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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시리즈 중 1~2편이라고 할 수 있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뱀파이어 레스타Ⅰ>을 황매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94년, 탐 크루즈(레스타 역)와 브래드 피트(루이스 역) 주연의 영화로 나온 적 있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명성에 비추어 볼 때, 국내에서는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 대한 평가가 약간은 조촐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조촐하다는 것은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교재로도 사용되었다는 <뱀파이어 연대기>가 국내에서는 문학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 '이름값'에 비해 그녀의 글이 너무나 '음지의 경로'로 유통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황매출판사 버전은 '정상유통'의 모습으로 소위 '폼나게' 앤 라이스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다. 19권의 시리즈를 부디 '출판사 부도' 같은 악재 없이 완결해 주길 바란다.

 

새삼스럽게 <뱀파이어 연대기>의 내용을 소개할 마음은 없다. 여기서의 뱀파이어 역시 창백하고 송곳니가 포인트이고 사람의 피가 영양제다. 또한 이 내용들은 순도 100% '구라' 아닌가? 실존인물과의 연관성도 따질 필요 없고, 사회적 이슈와 함께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구라를 "너 이 내용도 몰라?"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스포일러의 문제 이전에, 소설에 대한 자신의 감동을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용에 대한 '내 몸의 반응'을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흔히 흡입력이 좋다는 글은 문체 자체의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필력'에 그 원인이 있다기 보다는 글과 독자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 독자와 이유야 무엇이든 이혼을 '절대적 악'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에 대해서 동일한 반응을 할 리 없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대다수의 국민정서를 정확하게 잡아냈지만, 죽을 때까지 부모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에게는 이 책은 오히려 염장 지르는 SF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뱀파이어 연대기>는 사실 불리하다. 왜냐하면 전생에 흡혈귀였다고 믿는 정신병자나 혹은 흡혈귀를 만나서 죽을 뻔했다고 믿는 소수의 정신착란 환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소설에 반응을 하겠느냐 말이다.

 

대학시절,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는 철학시간의 명제가 떠오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말 그대로 '푹 빠져서' 읽었다. 뱀파이어를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오버랩 시키면서 상상력의 폭을 넓혀간 것일까?

 

오버랩 하나,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대학 1학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들었던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한 한기 내내 "물음표(?)"만 존재하고 "느낌표(!)"는 실존하지 않았던 그 수업에서 교수님은 나에게 철학이 무엇인지를 전혀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물론 내가 멍청해서이다).

 

나는 "이제 알았으니까, 제발 존재와 실존이 무엇인지 좀 가르쳐주세요?"라는 물음에 답을 결국 찾는 것을 포기했고 그렇게 '철학'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구나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그 이후로 철학은 나에게 재미없는 것이 되었다.

 

생뚱맞게도 이 12년 전의 물음에 대한 답을 이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그 순간 이 소설책은 단순히 '앤 라이스의 글'이 아니라, 그저 '흡혈귀 이야기'가 아니라, 12년 전 미완성된 시험 답안의 중요한 정보가 되는 자료가 되었다. 그러니 이 책에 흡입을 할 수밖에 없다. 오픈 테스트에서 책에 빠져드는 그 학생의 눈빛을 기억하는가? 여기에 바로 답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그 눈빛 말이다.

 

그런데 원래 철학이란 것이 좀 거시기하다. 나에게 <뱀파이어 연대기>를 존재와 실존이라는 철학적 물음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라고 하면 곤란하다. 소주나 한잔하면서는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글로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내가 무식한 것이지만, 철학이란 원래 "명료한 답"이 아니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이 고민은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뱀파이어 연대기>의 근원적 물음이 <뱀파이어의 존재와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흡입이 되어서 한번 답을 찾아보겠다고 집착은 하겠는데, 하지만 그렇게 집중만 한다고 답이 쉽사리 나오지는 않았다. 역시 철학문제는 항상 이런식이다. 분명 답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래서 나에게는 또 다른 사례가 필요했다.

 

천재외과 의사 '장준혁'이 떠오르다

 

두 번째 오버랩은 여기서 등장한다. 드라마 <하얀거탑>. 그리고 천재 외과의사 장준혁. 그가 시청자에게 던진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것이 바로 '존재와 실존' 아니었던가? 우리는 왜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에서  이렇게 거창한 것을 고민했을까?

 

장준혁은 천재가 욕망을 소유하기 위해서 어떠한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지를 아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사회적으로 비겁한 일이고 지탄의 대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상하게도 그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러한 나쁜 놈이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가 막히게도 자신의 고민을 장준혁의 존재와 일치시켰다.

 

이 순간 장준혁의 모습은 사회적 잣대로 벌칙을 받아야하는 '기계적 부속품'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고뇌'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된다. 사회적으로 장준혁은 나쁜놈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그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장준혁이 나쁜놈이지만 그가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존재와 실존'이라는 철학적 물음에서 재포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얀거탑>에 열광한 이유일 것이다.

 

뱀파이어가 독자에게 읽혀지는 맥락도 장준혁의 경우와 동일하다. 뱀파이어는 '악'의 존재지만 뱀파이어의 고민은 사실상 우리 내면의 '근원적 고민'과 사실상 동일하다. 뱀파이어는 나쁜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의 고민은 독자에게 역설적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독자는 이를 '실존의 문제'로 전환하여 재포장한다. 뱀파이어의 이야기가 철학적 맥락을 부여받게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두가지 오버랩을 통해 나는 뱀파이어 루이스와 레스타를 마치 '장준혁 캐릭터'처럼 이해하고 그들의 물음을 철학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생뚱맞아 보이겠지만, 소설은 이러한 숙제가 있어야지만 독자들을 흡입시킨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숙제라면 그 흡입의 강도는 배가 된다. 결국 뱀파이어의 고민은 '자신이 선량하다고 믿는' 우리들의 고뇌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뱀파이어 레스타 1> / 앤 라이스 (지은이) / 김혜림 (옮긴이) / 황매(푸른바람) / 2009-08-15 / 1만원

http://blog.daum.net/och7896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뱀파이어 레스타 1

앤 라이스 지음, 김혜림 옮김, 황매(푸른바람)(2009)


#뱀파이어연대기#뱀파이어와의인터뷰#뱀파이어 레스타#하얀거탑#장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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