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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고개'라는 이름

 

'토성고개'라는 이름은 통영시민들, 아니 '통영사람들'에게는 정말 정겨운 이름이다. 정작 그 정겨운 토성고개의 이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통영을 오래 지켜온 어르신들이나, 향토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아니면 토성고개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토성고개는 왜 토성고개일까?"라는 의문을 가져 보면, 통영 역사의 시작까지 가 닿을 수 있다.

 

'토성고개'는 그 말 그대로 토성(土城)고개를 말한다. 옛 통영성의 성벽 일부가 '토성고개'에 걸쳐 있었고, 그 성벽이 석성이 아닌 토성, 흙으로 쌓아올려진 벽이었다는 말이다. 현재 복원되어 여황산 정상에 자리잡고 통영을 내려다보고 있는 북포루(北鋪樓)를 포함해, 여황산에 걸친 통영성 성벽은 토성이었고, 여황산은 사실상 천연의 성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통영성 복원도에 의하면, 오늘날 4차선 도로 토성고개와 북문터는 토성벽 지역은 아니었다. 복원도에는 통영성의 토성벽은 여황산 자락에서 끝나고, 현재의 토성고개와 북문터는 석성 축조지역으로 나타나 있다. 토성벽은 복원도의 모습보다 좀 더 북문터에 가깝게 조성돼있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복원도를 참조할 때 현재의 토성고개 도로는 '북문고개'가 더 적절한 지명이 될 수도 있다.

 

 계획도시 통제영의 관문

 

 

통영은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임진왜란 전쟁을 계기로 지금의 통영땅의 전신인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고, 통제영 본영과 세병관을 중심으로 성곽을 쌓으니 이것이 통영성이다. 정조 때 수원 화성(華城)이 계획도시로 축조되었으나, 실상 시기를 따지면 통영이 최초의 (군사)계획도시라고 볼 수 있다. 자그마한 포구 두룡포가 삼도수군통제영 설치로 인해 성벽을 가진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 오늘날 통영의 기원이다.

 

짚고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날 통영의 옛 모습을 말할 때 '통영성(統營城)'을 말하지만, 통제영 건설 후 통제영 본영과 주변 군사시설, 각종 생활시설 등을 둘러싼 성벽 축조 당시에는 '통영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통영성'이라는 이름은 성벽 조성 당시인 1600년대 초가 아닌 후대에 붙은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토성고개 정상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영성 북문(北門)은, 조선시대 군사요충지 통제영의 주요 관문이었다. 통영성 북문에서 성밖으로 향하는 '북문로(北門路)'는 현재의 죽림 지역과 고성을 거쳐 진주까지 가 닿는, 중요한 군사도로의 시작점이었다. 통영성 4대문의 위치와 통제영의 위치를 감안하면, 통제영의 군사정보를 싣고 달린 파발마가 출입한 주요 대문이 북문이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북문정(北門井)과 북문지(北門池)

 

그리고 통영성 북문 안쪽에는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 군사도로 시작점인 성문 바로 안쪽에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는 것에서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통영성(統營城)내 9정(九井) 중 두 개의 우물이 지금도 토성고개에 남아있다. 하나는 태평성당 옆 못새미이며 문헌에서 확인된 이름은 신상지변정(新上池邊井)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토성고개에서 여황산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북문내로변정(北門內路邊井)이다.

 

 

북문의 우물, 북문내로변정(이하 북문정)은 통영성 북문 안쪽에 위치했던 두 개의 우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는 세병로 58-19번지 앞에 우물의 모습을 유지하고 한 개가 남아있지만 다른 하나는 소실된 상태로, 지금 북문터(北門地)자리에서 큰길 반대편을 건너다보면 보이는 도로 가운데가 소실된 북문정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토성고개의 옛 우물은 남아있는 것 둘과 소실된 것 하나까지 모두 셋이다.

 

그리고 통영성 내 세 개의 연못(三池) 중 하나가 북문 안쪽에 있었으니, 이것이 북문지(北門池)이며, 2009년 현재 북문터와 함께 북문지는 발굴 조사작업이 완료된 상태이다. 향토사학계는 여황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북문지 연못을 거치고 북문 성벽아래 뚫린 수로를 통해 성밖의 저습지로 흘러나가 농경용수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북문지와 토성고개의 미래

 

토성고개 정상부의 연못터(북문지) 자체는 조사를 통해 확인된 상태이며, 통영성 북문의 초석(토대) 2기도 발굴되어 있으나, 북문터와 북문지 복원 관련 사업은 아직 확정된 바는 없다. 통영시 관계자는 향토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며 "북문을 복원해서 아치로 만들자는 제안과 일단 유보하고 예산확보 후 연못과 우물과 북문을 포함한 공원을 조성하자는 제안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한편, 북포루가 자리하고 통영성 토성벽이 자리했던 여황산은, 통영의 오랜 역사를 감안할 때 미륵도의 미륵산 못지않게 중요한 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옛 '통영성'의 자연 성벽을 이루고, 군사도시 통제영의 유산이 자리한 산이 토성고개 옆 여황산이다.

 

여황산의 북포루부터 출발해 토성벽과 북문, 북문지와 북문정까지를 포함한 통영성 북부 유적의 복원은, 예산과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젠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문 유적 복원과 재조명은 통영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의 재확인이며, '문화예술도시'이며 '관광도시'인 통영의 발전을 위한 재조명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통영, #토성고개, #북문고개, #통영성, #통영 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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