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시절, 일가친척이 몰려 사는 농촌 씨족마을에서의 세배는 꼭두새벽부터 시작되었다. 한 집에 같이 살거나 이촌 이내의 가족들 간에 치러지는 세배가 1단계라고 한다면, 해가 뜨기 전까지 주고받는 6촌 이내의 세배는 2단계에 속하고, 차례가 끝난 뒤부터 시작되는 방계 혈족들 간의 세배는 3단계, 그리고 설 다음날부터 찾아오는 고모나 고모부 혹은 멀리 흩어져 있는 친척들을 찾아가서 드리는 세배는 4단계라고, 편의상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닭이 울었다. 아직 먼동도 트지 않았다. 호롱불에 비치는 마당에 내린 서릿발은 마치 비단이라도 깔아놓은 것 같다. 엄마는 벌써 부엌에서 솥단지에 물을 퍼부어 담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전날에 아빠가 술이 '떡'이 되지만 않았다면 불 때는 당번을 자발적으로 맡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큰아들을 가만히 흔들어서 깨운다.

 

"아이, 일어나야, 얼른. 불 좀 때야."

"에이 씨, 안 해."

"아따 야 참말로, 얼른, 일어나야 응?"

 

변변찮은 설빔도 없는 마당에 꼭두새벽에 불 당번까지 하라는 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쩔 것인가, 전날에 튀어나온 '주둥이'를 아직도 집어넣지 못한 채로 툴툴거리며 불을 때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은 풀어지고 엄마의 '종종거리는' 발걸음이 자꾸 눈에 밟힌다. 까닭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눈물이 한 방울이 쏙 빠지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서 이글이글 타 들어가는 자장개비(삭정이)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다 내 손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는 듯 모르는 듯 아무 억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어져 버린다.

 

엄마는 김장할 때나 쓰던 커다란 항아리를 바라지 옆으로 끌어다놓고 바가지와 수대를 이용해서 절반쯤 높이로 찬물을 붓는다. 솥단지에서 끓는 물을 퍼다가 또 부어놓고, 손으로 휘휘 저어서 온도를 확인한 다음 방문을 벌컥 열고 아이들을 불러 깨운다. 아이들은 싫다고 징징대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마는 한달음에 뛰어 들어가서 이불을 와락 젖혀 버린다. 아이들은 제법 성깔을 부려본다고 꽥꽥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지만, 세뱃돈, 세뱃돈, 연이어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만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튀어 일어나고 만다.

 

엄마는 어느새 작은 솥단지에 물 한 바가지를 부어넣고 불을 지핀다. 이때부터 엄마의 손은 둘이 아니라 셋, 넷, 다섯으로 자꾸 늘어난다. 희미한 호롱불을 배경으로 왔다갔다 부산을 떠는 벌거숭이 아이들을 차례차례 하나씩 끌어다가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기고 한 손으로는 발등을 득득 문질러대고 보이지 않는 또 한 손으로는 "가만 있어 이놈아" 소리를 지르며 볼기를 치는 한편 끓는 물 속에 떡살을 넣기도 하고 칼도마 소리도 경쾌하게 고명을 써는가 하면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서 아빠의 한복을 챙긴다 싶으면 또 어느새 부엌 살강에서 그릇들을 꺼내고 떡국을 챙겨 담은 쟁반을 보자기로 정성껏 싸고 있었다 싶은데 어느 순간 머리를 빗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선녀 같은 엄마가 되어 있어 버린다.

 

그리고 잠시 뒤에 아빠를 선두로 꼬맹이들이 새끼오리처럼 졸졸졸 집을 나서는데, 눈이라도 옴팡 내렸을 경우에는 당그래나 대빗자루를 병장기처럼 들고 나서야 한다. 아빠가 선두에서 당그래로 대충 길을 내며 나아가면 큰놈이 뒤에서 대빗자루로 쓸어내고, 둘째는 발로 다지고, 셋째 이하는 깡총거리기나 하고, 떡국이 식으면 안 된다고 품에 꼭 껴안은 엄마는 맨 뒤에서 "아이고 이러다 해 뜨겠네." 손이 느리다고 독촉을 하신다.

 

엄마에게는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집안의 최고 어른이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다른 떡국을 먼저 드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초조감이 있다. 이러한 초조감은 엄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당숙모에게도 있고 작은당숙모에게도 있고, 새벽에 떡국을 들고 세배를 나선 모든 엄마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일종의 경쟁심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이러한 경쟁을 잘 알기 때문에 먼저 왔다고 먼저 뚜껑을 열게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뚜껑을 열게 하고 한 숟가락씩 골고루 '떠주는' 방식으로 경쟁 자체를 무화시켜 버리지만, 그것을 잘 알면서도 엄마들은 매년 그렇게 '내 것이 제일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신다.

 

경쟁심은 엄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경쟁심은 엄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은밀하고 치열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세뱃돈을 받았느냐, 아니 '수금'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정월 한 달 내내 아니 그 뒤로도 몇 달은 더 아이들 자신의 존재근거와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아이들은 엄마 못지않게 빨리 도착해서 빨리 세뱃돈을 받고자 했다. 혹시라도 제일 먼저 도착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리고 당숙이며 당숙모가 일원짜리 하나라도 더 주지 않을까 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당숙도 당숙모도, 그 누구도 세뱃돈에 차등을 두지는 않았다. 드물게 한 번씩 갓난아기가 등장했을 경우 일 원짜리도 아닌 오 원짜리 빳빳한 지폐를 건네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세 살 이상 열두 살 즈음까지는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일 원이면 일 원, 이 원이면 이 원, 그렇게 금액이 획일화되어 있어서 기쁨이 두 배 세 배로 뛰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하는 다소 맥 빠지는 경쟁으로 끝나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그날의 경쟁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경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새벽의 세뱃돈은 그러니까 준비운동 성격인 셈이었다.

 

꼬맹이들과는 달리 큰아들에게는 약간 차원이 다른 경쟁이 하나 더 있었다. 네다섯 살 때부터 요즘 말로 치자면 과외공부로 서당을 다닌 큰아들에게는 지방을 쓰는 특별한 영예가 주어지는데, 이 영예는 큰댁의 큰아들이나 작은댁의 큰아들이나 큰아들이라면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통의 것이어서, 큰아들들은 저마다 나름의 경쟁심을 갖고 정성껏 아주 정성껏 예쁜 글씨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 노력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내밀하고도 눈물겨운 것이어서, 꼬맹이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쓰다가 찢고, 쓰다가 구기고, 갑자기 반듯한 책상다리로 앉아 심호흡을 하는 등 온갖 부산을 피우는 어떤 것이었다.

 

차례를 지내기에 앞서 한 마디씩 해주시는 당숙들의 품평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방을 잘 썼다거나, 아주 잘 썼다거나, 그 어떤 평가도 그날이 지나면 시나브로 잊혀지지만, 큰아들들 자신들이 말없이 내리는 평가는 돌아오는 추석까지 적어도 육 개월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내'가 내 글씨를 아무리 잘 썼다고 우쭐거려 봐도, 큰댁이나 혹은 작은댁의 큰아들이 쓴 지방 글씨가 객관적으로 아주 잘 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인정을 해야만 하는 '아픔'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차례가 시작되면 아이들 간에 자리다툼이 벌어지는데, 염불은 무슨 염불이냐 잿밥이 우선이다 하는 뭐 그런 철학에서 나오는 신경전이다. "사과는 내 것이여, 암도 손 대지마", 가장 연장자가 미리서 그렇게 경고를 해두고 있지만, 꼬맹이들도 사람이다, 먼저 잡는 사람이 주인이지 뭐, 하는 정도의 하극상은 가볍게 용인이 되는 상황이고 보면 연장자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많은 없다.

 

떡이다 고기다 그렇게도 많은 음식 가운데 특히 사과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지고 다니며 자랑을 하고 싶어서였다. 배는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을 수 없으니 곤란했고, 밤이나 대추는 너무 잘아서 썩 그리 면목이 서는 과일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종일토록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역시 사과가 제일이었다. 그래서 밀고 당기고 꼬집어대는 은밀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러다가 드물게는 차례상 앞으로 한 아이가 달팍 엎어져 버리는 경천동지의 사태가 벌어지기고 하지만, 날이 날인지라 어른들도 크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그저 껄껄 웃어나 주는 정도에서 사태는 어쨌든 미봉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제3라운드, 그날의 하이라이트인 동네 세배가 시작된다. 이것은 사실 세배라기보다 그냥 수금업무라고 해야 적당한 표현이 될 것이다. 모름지기 수금이란 때를 잘 맞춰야 한다. 때문에 아이들은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만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들이 그날 큰맘 먹고 풀기로 작정한 세뱃돈은 그 총액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어서, 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돈 구경은 하지도 못한 채 배가 불러 더 이상은 먹을 수도 없는 떡국이나 멀뚱멀뚱 구경하고 나와야 하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동시에 병을 핑계로 누워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뉴스는 그날의 특종 중에서도 최고의 특종이라 이를 만했다. 이 특종은 사실 그대로 전파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되어 바람처럼 떠돌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 댁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병을 핑계로 누워 버린 것이 아니라 세뱃돈을 다른 댁에 비해 세 배나 혹은 네 배씩 준다는 식이다. 때문에 귀가 밝고 분석력도 좋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 댁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건너뛰지만, 정보는 빨라도 허수를 찾아내지 못한 아이들은 멀리서 일부러 그 댁을 먼저 찾았다가 "뭐여, 이것이 뭐여" 소리나 꿍얼거리며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해 버리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뛰다 보면 어느 순간 배에서 꼬르륵, 꼬륵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그렇게도 많은 음식상을 거쳐 왔는데도 배가 고픈 까닭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얼른 먹어치울 수 있는 식혜나 몇 번 후루룩 후룩 마셨을까, 음식은 거의 손에 대본 적이 없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할 판에 음식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그렇게도 열심히 뛰었건만 수금한 세뱃돈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뭐냐 이거. 은근히 화도 나고, 까닭을 알 수 없는 부끄러움 같은 것도 밀려오고, 그래 하는 수 없이 밥 먹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가 보지만, 엄마는 쓰러져 있다. 잠들어 있다.

 

그냥 쓰러진 것인지 잠을 자려고 누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자세로 누워서 세상을 온통 떠메 간다 해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 있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뭔가가 이상해진다.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의 정체는 뭐지? 가만히 앉아서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노라면 '나'도 그만 사르르 잠이 온다. 그렇게, 엄마 곁에 쓰러져서 자는지도 모르게 자다가 눈을 떠 보면 엄마는 어느새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고, '나'는 언제 덮었는지 알 수도 없는 이불 속에 누워 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가 그렇게 저문다. 하지만 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월 대보름 불싸움 놀이까지 주욱 이어지는 것이 설 명절이니까.


태그:#설, #세뱃돈, #씨족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