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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토림의 뜨는 해를 보지 못하다

 

오전 8시 30분경에 뜬다는 해를 보기 위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고산지대라 늦게 뜨고 늦게 진다는 게으른 해 덕분에 여유있게 일출 장면을 놓치지 않을 듯했다. 거대한 흙기둥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해의 장관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어제, 토림 안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미로를 헤매다 알이 배긴 다리의 통증도 그 만남을 가로막지 못했다. 고도 탓에 가빠오는 숨을 참으며 토림의 가파른 길을 오르니, 아침 해는 구름 뒤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운남을 ‘구름의 성’이라는 연유를 내심 짐작하게 되었다.

 

 

다소 실망하여 토림에서 내려와 ‘스판’이라는 쌀죽과 미시엔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이제 토림을 벗어나 두 번째 여정인 ‘따리’(大理)로 향하는 길에 나섰다. 쿤밍에서 따리- 리지앙까지 향하는 고속도로를 놓아 두고, 토림을 거쳐 아기자기한 지방도로 달렸다.

 

얼마 쯤 달리던 차가 길가에 멈춘다. 이족 노인이 달려나와 고무관을 차에 연결한다. 가수(加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차들은 공기로 열을 식히는 공냉식이 아니라 물로 식히는 수냉식이라 한다. 정기적으로 물을 보충하는 것이 가수인데, 비용은 2위안이라 한다.

 

어째서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수냉식을 할까 궁금했다. 아마 길이 멀고 넓은 중국 도로를 달리다가 공냉식의 팬 벨트라도 끊어지면 난감하여, 쉽게 구하는 물을 보충하는 수냉식을 쓴 것이 아닐까 혼자 짐작해 볼 뿐이다.

 

 10시 50분경, 검문소와 같은 곳에서 차가 멎는다. 우리의 경관에 해당하는 공안원이 차에 올라와 인원을 점검하고, 운전사는 그때마다 무언가를 가서 신고하고 온다. 중국에서 공안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어느 나라보다 치안이 잘 유지되어 여행객들이 마음놓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주민들은 공안 앞에서는 잔뜩 주눅이 드는 시늉이었다.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물권법에 이어, 농지의 사유화까지 인정하기 시작한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로 그 외향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상부인 정치나 사회 정책의 조직은 여전히 완강한 사회주의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차는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산꼭대기까지 일궈놓은 다랑뱅이 밭들이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밭을 일군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자면 그런 아름다움도 가슴 아플 지경이다.

 

이따금 산정에 오붓하니 자리잡은 집들이 보인다. 저이들은 어째서 저 아득한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까. 윤병규님의 말에 따르자면, 원래는 예전 마방들이 지나는 길 주변에 집을 짓고, 숙소나 음식을 제공하며 살아오던 이들의 후손들인데, 요즘은 마방 대신에 찾아오는 여행객들을 보고 산다고 한다. 세상은 바뀌어 차와 소금을 실은 마방들 대신에 배낭과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이 그 길을 대신 걷고 있다.

 

 

12시 가까운 시각에 포장된 차도를 따라 지나가는 마방 일행을 만난다. 황급히 차를 세워 사진에 담는다. 소녀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가족들로 뵈는 마방들은 말의 걸음을 서두르며 지나칠 뿐이다. 뒤처졌던 말이 마부도 없이 제 스스로 알아서 달려와 대오에 몸을 섞는 모습이 참 신기하기만 했다. 아스팔트 위를 걷는 마방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산중을 갈짓자로 휘도는 산길 아래로 까마득한 골짜기가 내려다 보인다. 그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를 지난다. 벼룻돌로 유명하다는 협곡 아래로는 비취빛 물이 아득하니 흐른다. 길이 221.25미터에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강저하대교(江底河大橋)라는 표석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까마득하니 뵈는 절벽 끝에 가까스로 집 한 채가 걸려 있다. 강어반점(江魚飯店)이라는 간판까지 내걸었지만, 도대체 왜 평지를 놓아두고 바라만 보아도 아찔한 낭애 끝에 매달려 사는지 연유를 알다가 모를 일이었다. 낭애 끝에서 맛보는 식사가 어떠한지 알아 볼 겸, 식사를 주문하려 찾으니,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말라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식사를 준비할 수 없단다. 그 곳에서 물이 흐르는 골짜기 아래를 오르내릴 주인을 생각하니 차마 편히 앉아 끼니를 때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폭포 앞에서 웃는 유채꽃을 만나다

 

다시 차를 움직여 길을 가는데, ‘용런’(永仁)과 ‘난화’(南華) 중간 쯤에 이르러 갑자기 운전사가 소리를 친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멀리 물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보인다. 여행 안내를 해온 윤병규님이나 운전사도 처음 만나는 폭포라 했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삼담폭포(三潭瀑布)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일명 대용담(大龍潭)이라고도 불리는 경구인데, 아직 관광코스에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한다.

 

 

거대한 폭포 앞에는 절벽을 마주한 채, 노란 유채밭이 바둑판처럼 오밀조밀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인의 눈을 피해 깊은 심산에 숨겨진 한폭의 선경처럼 아득했다.

 

차도 미끄러질 가파른 길을 풍경에 이끌려 걸어 내려가니, 한가로운 시골집들이 나타난다. 다행히 식당이 있어 ‘투지’라 불리는 놓아 기른 닭을 한 마리 잡아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마을 고샅을 걸어내려가니 온통 노란 유채밭 사이로 난 고불고불한 흙길이 눈에 넣을 만치 예쁘다. 

 

 막상 폭포 앞에 이르니, 그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절벽이 가로막는다. 푸른 채소밭과 노란 유채꽃이 어울어내는 기묘한 밭고랑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동안, 폭포가 떨어지는 골짜기 아래로 향한 계단을 따라내려간다. 갈짓자로 구부러지며 이어진 계단을 한참 내려선 끝에 폭포의 끝에 이른다.

 

위에서는 뵈지 않던 또다른 폭포의 물줄기가 바닥을 흐른다. 골이 워낙 깊어 카메라를 들여대도 하늘이 잡히지 않는다. 거센 폭포에 비하여 바닥을 흐르는 물은 얌전한 편이다. 서둘러 계단을 오르자니 숨이 턱턱 목에 차고, 가슴이 뻐근하니 통증이 느껴진다.

 

 마을의 집들을 살펴 보니, 토담에 짚으로 지붕을 얹어 흡사 우리네 초가를 닮았다. 바닥에는 돼지나 소를 기르는 우리가 있는데 부드러운 짚을 깔아 주었다. 이리저리 살펴 보아도 주변은 온통 노란 유채밭뿐인데, 어디서 논이 있어 짚을 얻는지 궁금하다. 한가로이 먹이를 찾으며 돌아다니는 닭들도 친근하기만 하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중국인 운전사가 물 담배를 핀다. 큰 통 같은 걸 입에 대고 피우는 모습이 재미있다. 평상 위에는 해바라기와 좀 굵은 들깨 씨앗 같은 것이 놓여 있어 군것질 삼아 까먹는다.

 

이어서 나온 닭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고기를 안주 삼아 서비스로 나온 이족의 전통주를 맛 보았다. 매실로 담근 술이라는데, 독하긴 해도 향이 은은하여 먹을 만했다. 열세 명의 먹은 식대로 190위안이 들었다.

 

마을을 떠나며 모두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거칠게 쏟아지는 폭포 앞에 너무 상반된 평화스러운 풍경으로 놓인 마을과 노란 유채밭의 풍경이 아득하기만 하다. 예정에도 없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 선경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혹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내심 기대해 본다. 내친 김에 혹 적선이 넉넉하다면 이 깊고 고요한 마을에 태어나 물소리를 들으며 사시사철 꽃 피는 밭을 일구는 필부로 사는 요행을 꿈꿔본다.

 

대리석의 본향, 따리로 향하다

 

 

길을 다잡아 '따리'(大理)로 향한다. 몇 시간을 달린 끝에 오후 5시 무렵에 드디어 얼하이(洱海)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얼하이 호수는 길이가 50km에 달하여 바다로 불리어지고 있을만큼 큰 호수다. 양쯔강의 상류인 진사강(金沙江)과 메콩 강(瀾滄江) 사이에 뻗어 있는 뎬창 산맥(點蒼山脈)에 깊이 고인 호수로, 강 모양이 귀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호수의 남쪽 끝이 메콩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양비 강(樣濞江)이 되는데, 예부터 양비 강을 이하(洱河)라고 부른 데서 얼하이(洱海)로 불렸다는 게 유력해 보인다.

 

 

얼하이 주변이 따리국의 근거가 되는데, ‘따리’(大里)에서 생산되는 돌이 석재로 유명한 대리석(大理石)이다. 당나라 때는 남조국(南詔國:737~902)의 중심지였고, 송나라 때에는 대리국(大理國:937~ 1252)의 도읍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쿤밍(昆明) 부근이 이족의 근거라면 대리는 바이족(백족)이 근거지가 된다. 바이족은  중국사람들에게 민자족(民家族)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들의 고유언어로 '바이'나 '보'라 불리는 소수 민족이다. 바이족들의 가옥은 흰 벽이 특징이며, 전통의상도 백의를 즐겨 입는다 한다. 이족의 가옥 벽에는 주로 소머리로 된 문장이 많이 그려져 있는데 비해, 바이족의 가옥 벽에는 꽃 문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따리는 신시가지를 지나 고성(古城)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넘버3’라는 게스트하우스는 근자에 고성 지역으로 옮겨졌다. 원래 따리 이장으로 불리던 ‘문씨 아저씨’가 경영하던 ‘넘버3’는 다른 지역에 있었는데, 개발계획에 따라 ‘군말없이’ 집을 비워 주고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따리 통장’으로 불리는 한국인 ‘제임스 씨’가 운영하고 있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넘버1, 2’가 주로 중국인이나 서양여행객이 찾는데 비해, 한국 배낭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여행에 관한 도움이나 정보를 얻고 있었다.

 

창샨(蒼山)이 내다보이고, 고성의 남문 가까이 자리 잡은 ‘넘버3’는 김치찌개부터 콩나물해장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 음식들이 제공된다. 8인실 도미토리의 방값이 일박에 30위안이고, 가족 여행객을 위한 2~3인실도 준비되어 있다. 1인실의 경우, 120위안이라 한다.

 

저녁 식사로 모처럼 김치찌개를 먹고나니 울렁거리던 속이 한결 가라앉았다. 이층에는 인터넷도 두 대가 준비되어 있는데, 한글도 지원하여 메일을 이용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머리를 뒤로 길러 묶은 제임스 씨의 안내로 인근의 꼬치구이집으로 갔다.

 

실내 포장마차격이라는 식당에서는 거리에 탁자를 펼치고 손님을 맞았다. 양고기 꼬치구이는 매우 짜고, 바이주를 따라마시는 술잔은 손톱만큼 작았다. 이 날, 열세 명이 몇 병의 맥주를 곁들여 먹은 술과 안주 값은 106위안이 들었다.

 

최근 들어 ‘리지앙’(麗江) 쪽이 관광지로 급격히 상업화되면서, 오지를 찾는 배낭여행객들은 ‘따리’로 몰린다고 한다. 실제로 따리에 장기간 머물면서 일대를 깊이 있게 여행하는 배낭 여행객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운남 여행자들에게 첫사랑 같다는 ‘따리’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첫 날 밤을 맞이했다.

덧붙이는 글 | 따리 일대의 여행 정보는 ‘넘버3’ 게스트하우스 제임스 님이 운영하는 ‘따리사랑’ (http://cafe.naver.com/dalilove)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태그:#따리, #삼담폭포, #운남, #윈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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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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