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해 5월 18일은 내게 악몽 같은 날이었다. 몸을 꼼짝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 '119구급차'에 실려간 날이기 때문이다. 서산중앙병원을 거쳐 순천향대 천안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가 그 날 저녁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종격동(심장과 폐와 식도 사이)' 염증이 점점 심해져서 수술을 해야만 하고, 그러려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6월 1일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갔다. 3일 흉부외과와 정형외과 소관 수술을 받고 여덟 시간만에 수술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30일 가까스로 퇴원을 했으니 44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셈이다.   

 

 병상생활을 할 때 태안을 오가며 간병을 하느라 고생이 큰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월 18일에 119구급차에 실려 입원을 한 것이 조금은 공교롭다 싶네. '5·18민중항쟁' 기념일을 내 나름으로는 좀더 절실하고 뜻 있게 보냈다 싶기도 하고, 80년 그 날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르도록 광주 망월동 묘소 참배도 한번 못하고 살아온 죄 값을 치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

 

 그러자 마누라의 대답은 다소 퉁명스러웠다.

 

 "올해는 꼭 간다, 내년에는 세상없어도 간다, 해놓구선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죗값이지요, 뭐."

 

 "그래도 다행히 죽지 않고 살게 되었으니, 내가 그 약속을 지킬 날은 꼭 올 거야."

 

 그런데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나는 아직 아내와 함께(가능하면 가족 모두와 함께)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 망월동 묘역을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올해 5·18민중항쟁 기념일을 지내면서 또 한번 면구스럽고 무안해지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 18일을 내 나름대로 알차게 가꾸었다. 119구급차에 실려갔던 지난해 5월 18일을 상기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올해는 '5·18민중항쟁기념일'을 뜻 있게 지내기로 진작부터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는 18일 아침에 서울을 갔다. 마누라와 교생실습 중인 딸아이와 데리고 사는 초교 6년 조카아이를 학교에 태워다주는 아침의 고정적인 일을 마치고는 8시 30분 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터미널로 갔다. 태안에서 서울 강남터미널까지 1시간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하여 오전에는 '5·18민중항쟁 제29주년기념 서울행사'가 열린 시청 앞 '서울광장'에 몸을 놓을 수 있었고, 오후에는 용산 땅을 지나는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할 수 있었고, 저녁에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거행된 '광주 민중항쟁 기념 및 용산참사 희생자를 위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하루동안 세 가지 행사에 모두 참여하여 올해의 5월 18일을 누구보다도 알차게 가꾸고 보낸 셈이다. 하느님과 5·18민중항쟁 영령들 앞에 삼가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실은 어제 20일에도 아침에 서울을 갈 마음이었다. 용산로 용산2가 남영역 부근에서 시작하여 명동성당까지 나아가는 제106일차 오체투지 순례로 참여한 다음 5시 명동성당 미사에 참례하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두 다리가 뻐근하여 걸음 걷기도 불편했다. 그래서 또 한번의 오체투지 참여를 위한 서울 나들이를 포기했다. 아쉬운 마음이 컸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면 오체투지 순례단의 고생이 더욱 클 터인데, 더욱 열심히 기도로 동참한다.)     

 

 '서울광장'에서 흘린 눈물

 

 지하철을 이용하여 서울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10시에 시작된 기념식이 거의 끝날 즈음이었다. 광장 잔디밭에 놓여졌던 수많은 플라스틱 의자들을 치우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부대행사의 하나인 '추모헌화·추모분향'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청년 시절부터 존경해 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신부님의 추모사와 시인들의 추모시를 듣지 못한 것은 적이 아쉬운 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해보는 '5·18민중항쟁 기념 서울행사'인데, 추모공연 '우리나라'를 보고 나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를 참석자 모두와 함께 힘껏 불러보고 '만세삼창'에도 우렁차게 목소리를 합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쉬움 속에서나마 추모헌화와 추모분향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행렬이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그 시간을 이용하여 함세웅 신부님, 서울행사위원회 명예위원장 박석무 선생, 전 국회의원 이부영씨 등을 뵙고 함께 사진도 찍는 기회를 얻었다.

 

 단상에 올라 국화송이 하나를 맞아들고 나아갈 때는 옷차림이 좋지 못하여 영령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다. 오후의 오체투지 순례 참여를 생각하여 가볍게 잠바 차림을 한 상태였다. 그래도 신경 써서 검은 잠바와 바지를 찾아 입고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두 손으로 국화송이를 받들어 영령들 앞에 놓고, 향 가루를 집어 향로 불에 놓은 다음 깊이 머리를 숙일 때는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에 처음 참석하는 소치가, 송구스러움과 죄스러움이 참으로 무거웠다.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마음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떴지만 나는 소수 인원과 함께 자리에 남았다. 잔디밭에 수건을 깔고 앉아 놀이패 '신명'의 마당 굿 '일어서는 사람'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절름발이와 꼽추라는 신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 과정은 많은 웃음을 자아내었다. 병신들의 자식이지만 사지 멀쩡한 자식을 얻은 것은 그들의 소원이 성취된 일이었고, 더없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자식이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1980년 5월의 무섭고도 참혹한 비극이 벌어진다. 그 아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저항하는 시민군의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 나선 늙은 병신 부부는 마침내 수많은 시신들 가운데서 아들을 찾아내고 오열을 한다. 그리고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시신들을 흰 천으로 둘러싸서 봉분(封墳) 형태를 이룬 다음, 꼽추어미는 등에서 흰 종이 뭉치를 꺼내 불을 붙여 춤을 추며 소지를 한다. 그 소지와 함께 봉분의 흰 천이 풀리자 모든 시신들이 살아 일어나 춤을 춘다. 그리고 아들을 민주 제단에 바친 병신 부모도 불구의 몸에서 해방된다.

 

 그 마당 굿(극)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내 옆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급기야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당 굿의 진행 때문에, 또 관객들의 눈물 때문에 정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아, 나도 아직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가슴을 지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속에서 다행스러움과 기쁨 같은 것을 느끼니 조금은 모호한 일이기도 했다.

 

 마당 굿 공연 관람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주먹밥을 하나 얻었다. 김 가루가 묻혀진 주먹밥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어머니들이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공급한 주먹밥이었다. 그 주먹밥을 맛있게 먹으며 나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5.18 민중항쟁#오체투지#용산미사 #함세웅 신부#놀이패 신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