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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그때 우리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 더위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여름에 더 무덥게 느껴지는 것이 서울 생활이다. 맞벌이로 아이 셋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우리 가족은 덥다고 피서를 떠날 수 없었다. 그냥 지하 단칸방을 석빙고라고 생각하고 지내야만 했다. 집을 떠나 시원한 곳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TV를 통해 본 아이들이 가끔 "우리도 피서 한 번 가면 좋겠다"는, 가능성 크지 않은 주문을 할 때가 그 즈음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는 나는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곳에 눈 돌릴 틈도 없이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까지 졸업했다. 주위에서는 나를 두고 사막에 던져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억척스럽게 산 지라, 당연히 들을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가정을 갖고 난 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였다. 팍팍한 나의 삶에서 여행과 휴가 심지어 친목 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곧잘 사치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여름 바캉스는 저 멀리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전해지는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나는 그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고단한 나의 삶이 우리 가정의 생활을 강하게 결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삶과 생각이 늘 옳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내와 어린 아이들의 심정은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말하자면 가장으로서의 절대 권위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한 행태가 가장으로서 잘하는 일인 줄 알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의 고정된 사고(思考)에 가족들이 똘똘 뭉쳐 강하게 반발했다면, 사고가 일찍 깨질 수도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민은 다른 데서 찾아왔다. 그 때 처형 댁이 부산에 살고 있었다. 경찰 공무원 남편과 두 남매를 둔 처형은 우리보다 형편이 좀 나았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여름철마다 들과 산으로 피서를 찾아다니는 가정이었다. 오래 전 그 해 여름, 손윗동서가 직장 동료들과 2박3일로 피서를 떠나는데, 함께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일행들도 모두 우리의 합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절의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동서는 막무가내였다. 막판에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나의 약점까지 건드리며 가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쉬 화답할 수 없었다. 피서 일행의 면면을 볼 때,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동서는 부산의 한 경찰서 수사과에서 일하고 있었다. 범인 잡는 데 공을 세워 TV에도 몇 번 나왔고, 경찰청장과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직장 상사들과 함께 시원한 곳을 찾아 피서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경찰서 간부들과의 오붓한 자리에 우리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편하고 어려운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경찰서장에다가 수사과장 팀장 등이었고 동서는 그 중 가장 아래 서열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홀몸으로 참석한 반면 가족 단위로는 동서 네와 우리 가족뿐이었다. 경찰 조직에 서열의식이 뚜렷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 동서가 우리 가족을 참석시키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랜 사회운동으로 경찰과 대립각을 세우며 살아온 사람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대화에서 내 삶에 대한 이야기가 좋은 화젯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서와 처형의 강권에 못 이겨 부랴부랴 그 피서지에 합류한 것은 나의 마음이 전혀 아니었다. 위치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피서지가 경남 언양 어느 외진 곳 정도였던 것 같다. 작은 폭포를 낀 맑은 개울물이 있고 산림이 우거진 그곳에 엉성하게 놓인 조립식 건물이 우리가 2박을 해야 하는 집이었다. 전문적으로 영업을 하는 집이 아닌 듯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집 주인은 경찰서장 등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임시로 지은 조립식 집은 우리 일행을 다 수용하기엔 부족했지만 야외에 텐트를 치면 지내는 데 큰 불편함이 없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서는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었다. 이런 놀이에 경험이 많은 탓에 모든 순서를 주도하고 있었다. 서열이 맨 아래인 사람이 설쳐대는 것을 그들 조직에서는 상관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텐트를 설치하는 장소에서 발생했다. 동서와 팀장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집 앞 뜰에 텐트를 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동서는 그게 아니었다. 폭포 옆 공터에 텐트를 치면 생각만 해도 더위가 도망갈 거라며 그곳을 고집했다. 동서는 육중한 체격이며 우락부락한 두상(頭狀) 등에 걸맞게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동서의 주장에 반대하는 측이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시작된 장마로 인해 수해(水害)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피서를 갔다가 폭우로 인해 아까운 목숨을 잃거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뉴스를 매년 보아온 터라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강한 고집을 여러 사람의 느슨한 주장으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폭포수 밑 개울 가 평평한 장소에 두 개의 텐트를 치고 일부의 짐을 그곳으로 옮겼다.

 

하룻밤을 무사히 보냈다. 동서를 비롯해 그곳에서 밤을 지샌 사람들은 모처럼 시원한 여름밤을 보냈다고 만족감을 표현했지만 마음 졸이며 바라본 나는 그들의 만족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장마가 점점 북상하고 있으며 비의 양도 늘고 있다는 뉴스가 시간마다 흘러나왔다. 경찰서장을 비롯해서 간부급들은 하루 밤을 묶고 각자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모르긴 해도 동서네 가족과 우리 가족을 위한 배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분위기였지만 이질적인 사람들 속에서 마음고생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일었다.  

 

그들이 떠난 뒤, 모든 것이 교통정리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집, 동서 가족은 텐트. 이것은 두 가정의 정서를 생각할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동적인 가정과 정적인 가정, 우리 가정은 가장인 나의 영향으로 움직임을 싫어하는 정적인 가정에 속했다. 아이들은 먹는 사이사이 개울에 가서 물에 몸을 담가 장마철임에도 그런대로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에 맞지 않게 가지고 간 몇 권의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밤에 발생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시시각각 늘어만 가는 강수랑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개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도 폭우에 무서움을 느낄 정도인데, 지금쯤 텐트에 몸을 맡기고 있는 동서네 가족은 어떨까? 계곡 물은 불어나고 줄어드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데. 언뜻 잠이 깨어 시계를 보내 오전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내를 깨웠다. 손전등을 찾아 200 여m 떨어진 텐트로 급히 달려갔다. 아니 이럴 수가! 두 개의 텐트 중 하나는 보이지 않았고 바깥 쪽 텐트도 불어난 물이 삼키려고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사고가 난 것이 분명했다. 두 텐트에 식구들이 나누어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온갖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타의이긴 하지만 처음 찾은 피서가 이런 사고로 얼룩질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내가 먼저 텐트 문을 치켜 올렸다. 아아! 쾌재라! 좁은 텐트 속에 네 개의 머리와 여덟 개의 다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네 명의 사람들을 급히 깨웠다. 처형과 아이들이 토끼눈을 하고 일어났고, 술에 취한 동서도 귀찮다는 듯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처형의 말은 이랬다. 폭포수 물소리만 들어도 시원한 곳에 텐트를 치긴 했지만 염려가 없지 않아 앞 텐트에는 짐을 넣고 안쪽 텐트에 식구의 잠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잠을 자지 않고 밤샘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시나브로 한두 사람씩 잠에 떨어졌다고 한다. 마지막 잠자리에 든 처형이 3시가 다 되어 깜박 잠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30분 사이에 텐트 하나가 떠내려가고 나머지 하나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우린 급히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떠내려 간 텐트에 둔 짐들은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생전 처음으로 간 피서에서 당한 일 치고는 고약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목숨을 잃는 슬픔을 피하긴 했지만 이 피서는 그 후 나의 생각을 더욱 고정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나는 피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젠 아내도 나의 생활에 적응이 되어 맞춰주려고 한다. 아이들은 그들대로 삶을 개척해 나갈 나이가 되었다. 10년도 더 된 장마철 폭포수 밑의 피서,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경험은 피서를 가지 않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식히게 하는 좋은 재료가 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10, 이 여름을 화끈하게!' 응모 글


태그:#이 여름을 화끈하게, #폭포수, #동서, #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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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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