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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게 좋은 게 있다. 사실 진짜 좋은지는 모르겠고, 사람들이 좋다고 믿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원하다보니 정치인이나 고위직 어르신들이 그것을 정책 수립에 활용하기도 한다. 장사꾼들은 이상한 상품을 만들어 누구나 그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것 때문에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진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행복을 포기해도 그것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양심적인 전문가들이 세상을 향해 말한다. 얻을 수 없는 것에 올인하지 말라고.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세상에 아주 많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법이다.

다름 아닌 '영어' 이야기이다. 영어 한번 잘해 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지 모른다. 사교육비 때문에 아빠 월급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기도 한다. 엄마가 부업을 나가기도 한다.

영어학이나 영어교육학 강의실 근처에도 안 가본 정치인들은 아이들이 영어마을에 가서 물건 사고파는 체험을 몇 번 하면 영어를 잘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영어를 정책적 공용어로 지정하기만 하면 몇 년 뒤 국민들의 영어 실력이 월등하게 향상되리라 믿는다. 대학에서 100% 영어 강의를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무지하게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 분들도 많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영어 유치원과 학원을 많이 다니고, 영어마을 체험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가하고, 국내 대학의 영어 강의를 아무리 들어도 원하는 영어 실력을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때랑 다르게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를 너무 잘해"라고 이야기한다. 요즘 대학생 대다수는 1990년 전후에 태어났다. 이들은 초등 영어 교육의 혜택을 본 세대이고, 초중고 시절 집안 경제를 괴롭히며 영어 사교육을 받은 세대이고, 일부 중상층 이상 자재들은 영어 유치원, 단기 해외 연수 등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 당연히 영어를 잘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들 중에서도 유독 공부를 잘해 영재 소리를 듣던 학생들이 카이스트(KAIST) 같은 학교에 들어간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때랑 다르게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를 너무 잘한다"고 믿고 싶은데, 어려서부터 영어 사교육을 받고, 그 중에서도 공부를 최고로 잘해 수재만 가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왜 "100% 영어 강의 때문에 죽을 맛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그 학생들이 수학이나 과학의 영재였지, 인문계 과목 영재는 아니지 않았나?"라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한 가지 깜짝 놀랄 이야기를 하겠다. 인문계 쪽에서 대한민국 상위 1% 학생을 모아놓은 대학에 가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에서 영어와 언어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느낀 점은 "20 년 전 대학생들보다 요즘 대학생들이 영어를 더 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착시현상'을 지적해야겠다. 요즘 대학생 중에는 20년 전에 만나기 힘들었던 '영어 고수'들이 상당히 많다.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잘한다. 이런 대학생이 눈에 많이 띄다보니 "우리 때랑 다르게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를 너무 잘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영어를 잘 하는 대학생 중에 어려서부터 학원 많이 다녀서 그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이렇게 영어를 잘 하는 젊은이들은 예외 없이 어린 시절 1~2년 이상 외국에서 생활한 경우이다. 나머지 토종파 학생들은 사교육비를 아무리 많이 써도 속된 말로 '돈지랄'이다.

아무리 투자를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에 화가 나는가? 혹은 절망하는가? 그렇다면 분노와 절망을 희망과 자부심으로 바꿔보자. 도대체 한국 사람이 왜 영어에 목숨을 거는가? 어떤 이들은 영어가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각 분야의 성공한 사람을 살펴보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분야에 따라 영어를 잘해야 하는 분야도 있고, 좋은 영어 실력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도 있다.

그런데 모든 분야를 망라해 성공한 인물을 살펴보면 영어 실력은 제각각이지만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동일하고,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동일하다. 성공한 인물들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이 있고, 열정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추진력이 있고, 강인한 도전 정신을 갖추었고, 자기 분야에 대한 탄탄한 전문성을 확보했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꿈에서 깰 때이다. 영어 하나 잘해 보려고 온 국민이 지불하는 어마어마한 기회비용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 추진력, 도전 정신을 키우는 데에 투자해보자. 전문성 교육과 인성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보자.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면, 우리 국민은 여전히 영어를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내는 초일류 국가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태그:#영어, #영어강의, #KAIST, #카이스트,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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