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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60일이 넘게 쌍용차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왜 그렇게 싸움을 할까? 용산 참사는 6개월이 넘게 왜 싸움을 할까? 기륭전자 분들은 1400일 동안 왜 싸움을 할까? 근데 그것보다 더 큰 질문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사람이 화가 나면 그 분노를 갖고 싸울 수 있다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수그러들고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십 일 넘게, 6개월 넘게, (기륭전자) 1400일 넘게 할 수 있는 힘은 뭘까? 그 힘은 꼭 그렇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어떤 믿음이냐면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꿀 거다 하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으면 우리 하는 거 조금 지나면 지칠 거다. 가난한 사람이 힘 없고 약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송년홍 신부, 7월 28일 미사 강론 중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집전하는 생명평화미사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7시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열린다.

 

요즘은 이 미사에선 유독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짧은 생각으로는 용산도 해결이 안됐는데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있나 싶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가족과 철거민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강서 신부는 최근 미디어법, 쌍용차 등의 이슈로 용산 참사가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아니다. 오히려 용산 문제가 홍보가 됐다.

 

쌍용차 문제 얘기하며 '제 2의 용산 만들면 안 된다'고 하는데 용산이 뭔지 모르면 그 말을 쓸 수가 없다. 미디어법도 마찬가지로 '용산 같은 문제 더 이상 보도하지 말자고 하는 얘기지?' 이렇게 나오니, 용산에 관심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전국으로 용산 문제가 퍼져 나가는 것"이라 답했다.

 

실제로 추모 미사에는 각기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 28일 미사에는 기륭전자 노조원들과 반신자유주의선봉대의 대학생들도 미사를 찾았다. 선봉대의 일원인 대학생 장하얀씨는 "투쟁의 의미로 20리를 걸었다. 쌍용차에 갔다가 용산으로 왔다.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들만 미사에 참여하고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왜 이리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도 약한 사람들의 연대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금속노조의 옷을 입은 사람도 눈에 띄었다. '6.9작가선언'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미사를 찾았다. 이들은 30일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해 '책 낭송회'를 열기도 했다.

 

 

이 신부는 또한 "여기 참사 현장이 이미 끔찍했던 참사의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붙잡고 싸울 수 있는 보루가 되고 있고, 베이스캠프가 되고 있다. 49일 동안 시민 분향소 지켰지만 시간 지나서 헐리고 현장을 잃어 버렸다. 여기는? 아직도, 반년 넘게 현장을 계속 갖고 있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 시대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라고 용산참사 현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쌍용차 가봤는데 그 덥고 더운 날씨에 헬기로 최루액을 뿌리는 걸 보니 너무 답답했습니다. 우리가 용산 학살의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제 2의 용산이나 쌍용이 생길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면 우리 유족 앞에 사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랐나요? 아이들에게 아빠가 테러범이라는 누명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그 누명을 벗겨 드리려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근데 아직까지도 이명박은 사죄는커녕 또 다른 참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린 진상규명을 꼭 할 것입니다."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 7월 28일)

 

 

투쟁을 위한 새로운 명분도 생겨났다. 처음 유가족과 철거민들은 '돈 더 받으려고 떼쓰는 것 아니냐'는 시선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노한나 전철연 총무는 "내가 정말 돈 때문에 이러고 있나?" 생각도 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용산 참사 해결로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얻었다.

 

그는 "처음엔 내가 뺏기는 게 억울해서 모였지만 철거민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가 여기서 돈 좀 더 받고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명분을 잃는다. 그래서 더 나갈 수가 없다. 쌍용같은 경우도 우리가 타협하고 했다면 또 똑같은 방법으로 밀어 붙였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휴가철을 맞아 추모 미사를 찾는 발길이 뜸해졌음에도, 매일 저녁 남일당 앞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거리의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돗자리 조각을 알아서 펴고 앉는다.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위령 기도'가 먼저 시작된다. 언제나 '사망일부터 장례일까지'라는 제목의 기도문을 읊는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장례가 아직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바로 옆 약국의 간판엔 불이 들어온다. 하늘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미사가 끝나면 금세 어둠으로 뒤덮인다. 이때 미사 도중 고인의 영정 앞에 봉헌된 촛불들은 다시 분향소로 옮겨진다.

 

사제들이 밤 동안 꼬박 '현장'을 지키고, 다음날이 되면 누군가가 눌러 붙은 촛농을 일일이 떼어내고 다시 미사를 준비할 것이다.

 

이강서 신부가 31일 미사의 끝 무렵에 말했다. "어느 고향 출신이세요?라고, 과거의 자리를 묻는 말보다는 오늘날 어디, 어떤 자리에 있느냐를 묻는 '용산에 가보셨어요?' 하는 게 인사가 되었으면 한다. 휴가를 다른데 갈 것 없이 용산으로 올 것을 권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용산을 휴가 삼아, 성지순례 삼아 꼭 와주시기를 부탁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용산에 가보셨어요?"

 

'가끔 갔다'는 나의 대답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추모 미사에 참여하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허상, 착각, 오해를 깨고 진실과 현실을 보도록 알려주는 시대의 창"인 용산에 가본 적이 없었다. 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강해지는 곳, 피고름을 안고 신음하는 사회를 바꿔보려고 머리를 맞대는 '현장'으로서의 용산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오늘날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느냐고 묻는 대신, "용산에 가보셨어요?"라고.

덧붙이는 글 | 조은별 기자는 오마이뉴스 10기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용산참사, #추모미사, #남일당, #천막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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