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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할 때 가끔씩 바다를 찾습니다. 대개 여름 바다를 찾는다는 건 더위를 피해 해수욕장에 휴가 간다는 뜻이지만,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푸른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의 탁 트인 시야를 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잊을 수도, 스트레스를 단박에 날릴 수도 있습니다.

 

주말도 아닌 지난 주 수요일 오후, 바다에 답답함을 털어버리려 집 가까운 영광 백수 해안도로를 찾았습니다. 바다와 마주하며 달리는 족히 삼십 리가 넘는 길이지만, 그 길에는 직접 해수욕을 즐길 만한 백사장이 없습니다. 굽이굽이 해안 절벽을 따라 낸 도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발아래 펼쳐진 칠산 바다의 장쾌함에다 풍광이 빼어난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은 나무 정자들이 편안한 쉼을 주고, 주변에 발품 팔아 들러볼 만한 볼거리 또한 많습니다. 백수읍 소재지를 갓 지나 모내기 끝난 초록 들판이 배웅하는 그곳, 야트막한 산등성이 끝이 해안도로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라지만, 속도를 즐길 요량이라면 찾아오지 않는 게 좋습니다. 노견도 없는 편도 1차선인 데다 경사가 심한 굽잇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응급환자 실은 앰뷸런스처럼 시간에 쫓겨 목적지만 찍고 온다면 그건 차라리 'S자 코스 운전 연습'일 뿐입니다. 도로는 나무의 줄기이고 정작 열매는 곁가지 끝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동네 마실 다니며 집집마다 기웃거리듯 하며 여유부리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산등성이를 돌아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눈앞에 널려있던 들판은 아예 사라지고 오른편에는 울창한 숲이, 왼편에는 푸른 바다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마을은 없어도 군데군데 펜션과 카페들이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한두 곳에서 굴삭기 소리가 요란하지만, 도로 주변이 협소한 탓인지 펜션과 카페가 꼭 필요할 만큼만 있고 여느 관광지처럼 번잡스럽지는 않습니다. 대신 곳곳에 간이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고 바다를 향해 그늘을 만들어주는 벤치와 나무 정자가 많아 운치가 있습니다.

 

5분 쯤 달려 도로를 살짝 비켜나 바다를 향해 가파른 길을 내려가자 동화 속 무대 같은 예쁜 펜션 하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다 쪽에서 보자면 산을 향해 움푹 들어간 곳에 세워진 까닭에 도로에서는 눈에 띄지 않아 장사가 될 성 싶지만, 주중인데도 손님들이 제법 많습니다. 마을이나 다른 위락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가는 차들 또한 거의 없으니 오직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푹 쉬어갈 수 있는 곳이라 그런 듯합니다.

 

 

이곳 주변은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마파도 세트장은 노을이 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라는 영화감독의 말처럼, 해가 뉘엿뉘엿 서해 바다로 숨어드는 늦은 오후의 세트장은 따스하고 정겨운 고향마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가파른 벼랑에 매달려 있는 외진 이곳에 영화 세트장을 세우겠다고 점찍은 영화 관계자의 눈썰미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배우들과 카메라가 이곳 영화 세트장을 떠난 지 5년 가까이 흘렀고, 사람들의 <마파도>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져 이곳을 애써 찾는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영화 속 할머니들이 앉아있던 집 툇마루에 먼지만 수북하고, 영화 세트장이었음을 알려주는 나무 팻말의 글씨도 색이 바랜 지 오랩니다. 그래도 바로 앞에 그 할머니들의 손자 같은 예쁜 펜션이 재롱부리듯 섰고, 푸른 바다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파도 소리가 있어 외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숲도, 하늘도, 바다도 온통 푸르른 그곳에서 가슴 아픈 핏빛 역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외길 해안도로에서 원불교 성지가 있는 길용 마을을 잇는 작은 갈림길에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쫓기다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 열두 명의 열녀를 기리는 정려가 서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바다에 맞닿아 세워진 정려는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지 싶습니다.

 

단정한 맞배지붕의 사당과 큼지막한 추모비에 정사각형의 담을 두른 반듯한 정려입니다. 마당에 잡풀이 무성하고 열쇠가 있어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녹슨 자물쇠만 문에 덩그러니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찾는 발길이 끊어진 지 한참 오래된 듯합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사당의 문이 삐걱거리는데, 낮이라 그렇지 밤이면 그 소리가 바로 이곳에서 몸을 던진 열두 열녀의 울음소리처럼 들릴 것 같아 몸이 오싹해집니다.

 

입구에는 열녀를 소개하고 정려와 비를 세운 이유를 기록한 두 개의 사적비와 한 개의 안내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무슨 못다 한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한자 반, 한글 반으로 비의 네 면을 가득 채운 거뭇한 비석보다도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읽기조차 어렵도록 방치된 안내표지판에 눈길이 먼저 갑니다.

 

철로 된 큼지막한 팻말 위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그림으로 기록된 대로 본떠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는 당시의 고어로 열두 열녀의 본관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칼을 든 왜군에 맞서 배 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간략히 그렸는데, 그림은 비록 엉성하지만 고루하기 그지없는 현학적인 그 어떤 설명보다도 쉽게 읽히고, 기억에 또렷하게 남습니다.

 

고어로 된 설명 또한 띄어쓰기도 안 돼 있는 데다가 현대의 맞춤법과도 차이가 커서 쉽게 해독할 수 없지만, 차근차근 발음 나는 대로 읽다보면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열두 열녀를 소개하는 데에 대부분을 할애했고, 맨 뒤에 그들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소략해 두었습니다. 이토록 궁벽진 곳에서조차 당시 공고한 가부장의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한 자취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정려를 지나 다시 바다에 매달린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백수 해안도로의 종착지인 전망대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옆에 미술관의 멋진 조각 작품 마냥 기념비 하나가 서 있는데, 건립 일자를 보니 불과 6개월 전에 세운 새 것입니다. 이름 하여 '상징탑'이니 해안도로의 랜드마크인 셈입니다.

 

 

팔각정으로 된 3층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칠산 바다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칠산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니 이름도 '칠산정(七山亭)'입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해안도로의 모습도 내려다 볼 수 있고, 영광 원자력발전소의 봉긋하게 솟은 콘크리트 원자로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전망대에 올라 한참 동안 선 채로 칠산 바다에 해가 완전히 잠기기를 기다렸습니다. 바다 저편에 피어오른 얄궂은 구름떼 때문에 환상의 저녁놀을 보지는 못했지만, 먹먹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확 틔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이런 좋은 곳이 있다는 건, 분명 큰 복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백수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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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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