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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재개 두번째 날인 27일 오전 10시 30분. MBC 본사 1층 로비에는 26일에 이어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였다. 조합원들은 사회자의 말에 따라 촘촘하게 붙어 앉았다.

 

곧 결의대회가 시작됐다. 발언자의 지시를 따라하는 조합원들의 구호와 노래가 딱딱 맞았다. 사회자로부터 호명받은 박성제 MBC 본부장은 조합원들의 박수와 환호 속에 등장했다. 박 본부장은 이른바 '미디어법'을 문방위에 상정한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발언을 한 뒤, 오늘 아침 아들이 그려줬다는 그림을 펼쳐 조합원들에게 보여줬다.

 

그림에는 박 위원장의 사진과 함께 '아빠 힘내세요'라는 귀여운 글씨가 쓰여 있었다. 조합원들의 웃음과 함께 다시 박수가 터졌다. 언론노조 총파업 선봉에 서 있는 MBC 본부의 '웃는 투쟁'에는 노동조합과 노조원들 사이에 이런 무한 신뢰가 있다. 당연히 끈끈하다.

 

훈훈한 MBC, 사단난 KBS 결의대회

 

MBC 결의대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27일 낮 12시 KBS 본관 1층 민주광장. 이 곳에서도 KBS 노동조합 주최 '미디어법 악법 날치기 상정 규탄결의대회'가 열렸다.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오늘 '사단'이 났다.

 

집회 분위기는 초반부터 MBC와는 달리 싸했다. 민주광장에 앉아 구호를 외치는 조합원만큼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묵묵히 집회를 지켜보는 조합원들이 많았다.

 

사회를 맡은 KBS 노동조합 집행부는 "한나라당이 트랜스포머 3에 등장했다고 한다. 차떼기당에서 날치기당으로 완벽하게 변신했기 때문이란다. 고흥길 위원장이 주연으로 캐스팅됐다고 한다"며 농을 던졌지만 이를 받아주는 조합원들 역시 많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이른바 '미디어법' 직권상정 이후 노조의 느리고 미온적인 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그대로 전해졌다.

 

강동구 KBS 노조위원장이 "노조가 미디어법에 대해 밋밋한 투쟁을 하는 것 아니냐는 조합원들의 불만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조합은 미디어법 저지를 위해 총력 투쟁하고 있으며 당장 미디어법 상임위 철회를 한나라당에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방송공사법 역시 밀실에서 추진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논의해 줄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위원장의 말에 박수를 보내거나 구호를 따라하는 조합원은 많지 않았다.

 

최재훈 KBS 노조 부위원장은 그동안의 비대위 경과 보고를 한 뒤 "오는 3월 2일 전국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 계획이며 이날부터 미디어법 관련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최 부위원장 역시 "12대 노조는 미디어법이 장기집권 음모이며 공공성을 박살내겠다는 기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하며 "다만 직권상정이 안 될 것이라고 본 것에 대해 '실기'한 부분은 있다"고 인정했다.

 

터져나온 불만 "뭐가 끝이야?"

 

'사단'은 최 부위원장 발언 직후 일어났다. 사회자는 최 부위원장의 말을 끝으로 집회를 정리하려 했다. 집회 시작 25분 만이었다. 갑자기 조합원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PD들과 기자들이었다.

 

"이상으로 노조 집회를 모두 끝내…."

 

"뭐가 끝이야?"

"왜 이렇게 끝냅니까?"

"조합원들 발언도 안 듣고 이렇게 끝냅니까?"

"이게 뭐야. 도대체!!"

 

당황한 노조 집행부들은 "시간 관계상…" "업무에 복귀해야 하니 이해해달라" "3월 2일에 또 기회가 있다"는 말로 설득하려 했지만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더 많아졌고 높아졌다.

 

결국 노조 집행부는 마이크를 조합원들에게 넘겼다. 가장 먼저 나온 한 조합원은 "난 이런 곳에 나선 적도 없고 사내망에 글을 올린 적도 없는, 그저 일만 하는 PD였다"면서 "그런데 지금 너무 가슴 아프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난 노동운동해 본 적도 없다. 이런 데 나올 정도로 투쟁심 강한 사람도 아니다. 나서기도 싫고 그저 세상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현실을 묵과한다면 방송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그저 연명하겠다는 것 아니냐. 노동조합이 앞에 나서리라 믿었다. 대학 총학생회도 이런 총학생회가 없다. 노조는 미디어법이 (본회의) 상정되면 총파업 한다는데… 너무 한가한 것 아닌가. 조합원들이 나가서 죽겠다는데 노조가 조합원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조합원은 "노조가 앞장서지 않으면 우리 PD들은 모두 노동조합을 탈퇴할 것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사태가 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강동구 노조 위원장이 들고 있던 피켓을 바닥에 밀어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나 본관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노동조합 탈퇴" 경고 발언이 귀에 거슬린 듯 했다. 일부 노조 집행부도 일어나 강 위원장을 따라 퇴장했다. 조합원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위원장 어디 가는 거냐" "조합원들의 얘기를 듣지 않고 퇴장해 버리는 위원장이 어딨냐"면서 소리쳤다. 일부 기자와 PD들은 강 위원장의 갑작스런 퇴장에 화를 삭이지 못하고 "세상에 저런 위원장이 어딨냐"면서 깔판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함께 퇴장해 버렸다.

 

한 노조 집행부 역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 "아까 부위원장이 다 얘기했잖아"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른 집행부들이 이를 말리는 등 분위기가 순간 어수선해졌다. 노조 집행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다시 터져나왔다.

 

한 집행부가 마이크를 잡고 "알겠다. 위원장에게 다 전달할테니 할 말 있는 조합원들은 해 달라"고 분위기를 수습했다.

 

"노조가 부응하지 못하면 PD부터 가겠다"

 

한 조합원이 나와 "아까 위원장은 미디어법과 방송공사법을 함께 묶어 투쟁하겠다고 하는데, 한나라당은 지금 그걸 분리해서 처리하겠다는 것 아니냐.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지금 긴박한 상황이다. 그제 날치기 처리하는 것 봤잖냐. 위장전술까지 써서 날치기했다. 지금 당장 통과될 가능성도 높은 상태다. 매우 긴박한 상황이다. 노조가 이러니까 말로만 싸우는 척 한다는 의심을 사는 것 아니냐. 이럴 때가 아니다. 노조가 늘 연대, 연대 하는데 지금이야말로 나가서 MBC하고 연대할 때다."

 

한 PD는 강 위원장의 퇴장을 정식으로 문제삼았다.

 

"아까운 시간 쪼개서 조합원들이 와 있는데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위원장이 박차고 일어나는 건 조합원들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위원장이 아니다."

 

분위기가 삭막해지자 김덕재 PD협회장이 나섰다. PD협회는 이미 미디어법을 반대하는 '제작거부'를 선언하고 그 본격적인 시작 시점을 오는 3월 2일로 잡아둔 상태다. 김 회장은 맨 앞줄에 앉아있는 조합 집행부를 향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PD협회는 협회이지만 조합원들의 모임이다. 물론 그동안 노조와 다른 결정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노조를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속도'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PD들은 총회를 통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제작거부에 나서기로 했다. 노조에 부탁드린다. PD들의 제작거부 투쟁을 부분 파업으로 인정해 달라. 지금 중요한 건 바로 '스피드'다. 이 스피드에 노조가 부응하지 못하면 우리 PD부터 가겠다.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린다."

 

조합원들의 박수가 터졌다.

 

민필규 기자협회장 역시 "기협은 노조의 투쟁에 힘을 실어준다는 입장이지만 만약 노조가 투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따로 갈 수 있다"면서 "PD협회의 제작거부를 부분파업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조합원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민 회장의 발언을 끝으로 집회는 오후 1시 22분 끝났다. 조합원들 대부분이 자리를 뜬 상태였다. 피켓과 머리띠는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사회자가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노조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면서 구호를 선창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메아리는 약했다.

 


태그:#KBS, #KBS노조, #강동구, #민필규, #김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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