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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창고에 매달아 놓은 마늘들
 허술한 창고에 매달아 놓은 마늘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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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찾은 충남 청양군 오살뫼 마을의 동서네 집은 오래된 구옥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새로 얹은 기와지붕만 말쑥할 뿐 낡은 대문간이며 창고, 마당의 들마루와 기다란 장대를 세워 쳐놓은 그늘막까지 예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늘막은 손님맞이용으로 마당과 들마루 위에 쏟아져 내리는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것이었다.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막 덕분에 방안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매 끼니는 물론 동서와 처남들의 술자리도 들마루가 되었다. 햇볕에 나가면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면 스며드는 바람이 시원했다.

그늘 밑으로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 그것은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 가을이 보내는 신호였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가을의 기미는 느낌으로 감지되는 계절의 변화다. 그런데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는 느낌으로만 감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마당 안쪽 낡은 창고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마늘들도 초가을 풍경이었다. 마늘은 창고 안에 세 줄로 매달려 있었다. 맨 앞줄은 말끔하게 다듬어 나일론 그물양파자루에 담아 놓은 것들이었다. 이번 나들이에 나선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줄 것들이었다.

마당가에서 늙은 호박
 마당가에서 늙은 호박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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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긋 벌어질 것 같은 밤송이
 벙긋 벌어질 것 같은 밤송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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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쪽의 두 줄은 동서네가 집에서 양념으로 쓰거나 나중에 시장에 내다 팔려고 매달아 놓은 마늘들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올 때 거의 대부분 형제자매들이 이웃들과 나누어 먹기 위해 차에 싣고 왔지만 말이다.

마당 한쪽 언덕 밑에는 호박덩굴이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그 호박덩굴 사이에서 누런 얼굴을 살짝 드러내고 있는 것은 늙은 호박이었다. 누렇게 익은 호박만큼 탐스럽고 푸짐한 모습이 어디 또 있을까.

호박이 늙어가는 옆은 작은 고추밭이다. 집에서 반찬용으로 쓸 고추를 기르는 텃밭이었다. 그 텃밭을 지나자 이번엔 밤나무 밭이다. 이 지역에서 나는 밤이 바로 맛 좋기로 유명한 공주 밤이다. 공주 밤의 산지는 공주 지역뿐만 아니라 청양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을 뒷산은 물론 인근 야산도 온통 밤나무 천지였다.

밤나무 밭으로 올라서자 금방이라도 벙긋 벌어지며 알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밤송이들이 가지마다 탱탱하게 열려 있다. 밤송이들은 가시가 누리끼리한 색을 띠고 있어서 알밤이 이미 탱탱하게 영근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큰 고추 보셨나요
 이렇게 큰 고추 보셨나요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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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과 처마 밑에서 말리는 참깨
 마당과 처마 밑에서 말리는 참깨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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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이리 좀 와 봐요? 이 고추들 좀 보라고. 얼마나 크고 탐스러운지, 저녁 먹을 때 고추장 찍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지 않아요?"

밤나무 밭에서 내려오고 있을 때 아내가 호들갑스럽게 부른다. 다가가보니 아내는 오이만큼씩이나 큰 고추 세 개를 얼굴 앞에 치켜들고 있었다. 너무 큰 고추를 발견하자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이때쯤 처남들과 동서들은 그늘막이 쳐진 들마루 위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늘에 앉아 마시는 술이 입맛을 돋우고 있는 듯했다. 하긴 몇 달만에 함께한 술자리니 술맛에 이야기 맛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구경꾼은 요즘 쓸모가 없어져 마당 한 구석에 거꾸로 엎어 서 있는 돌 절구통뿐이었다.

그들과 어울리다가 대문 밖으로 나섰다. 대문이 마주 서 있는 앞집 마당과 처마 밑에는 잘 익은 참깨를 베어다가 널어 말리고 있었다. 참깨는 때를 놓치면 밭에서 그냥 씨앗이 튀어 나가기 때문에 적당히 말려 적절한 때 털어야 한다. 그래서 눈에 잘 띄는 집 마당에서 말리는 것이다.

비닐하우스 안에 널어말리는 붉은 고추
 비닐하우스 안에 널어말리는 붉은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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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그레 익어가는 복숭아
 발그레 익어가는 복숭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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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건너 비닐하우스 안에는 청양고추의 주산지답게 붉은 고추가 가득히 널려 있었다. 이곳 고추가 바로 매운 고추의 대명사이자 인기 좋은 청양고추 아닌가. 그러나 본래 '청양고추'라는 말은 중앙종묘사에서 개발한 품종으로 경북 청송과 영양 지방에서 시험 재배되어 원산지가 된 고추를 일컫는다는 주장도 있다.

마을 뒤쪽으로 걸어가자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향기를 따라 가자 복숭아밭이다. 상당히 넓은 복숭 밭에는 아기 볼처럼 발그레하고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짙은 향기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복숭아밭 옆에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들이 서 있었다. 사과나무들은 아직 어린 나무들이어서 몇 개씩의 사과가 열려 곱게 익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농장에 가장 많은 나무는 배나무들이었다. 배나무들은 마을 길가는 물론 뒷동산 일부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과수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과도 익어가고
 사과도 익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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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봉지 속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있는 배
 노란 봉지 속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있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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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무들 줄기 밑에는 노란봉지에 감싸인 배가 주렁주렁 매달려 속살이 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이 마을에는 각종 곡식과 채소는 물론 밤나무,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등 과일나무도 많아 더욱 풍요로운 모습이었다.

"벼이삭이 고개 숙인 논 한 번 보실래요?"
"벌써 벼이삭이 고개를 숙였다고, 그럼 곧 수확할 것 아냐?"
"날씨가 이렇게 무덥고 뜨거운데 벌써 가을이라고요?"

마을 앞 들길로 나서자 어느새 뒤따라온 아내와 처남, 동서가 앞장을 선다. 동서는 들길을 지나 산골짜기 사이에 층층이 자리 잡고 있는 제법 넓은 논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정말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 한 논만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제법 넓은 몇 개의 논들은 벌써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고개 숙인 벼이삭이 제법 묵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근처의 다른 논들은 벼가 통통한 것이 줄기에서 벼이삭이 한창 자라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고개 숙이 벼이삭
 어느새 고개 숙이 벼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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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 벌써 가을이네, 벼이삭이 고개를 숙인 걸 보니."

옆으로 다가온 아내도 신기한 듯 고개 숙인 벼논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쪽 넓은 들 가운데도 이렇게 벼이삭이 고개 숙인 논들 많아요. 이른 벼, 올벼들이지요. 아직 이삭이 안 나온 벼들도 곧 이삭이 나올 거구먼요. 배가 불룩하잖아요?"

"지금 고개 숙이고 있는 벼들은 얼마 있지 않으면 곧 수확할 거예요."

뜨거운 태양빛이 작열하는 들녘은 물론 나무들이 가득한 산도 온통 초록으로 짙푸른 모습이 싱그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늘 밑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가을 기미와 함께 뜨거운 태양 아래 익어가는 과일들과 채소, 그리고 고개 숙인 벼이삭에도 가을은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태그:#벼이삭, #땡볕, #가을 기미, #이승철, #그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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