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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켄 가모군(蒲生郡) 히노쵸(日野町) 오노(小野)에는 귀실신사가 있습니다. 이 귀실신사에서 받들어 모시는 귀실집사는 백제 부흥군으로 주류성에서 활동하던 귀실복신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99년 당시 귀실집사는 백제 사람 700여 명과 더불어 이곳 히노쵸에 와서 살았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바르다면 1311년 전 왜 시가켄 가모군에 백제 유민들이 살게 되었을까요?

  귀실신사 입구에 세워진 표지 돌, 비와코라고 하는 큰 호수 동쪽 호수와 이어진 논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귀실신사가 있습니다. 교토나 오사카에서 JR을 타고 가기에는 좀 구석진 곳에 있습니다.
 귀실신사 입구에 세워진 표지 돌, 비와코라고 하는 큰 호수 동쪽 호수와 이어진 논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귀실신사가 있습니다. 교토나 오사카에서 JR을 타고 가기에는 좀 구석진 곳에 있습니다.
ⓒ 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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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3년 당시 일본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진 백제를 구하기 위해서 백제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나 일본 원정군은 백촌강(白村江, 하쿠스기노에)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지고 맙니다.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에 진 일본은 언젠가 나당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바닷가 오사카에서 가까운 아스카(飛鳥)에 있던 수도를 일본 내륙에 있는 현 시가켄(滋賀縣) 오츠시(大津市), 당시 오우미(近江) 오츠교(大津京)로 이전합니다.

당시 오츠교로 천도한 다음 국가적으로 호적을 편성하는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지만 서기 671년 천지천황(天智天皇, 덴치텐노우)이 죽은 뒤 임신의 난(壬申の乱, 진신노란, 672 년)이 일어나 다시 아스카로 수도를 옮기고 맙니다. 오츠교는 약 5년 정도로 끝납니다. 이 처럼 오츠교는 백제 멸망 이후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백제에서 온 유민들 역시 수도에서 가까운 오우미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실신사 전체 모습, 신사가 작고 아담합니다. 일본 큰 신사에는 구지(宮司)라고 하는 직원이 있지만 주로 시골에 있는 작은 신사는 마을 사람들이 신사를 관리하고 신앙 의례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실신사도 이 마을 구장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귀실집사의 묘비석은 가운데 있는 본전의 뒤편 오른쪽에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묘비석이 발견된 뒤 신사를 꾸미었을 것입니다.
 귀실신사 전체 모습, 신사가 작고 아담합니다. 일본 큰 신사에는 구지(宮司)라고 하는 직원이 있지만 주로 시골에 있는 작은 신사는 마을 사람들이 신사를 관리하고 신앙 의례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실신사도 이 마을 구장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귀실집사의 묘비석은 가운데 있는 본전의 뒤편 오른쪽에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묘비석이 발견된 뒤 신사를 꾸미었을 것입니다.
ⓒ 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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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집사의 아버지인 귀실복신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이년 마다 한번 씩 열리는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 은산 지역에 괴질이 퍼져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이 점을 쳐보자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령이 떠돌아 생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백제 부흥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씻김굿을 지내주자 질병이 없어졌습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2월 별신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산별신제입니다. 지금은 백제 부흥군의 영혼 위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여 지냅니다. 그간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던 별신제는 1966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나라의 도움을 받아 더욱 화려해지고 참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귀실집사 묘비석이 발견된 돌무덤, 이 돌무덤 안에 팔각형 돌기둥에 쓰인 묘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묘비석 돌기둥은 이 부근에서 생산되는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집 모양으로 된 돌무덤은 쉽게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귀실집사 묘비석이 발견된 돌무덤, 이 돌무덤 안에 팔각형 돌기둥에 쓰인 묘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묘비석 돌기둥은 이 부근에서 생산되는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집 모양으로 된 돌무덤은 쉽게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 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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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별신제의 중심신은 백제 장수는 귀실복신입니다. 귀실복신은 도침, 풍과 더불어 주류성에서 활동하던 백제 장수입니다. 그런데 백제 패망 이후 많은 백제 사람들이 당시 일본 오우미 지금의 시가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게 됩니다. 특히 시가켄 가모군은 백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백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옛날부터 후도도(不動堂)라고 하는 오노(小野) 마을의 니시노미야(西宮) 진자 뒤 곁에서 묘비가 발견되는데 11세기 무렵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묘비에 귀실집사 묘라는 기록(鬼室集斯墓)과 귀실집사가 서기 688년 죽은 뒤 서손 미성이 만들었다는 기록(庶孫美成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이 신사는 귀실신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귀실집사는 은산별신제의 대상신인 장군 귀실복신의 아들이거나 가까운 친척이라는 설이 제기 되었습니다. 

   귀실신사 앞에 있는 집사정(集斯亭), 7 년 전 이곳에 갔을 때는 없었습니다. 요즘 지어진듯합니다. 귀신신사에 뜻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내어서 지었다고 합니다. 육각 우진각 지붕으로 단청이나 형태를 한국풍으로 지었습니다.
 귀실신사 앞에 있는 집사정(集斯亭), 7 년 전 이곳에 갔을 때는 없었습니다. 요즘 지어진듯합니다. 귀신신사에 뜻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내어서 지었다고 합니다. 육각 우진각 지붕으로 단청이나 형태를 한국풍으로 지었습니다.
ⓒ 박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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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천지왕 4년 2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귀실집사는 지금의 교육을 담당하던 후미노츠카사노가미(學職頭)라고 하는 높은 관직에 있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귀실집사는 백제에서 연마한 한학과 천문, 지리, 역술, 병법 등을 당시 일본사람들에 가르치거나 가르치는 교육제도를 정비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귀실복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귀실집사는 당시 백제에 그다지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백제 유민을 인솔하고 가서 일정 지역에 정착하고 일본의 높은 관직에 올라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귀실집사는 우리가 지금 한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관계 보다 일본이 더 가까웠나 봅니다. 즉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 국가의 개념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실신사가 귀실복신의 아들 귀실집사를 모신 진자라는 것이 알려진 뒤 은산별신제가 열리는 한국 부여군 은산면과 일본 히노쵸는 자매 결연을 맺고 해마다 교류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귀실집사에서는 해마다 아키노다이사이(秋の大祭)라고 하여 11월 8일에 가까운 일요일, 주로 11월 1일에서 8일 사이 일요일에 축제를 거행합니다. 이 때 한국의 풍물패가 와서 풍물을 치기도 했습니다.

참고문헌

김선풍, 은산별신제의 민속학적 고찰, 민속연구2,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1992.
박노자, 백제유민, 망명지로 왜를 택하다, 한겨레21, 2009.7.6
이필영, 은산별신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임동권, 한국에서 본 일본의 민속문화, 민속원, 2005.10    
일본서기,
大津市歴史博物館 홈페이지,

가는법 : 오사카나 교토에서 JR 동해도본선 비와코(琵琶湖)행을 타고 오우미하치망(近江八幡)역에서  내려 다시 그곳에서 출발하는 오우미(近江) 철도를 타고 요카이치(八日市)역에서 히노(日野)행으로 갈아타고 히노(日野)역에서 내려 오노(小野) 귀실신사행 버스를 타고 갑니다.

덧붙이는 글 | 박현국 기자는 일본 류코쿠(Ryukoku, 龍谷)대학 국제문화학부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태그:#귀실신사, #귀실집사, #시가켄 히노쵸, #백제 유민, #귀실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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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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