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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책방에서 사람 만나기

 

 만날 사람이 있어 헌책방으로 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옆지기와 함께 아기를 데리고 길을 나섭니다. 우리와 만날 분한테는 미안하지만 세 식구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한테 맞추어 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인천에서 빠른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그분은 상암동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노량진으로 옵니다. 일찍 닿은 우리 세 식구는 번갈아 아기를 안으면서 책을 돌아봅니다. 아빠는 아기를 안으며 사진을 찍고, 아기를 옆지기한테 넘긴 다음에도 사진을 찍습니다. 전철에서 내내 안 자고 놀던 아기는 책방에서 아빠와 엄마 품에 번갈아 안기면서 스르르 잠이 듭니다. 옆지기가 십 분 남짓 안고 있다가 아빠한테 넘깁니다. 아빠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이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사진찍기를 잇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사진만 찍지 않으나, 언제부터인지 사진찍기를 하지 않으면서는 책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이 책꽂이 저 책꽂이 훑으며 사진기를 들고, 골마루를 슥슥 거듭 돌면서 사진기를 듭니다. 늘 다니는 책방이요 수없이 보고 또 본 골마루이건만 찾아올 때마다 다 다른 느낌이라고 여기면서 사진기를 듭니다. 언뜻 들여다본다면 '책이 꽂힌 똑같은 책꽂이'라 할 터이나, 속속들이 살핀다면 '꽂힌 책은 언제나 새롭게 바뀌는 다 다른 책꽂이'입니다. 이리하여, 늘 다 다른 책이 새롭게 꽂혀 있는 책방으로 마실을 오고, 마실을 오면서 이 모습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만나기로 한 분이 퍽 늦습니다. 손전화를 걸어 보니 엉뚱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답니다. 만나기로 한 분이 늦는 바람에 아기를 안고 책을 보느라 팔이 빠질 노릇이었으나, 이 때문에 좀더 오래오래 책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만나기로 한 분이 책방에 닿습니다. 만나기로 한 분은 아쉽게도 살짝 둘러보기만 하고 밖으로 나옵니다. 때가 저녁이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면 집으로 돌아가는 차편이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2) 헌책방에서 책 만나기

 

 그저 길에서 만나기로 한다면, 만나기로 한 사람이 늦을 때에 뻘쭘합니다. 다리가 더 아프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손에 책을 한 권 쥐고 있다면 기다리면서 책을 읽으면 되니, 시간이 늦어도 웬만큼 괜찮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늦게 와 주었기 때문에 책을 느긋하게 더 읽을' 수 있어 내 마음이 한결 넉넉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제 어린 날을 돌아보면, 동무들을 기다리며 책을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민학생 때나 중고등학생 때 길에서 동무들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잠깐 딴 데에 눈을 팔면 '서로 못 보고 스쳐 지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며 '동무녀석이 올 길'을 눈빠지게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리하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를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날 때 으레 헌책방에서 만나기로 하거나, 가방에 책을 여러 권 챙겨들고 갑니다. 때로는 일찍 길을 나서서 책방에 들릅니다. 만날 때를 살피면서 내 책을 살피고 동무한테 선물할 책을 함께 고릅니다. 길에서 만나기로 했으면 만날 사람이 올 때까지 가방에 있는 책을 하나하나 꺼내어 봅니다.

 

 오늘은 한 시간 반쯤 기다리면서 '더 기다린 탓에 새롭게 알아챈' 책이 꽤 됩니다. 《渡邊聖空-墨繪の描き方》(鳳山社,1962) 같은 책은 오래오래 골마루를 누비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일찍 만나서 금세 움직였다면 굳이 꺼내어 보지 않았을 텐데, 늦게 와 주셨기에 '기다리는 김에 이 책을 한 번 열어 볼까?' 하면서 낡은 상자에 담긴 책을 펼쳤습니다.

 

 이 책은 수묵그림을 어떻게 그리는가를 담습니다. 길잡이책입니다. 일본에서는 수묵그림 그리기를 놓고 이렇게 잘 갈무리해서 책 하나 보여주어 왔군요. 문화며 책이며 놀랍습니다. 어쩌면 우리 나라 수묵그림이 일본과 견주어 역사가 길거나 문화가 깊은지 모를 노릇이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한눈에 알아보기 좋게 갈무리해 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수묵그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길잡이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뿐 아니라 2009년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톨릭 성인전》(가톨릭출판사,1973) 상ㆍ하권을 들여다봅니다. 옆지기가 볼 책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성인에는 우리 나라 108인 순교자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둘이 함께 볼 책입니다. 저는 세례성사 때에 '정하상 바오로'라고 하는 우리 나라 순교자 이름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 받기 앞서 우리 나라 순교자 이야기를 두루 살폈고, 세례성사 받은 뒤로도 순교자 이야기 다룬 책을 하나하나 그러모읍니다.

 

 사진책 《橘川 眞-ルネッサンス街道物語》(グラフィック社,1990)하고 《井上宗和-日本古城物語》(グラフィック社,1987)를 집어듭니다. 'グラフィック社'라는 곳에서는 '나라밖(일본 아닌 나라) 이야기'를 '여행자 눈길과 눈높이'로 들여다보면서 갈무리하는 사진책을 곧잘 펴내는데, 사진 눈썰미가 퍽 그윽합니다. 나라밖 문화를 헤아리는 데에 좋은 한편, 사진깊이를 다지는 데에도 좋습니다. 이만한 사진과 책을 퍽 싼값에 만들어서 내놓기 때문에, 일본은 우리보다 사진문화가 훌륭하고 알찰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레에 손쉽게 장만할 만한 훌륭한 사진책이 많으니, 일본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은 책방마실만 해도 '사진 배우기'가 이루어집니다. 강좌를 듣고 학교를 다녀도 사진을 배울 수 있습니다만, 수백 수천 수만 가지 사진책을 골고루 들여다보면, 말없이 가르치는 말을 엿보면서 내 사진눈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책이란 때와 곳을 넘어서며 말없는 말로 가르치는 고마운 스승입니다.

 

 

 《장태진 엮음-한국은어사전》(형설출판사,1963)을 집어듭니다. 《한국은어사전》은 집에 한 권 갖추고 있으나, 굳이 하나 더 집어듭니다. 이 사전은 두 권을 간직해서 하나는 낙서를 해 가며 보고, 한 권은 알뜰히 건사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조그마한 책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딸딸이'는 자전거를 가리킨다 하고, '딸딸이꾼-딸딸이 오입-딸딸이 전문-딸딸이 티꾼-딸땅이' 들은 모두 자전거 도둑놈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요사이는 이런 말을 안 쓴다 싶은데. 하나하나 넘기면서 웃음이 피식피식 납니다. 재미있습니다.

 

- 검둥개 : 경찰 (범죄인 변말)

- 검은 쥐 잡다 : 보리쌀 훔치다 (학생 변말)

- 개뼉따구 : 나쁜 놈 (학생 변말)

- 똥파리 : 기자 (범죄인 변말) / 순경 (학생 변말)

- 빨간똥차 : 경찰습격 (사창가 변말)

- 빨치산 : 순찰병 (군인 변말)

- 일본가다 : 짧은 시간 매음굴에 자다 (군인 변말)

- 임진강의 박격포 : 엉덩이가 돌출한 여자 (범죄자 변말)

- 쪽바리 : 여자를 홀딱 반하게 하는 남자, 상이군인 (범죄자 변말)

- 찰벼 : 깡패에게 매맞는 사람 (백정 변말)

- 혹뗀놈 : 땐스에 능숙한 여대생 (범죄자 변말)

 

 2009년 오늘날 변말(은어)이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2009년 오늘날 변말을 갈무리해서 사전 하나 엮을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뭐, '간지'나 '엣지' 같은 말마디를 변말로 여길 만한가 모르겠습니다만, 정부에서든 학자 가운데서든 우리 말 씀씀이를 샅샅이 살피는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방자-영친왕비의 수기》(신태양사,1960)를 봅니다. 마침, 이방자 님 다른 책이 하나 더 헌책방에 나와 있고, 그 책에는 이방자 님이 누군가하고 찍은 사진까지 곁들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까지는 살 돈이 안 됩니다. 사진만 고맙게 구경하고 그 책은 얌전히 내려놓습니다. 저는 1960년에 나온 조그마한 《영친왕비의 수기》 하나만 장만할 수 있어도 기쁩니다.

 

 《부묵자/박훤 엮음-조선해학 파수록》(범우사,2005)이라는 이야기책을 구경합니다. 조선 때 해학 이야기를 세월을 건너뛰어 들여다보면서, '고려 때' 웃음이나 '고구려 때' 웃음이나 '가야 때' 웃음이나 '옛조선 때' 웃음을 밝히는 이야기책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멀디먼 지난날이 아닌 바로 오늘날 우리네 웃음을 이야기책에 담는다면 어떤 웃음말을 담을 수 있을까를 한번 돌이켜봅니다. 우리들을 웃음짓게 하는 이야기 가운데 어느 대목을 2009년 오늘 웃음말이라 하면서 책에 담을 수 있을까요.

 

 

 (3) 많이 팔리는 글이면 훌륭한 글쟁이일까

 

 큰 그림책 《파블로 피카소》(마로니에북스/TASCHEN,2006)를 봅니다. 타셴에서 엮은 책을 이렇게 우리 말로 옮긴 판이 있었음을 오늘 처음 알아챕니다. 타셴 출판사 모든 책을 한글판으로 구경하기는 어렵겠으나, 다문 몇 가지라도 만날 수 있으니 반갑습니다.

 

 《한스-게으르크 노아크/모명숙 옮김-요헨의 선택》(풀빛,2006)이라는 청소년책을 구경합니다. 어른문학은 눈여겨보지 않으나 청소년문학은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컸을 때 읽히고 싶어서는 아니고,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한테 읽으라고 건넬 만한 책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저부터 여러 가지 청소년책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른문학이야 어른들 스스로 이모저모 알아보고 사읽으면 되지만, 청소년은 주머니 형편이나 다른 테두리에서 바쁘고 힘들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어른'이 책동무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 한스-게오르크 노아크는 주로 청소년 범죄, 마약 중독, 인종적 증오 등을 주제로 많은 글을 써서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청소년 작가가 되었다. 《요헨의 선택》은 1970년에 발표한 그의 첫 청소년 소설로써, '신계몽주의' 청소년 문학의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현재까지 무려 이백만 부 이상 팔렸다 ..  (책날개 소개글)

 

 책을 집어들기는 집어들었으나, 책날개에 적힌 소개글이 영 못마땅합니다. 굳이 "현재까지 무려 이백만 부 이상 팔렸다" 같은 말마디를 넣어야 했을까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말마디를 넣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 훌륭한 어린이문학가인 이원수, 방정환, 마해송, 이주홍, 권정생, 임길택 님들을 소개하면서 이분들 책이 '몇 백만 권 팔렸다'는 말을 넣지 않습니다. 《몽실 언니》가 몇 십만 권 팔렸다느니 하는 통계가 있기는 있지만, 이런 통계는 부질없는 숫자놀음이 아닐는지요. 정작 우리가 어느 작가한테 궁금해 하거나 알아볼 만한 대목이라면, 어느 작가가 당신 삶을 어떻게 꾸려 오며 어린이와 푸름이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부둥켜안았는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누군가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새로 펴내면서, '권정생 님 책은 여태까지 오백만 권이 팔렸습니다(아마 더 팔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같은 말마디를 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런 말마디가 권정생 할아버지를 칭찬하는 소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글줄이 권정생 문학과 삶을 알알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요?

 

 어느 작가가 쓴 책이 몇 권이 팔렸다는 이야기를 소개글에 적는 일은, '어느 부자가 돈을 얼마 벌었다'고 적어 넣으며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이는 훌륭하고 뛰어나고 좋은 사람이야' 하고 읊는 소리하고 매한가지 아닐는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몇 권을 읽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책 몇 권을 갖고 있다'고 뽐낼 수 없습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이 모두 몇 권이나 되는가 하는 숫자를 밝힌다고 리영희 선생을 섬기거나 드높이는 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숫자가 아닌 얼이 사랑스럽습니다. 우리한테는 돈크기가 아닌 넋이 믿음직합니다. 우리한테는 이름값이 아닌 마음결이 애틋합니다. 우리한테는 권력이 아닌 생각밭이 반갑습니다.

 

 

 "애 키우느라 책방 다니기도 힘들지?" "네." "그래도, 애 키우면서 즐거운 일이 더 많을 거야." "네, 그렇더라구요." 헌책방 〈책방 진호〉 아저씨하고 짤막하게 안부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이제는 한 번 나오기도 참 힘들어요." "그럴 테지." "오랜만에 와서 겨우 살짝 둘러보고 돌아갑니다." "그래, 그래." "오늘도 좋은 책 잔뜩 돌아보고 갑니다. 다음에 다시 들를게요." "그래, 잘 가."

 

 헌책방에서 만난 분하고 노량진 거리를 걷습니다. 알맞춤한 밥집을 찾아보는데 딱히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아기랑 함께 들어갈 만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삼십 분쯤 헤맨 끝에 한 집을 찾습니다. 인천에서도 그러했지만, 서울에서도 아기랑 어느 밥집 한 곳 잡아 들어가기란 더없이 고단합니다. 늘 느끼고 있었습니다만, '장애인 아니고 아이 없고 돈 좀 있는' 사람 눈길에만 맞추는 밥집만 넘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가방을 풀고 밥을 시킵니다. 만나기로 한 분하고 책을 한 권씩 주고받습니다. 저는 제가 쓴 자전거 이야기책 《자전거와 함께 살기》를 건네고, 이분은 당신이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쓴 책인 《희망을 여행하라》를 건넵니다. 아이키우기와 밥먹기와 책과 도시 삶을 도란도란 주고받으며 인천 가는 막차가 끊기기 앞서까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기는 그리 칭얼대지 않습니다. 고맙게 잘 있어 줍니다. 그러나 옆지기가 퍽 힘들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세 식구는 얼굴과 발만 겨우 씻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곯아떨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노량진 〈책방 진호〉 / 02) 815-9363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헌책방, #책방진호, #진호서적, #책읽기,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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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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