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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이 떠나감을 겨울 동장군도 아쉬워하는지 새해를 앞두고 눈이 자주 내린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눈을 반기지 않아 뉴스와 방송에서는 온통 눈으로 인한 체증과 경고 일색이다.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면 속도와 경쟁의 도시 서울이 금세 '슬로시티(Slow City)'로 변하는 모습이 재미있고, 수십 수백 년간 쌓아온 인간의 도시 문명을 몇 시간 만에 하얗게 뒤덮어 버리는 자연의 거대한 힘이 느껴지기도 하다.

요즘같이 눈이 많이 내려 모든 것이 게걸음을 하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와중에 유일하게 제 속도를 내며 눈 속을 유유히 달리는 게 있는 데 바로 기차다. 기차와 기찻길은 펑펑 내린 하얀 눈과 참 잘 어울리고 낭만이 느껴져 좋다. 추운 겨울이 그리 춥지만은 않게 해주는 것들이다. 내가 사는 서울 주변에 그런 기찻길이 있는데 바로 추억 속의 교외선 기찻길이다.

수도권의 서민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던 교외선 기차는 2004년 시속 300km의 KTX가 개통되던 날 폐쇄되었다. 인터넷 지도를 보면 놀랍게도 기찻길은 아직도 남아 있어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 게다가 교외선 간이역의 흔적까지도 남아있다고 하니 요즘같이 눈 내리는 날 안 가볼 수 없겠다.

 눈이 그렇게 펑펑 내려도 희한하게 기차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그렇게 펑펑 내려도 희한하게 기차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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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길 부근 동네에 사는 닭들이 마치 주민인양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닌다.
 기차길 부근 동네에 사는 닭들이 마치 주민인양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닌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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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시골 사이를 달리던 교외선 기차 

도시 주변의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동네를 예전엔 교외라고 불렀다. 교외선 기차는 그래서 도시와 시골 사이의 경계를 달리는 기차였다. 교외선이 도시에 사는 많은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교외란 말이 이젠 사어가 되었듯 교외선 기차란 말도 같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십 대 청춘시절 여자친구와 교외선 기차를 타고 장흥역, 벽제역에 내려 풍광 좋은 길을 걸으며 데이트도 하고, 어릴 적 식구들과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교외선 기차에 올라 송추역, 일영역에 내려 노고산, 북한산의 시원한 계곡이 있는 유원지에서 피서를 하며 놀아주었던 내 부모님의 젊은 날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수도권 전철 3호선을 타고 대곡역에서 내려 교외선 기찻길을 더듬으며 찾아간다. 기차가 지나가던 동네답게 시골 같은 정겨운 분위기가 나는 동네길이다. 눈길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동네 주민분에게 교외선 기찻길을 물어보니 대번에 "아! 대정역이요" 한다. 기차와 기차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찻길만은 남아 있어서 그런지 교외선은 아직도 주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철길위에 쌓인 새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보는 즐거움도 이채롭다.
 철길위에 쌓인 새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보는 즐거움도 이채롭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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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길 옆 토담골이란 가게 이름이 그 옛날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길 옆 토담골이란 가게 이름이 그 옛날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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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선 기차길을 걷고 달리다

교외선 기차길 옆으로 1차선의 작은 찻길이 나 있다. 임진각역이 종점인 경의선 기찻길도 옆에 작은 찻길이 동생처럼 나 있는데 기찻길을 계속 보며 걷거나 달릴 수 있어 여행자에게는 참 고마운 선물 같은 길이다. 눈 쌓인 철로를 보니 왠지 걸어보고 싶어져 철길을 걷다가 눈 속에 그만 신발이 푹 빠지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포근하다.

교외선 대정역, 원릉역을 향해 살금살금 눈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라는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온다. 기찻길 옆의 수수한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인데 가게 이름이 '기차길 옆 토담집'이다. 뜨끈한 들깨국수 한 그릇을 사 먹으며 교외선이 번창하던 시절 주인아주머니의 옛 영화를 들어주었다.

혹시 저 눈 덮힌 철로 위에 기차가 지나가는지 물어보았더니 가끔 화물기차나 군용열차가 지나간단다. 언제 지나갈지는 모른다 하니 살아생전 많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창 밖 마당엔 튼실하게도 생긴 닭들이 고개를 바삐 돌리며 집주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배시시 웃음이 나는 동네다.

 이젠 시간의 뒤안길에 숨어버린 기차역 승강장에 서보니 교외선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젠 시간의 뒤안길에 숨어버린 기차역 승강장에 서보니 교외선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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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뒤안길 교외선 간이역

대정역을 지나 원릉역에 도착했다. 따로 표지판이 없는 곳이라 무심하게 달리다간 휙 지나치기 십상인 간이역들이다. 기차가 더 이상 서지 않으니 손님은 물론 역무원도 없는, 학교로 치면 폐교다. 을씨년스러웠을 간이역들엔 다행히 겨울 눈이 축복처럼 내려주어 한층 화사해졌다.

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간이역의 플랫폼에 서 보았다. 마치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고개를 양쪽으로 두리번거리면서.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혼자 서 있자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의 뒤안길로 들어선 느낌이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교외선 기차의 옛 추억이 떠올라서 그런건지, 기차가 지나가지 않아도 실망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쌓인 눈이 무거운지 털썩털썩 머리 위의 눈을 땅으로 털어내는 나무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어진 기찻길을 따라 달려간다. 얼마를 달렸을까, 얼음으로 하얗게 도배한 공릉천이 길을 막는다. 춥지도 않은지 하얀 백로 한 마리가 맨발로 물끄러미 서 있다. 이 길을 더 가면 일영역, 장흥역, 송추역, 의정부로 가는 기찻길이 계속 이어진다. 교외선 기차의 추억도 함께.

집에 오니 신발과 바짓가랑이는 비를 맞은 듯 다 젖었고, 같이 달린 애마 잔차는 눈의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 땟국물이 질질 흐르지만 마음만은 흐뭇하고 포근했던 겨울날이었다.

 수도권 3호선 전철 대곡역에 내려 눈쌓인 교외선 기차길을 따라 대정역-원릉역-삼릉역 길을 달려갔다.
 수도권 3호선 전철 대곡역에 내려 눈쌓인 교외선 기차길을 따라 대정역-원릉역-삼릉역 길을 달려갔다.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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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교외선 기차#겨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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