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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와 고속철도와의 인연

 

이 땅에 고속철도(KTX)가 다닌 지도 어느덧 5년여가 흘렀다. 일상 생활의 수많은 부분을 바꿔놓은 고속철도. 그 사업자로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선정되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 위대한 문화유산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지난 100여 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문화유산이 비로소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의궤>(儀軌)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고속철도 사업자 선정이 있었다. 프랑스, 독일, 일본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프랑스에서는 고속철도 사업을 따내기 위해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려는 움직임이 맞물려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때였다. 이를 알고 있었던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한 책을 들고 와 국내에 반환했다.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프랑스측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던 탓이다.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무덤이다. 그는 정조의 뒤를 잇는 순조의 생모였다. 그렇다면 <휘경원원소도감의궤>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것임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왜 이 책이 머나먼 프랑스로 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의궤>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프랑스의 대통령까지 이 문제를 이야기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의궤>는 2007년 고려대장경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자료이기에 그렇게 지정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에 관해 전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우리 교과서에서 <의궤>를 거의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원 화성에 관해서 다룰 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 전부이다. 물론 한국근현대사를 배울 경우에는 외규장각 도서와 <의궤>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다. 고속철도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는 선택과목일 뿐더러 그나마 내용도 충분한 편이 아니다. 따라서 시민들 거의 대부분이 <의궤>를 모른다 할 것이다.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는데 모를 수밖에. 안타까운 일이다.

 

의궤의 뜻과 만든 목적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 궤법)'의 줄임말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서 왕실의 국가적인 행사, 의례 등이 열린 뒤 그 주요 장면이나 도구 등을 그림으로 그려 넣고, 그 전말, 경과, 참여자, 들어간 비용, 의식 절차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놓은 책을 말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행사보고서와 비슷하다 하겠다.

 

<의궤>는 왜 만들었을까? 왕실에서 열리는 수많은 행사들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이 존속한 5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행사가 열리고 또 반복되었을까? 이런 행사들의 원활한 집행과 함께 후세에 모범이 되게 한다는 것이 <의궤> 편찬의 주요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왕조의 국가적 행사는 왕실의 혼사, 국장(國葬),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제사 등 매우 다양했다. 그만큼 의궤의 수도 많았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의궤의 편찬과 보관

 

<의궤>는 어떤 과정을 통해 편찬되었을까?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임시 기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 그것이 도감(都監)이다. 그 행사가 완료되면 도감은 해체되고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여 <의궤>를 편찬했다. <의궤>에 수록되거나 편찬에 활용된 기본(중요) 자료는 도감에 속한 각 관청의 업무 일지인 <등록>(謄錄)과 일종의 기록화인 도설(圖說)이다. 의궤청에서는 여기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하여 <의궤>를 만든다. 

 

<의궤>는 대부분 필사본(筆寫本)이기 때문에 제작 부수는 많지 않았다. 제작된 <의궤> 가운데 1부는 어람용(御覽用)으로 국왕에게 올리고, 나머지는 의정부(議政府), 예조(禮曹), 춘추관(春秋館) 등 행사와 관련된 관련된 기관이나 지방의 사고 등에 분상(分上)하여 소장했다. 이렇게 여러 벌을 만든 것은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함과 아울러 행사의 차질없는 진행을 위함이다.

 

<의궤> 가운데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어람용 <의궤>이다. 내용상은 분상용 <의궤>와 별 차이가 없으나, 양식과 장정에 다소 차이가 있어 서지학적으로 분상용보다 중요하다. 정조는 대부분의 어람용 <의궤>를 강화도에 지은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옮겨 보관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약 300책에 가까운 <의궤>를 포함한 도서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른바 외규장각 도서이다.

 

의궤와 박병선 박사의 운명적인 만남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자신의 정치적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기구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강화도에 또 하나의 규장각을 만들었다. 그것이 외규장각이다. 강화도를 국방상 안전한 지역이라 여기고 여기에 왕실의 중요한 기록유산, 보물 등을 옮겨왔던 것이다. 당연히 어람용 <의궤>도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먼훗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강화도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결국 프랑스가 패해 돌아갔지만, 그 과정에서 외규장각의 도서 300책 정도가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국방상 안전한 지역이라 믿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때 살아남은 도서들이 파리국립도서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1970년대 도서관 별관의 파손도서 창고에 있었던 외규장각 도서에 빛을 보게 해줬던 이가 당시 파리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박병선(朴炳善) 박사였다. 그는 외규장각 도서의 중요성을 도서관에 보고하였고, 도서관측은 수리 작업을 한 뒤 1978년 서고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이 도서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많은 행동을 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를 외면했다. 이후 박병선 박사는 파리국립도서관에서도 해직당했다.

 

그러나 박병선 박사는 <의궤>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책들도 출간되었다. 비록 오류는 적지 않았지만, <의궤>에 대한 선구적인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지금 파리국립도서관에서는 <의궤>를 소개할 때 박병선 박사의 책을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외규장각 도서가 본격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 고속철도 사업자의 선정과 맞물리면서부터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약탈된 문화유산이라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다. 이제까지 <의궤>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가, 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문제가 터지니까 속사정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반환을 외치는 것도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우리의 긍지, 마침내 열매를 맺다

 

<의궤>가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무수하다. 사실 <의궤>에 담긴 반차도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문화재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세한 내용은 또 어떤가? 더구나 의궤를 만든 나라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의궤>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우리 조상들의 무서운 기록정신일 것이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된다. 사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화성의 상당한 부분이 197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완벽한 복원이 가능한 때문이었다.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복원된 문화유산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의궤>가 지니는 가장 큰 가치는 화합과 소통의 정치를 지향한 우리 선인들의 정신일 것이다. <의궤>에는 천한 사람들의 이름은 물론 그들에게 준 임금까지 세세히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책임을 지게 하다는 의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큰 행사에 단단히 한몫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심어준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사랑하는 정신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정치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불만을 낳고 있는 요즘, 우리의 위정자들은 모름지기 <의궤>에 담긴 이러한 정신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의궤>는 우리에게 한없는 긍지를 안겨주는 우리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그 긍지를 제대로 펼칠 줄 몰랐지만. 마침내 그것은 오늘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2007년 6월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 참 고 문 헌 ♧

 

박병선, <조선조의 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신병주, '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3> - '기록문화의 꽃' 의궤', <국제신문> 2006년 7월 24일.

이태진, <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지식산업사, 1994.

정옥자, <오늘이 역사다>, 현암사, 200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보급, 1991~1995. ('의궤' 항목 참조)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한영우, '조선시대 의궤 편찬 시말', <한국학보> 제107집, 일지사, 2002.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존에 생각하고 써두었던 궁중기록유산에 관한 여러 글들을 바탕으로 여러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새로 쓴 글입니다.


#의궤#외규장각도서#박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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