바라보며 난 행복 기운에 취해 다물어지지 않는 입속으로 소주 한 잔을 털어넣었다. 끌어 오르는 기쁨을 그렇게라도 잠들게 하지 않으면, 정말 밤새도록 잠들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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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레디앙(2008)


#레디앙#진보신당#민주노동당#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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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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